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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하나님의 나라와 성탄 (미 5:2, 마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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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와 성탄 (미 5:2, 마 2:1~6)


토크쇼의 왕이라고 불리는 CNN의 래리 킹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터뷰 대상자를 한 사람 고른다면 누구로 정하시겠습니까?” 래리 킹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대답했습니다. 유대인인 킹은 계속해서 “나는 그분이 정말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는지 묻고 싶군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게 역사를 정의해 줄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호기심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신비의 종교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신비의 종교라면 예수님의 탄생부터 모든 것이 신비입니다. 성탄은 신비입니다. 
  
신비는 이성으로 이해되고, 해석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신비는 신비로 이해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주로 믿는 것은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처녀의 몸에서 나심이 신비입니다. 목수의 아들이 가진 풍성한 지식이 신비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신적 기적이 신비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 모든 것이 신비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르낭은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 없이 이해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역사를 초월하시면서도 역사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의 시간 속에 오셔서 역사적으로 탄생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역사를 넘나들고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부활하신 다음에는 닫힌 문으로 들어오셔서 공간을 넘나드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늘과 땅을 다 차지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성경은 과학적, 역사적 기술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과학이며 성경이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 탄생도 역사적 사실임을 성경은 증명합니다. 때와 장소를 또렷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나신 때가 ‘헤롯왕 때에’라고 합니다. 이때는 정치적 혼란기였습니다. 정통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에돔) 사람  헤롯이 분봉왕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신 곳은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이곳은 다윗왕의  고향입니다. 베들레헴이란 ‘떡 집’이란 뜻입니다. 곡식과 과실이 풍성한 비옥한 곡창지대입니다. 인류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곳에서 출생하신 것입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은 ‘마고이’라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꿈을 해석하는 신통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메데, 바사, 바빌론에서는 제사장을 언급할 때 주로 이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세 동방박사의 이름은 멜키올, 발타잘, 가스팔이라고 전승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이 별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한 아기를 찾기 위해 유대인들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입니다. 이들이 왕을 찾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나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예수님의 선포의 초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성탄을 맞이합니다. 2009년 성탄에 하나님의 나라와 성탄을 다시 한 번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성탄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입니다. 

마태복음 2:2에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고 동방박사들이 묻습니다. 성탄은 나라의 왕이 나신 날입니다. 이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다. 어느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나라는 주인인 왕과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고대 군주국에서는 왕은 나라의 주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인 왕이 오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유대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메시야의 별칭이었듯이 ‘유대인의 왕’이란 이방인들이 이해하고 있던 메시야의 별칭이었습니다. 메시야 대망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공통된 관심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된 사람의 왕입니다. 모든 선택된 자의 왕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왕입니다. 우리 모두의 왕입니다. 
  
동방박사의 질문을 보세요. 이방의 박사들은 왕의 탄생, 메시야의 도래를 확신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유대 역사에서 보면 조상 대대로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왕이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언제 메시야를 보내주시겠습니까?”라고 부르짖던 그들이지만 막상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는 무관심하고, 메시야를 죽이려고 했던 그들의 영적 무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역설적 사실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이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왔지만 그들이 믿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먼저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를 타고 노를 저었지만 밤새 풍랑으로 고생만 하고 가지 못했습니다. 새벽 4경에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다”라고 소리 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니 오라”고 했지만 베드로까지 “만일에 주님이시거든 나를 물위로 걸어가게 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만일에 주님이시거든”이란 말은 베드로도 예수님을 보았지만 믿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밤새 기다렸지만 막상 눈앞에 나타난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영적 눈이 떠지지 않은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건은 불신만 반복하게 만듭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노라”고 합니다. ‘경배하다’는 말은 ‘프로스퀴네오’라는 헬라어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대상으로 하는 말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복종하다’는 말입니다. 이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하고 복종하려고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은 무관심했습니다. 단지 세속적 권력만 추구하던 헤롯왕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봐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방인 보다 못한 유대인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신령한 눈이 없는 자들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로 영적 장애인이 되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영접하는 자와 영접하지 않는 자,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극단적인 대조를 보인 사건이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요한복음 3:18에는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구원과 심판이 이미 나누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또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0:34-35에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심판이 시작되고 불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두 사람이 밭에서 일하지만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합니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지만 한 여자는 데려감을 당하고, 한 여자는 버려둠을 당합니다. 
  
기독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세 이미지가 강조되었습니다. 첫째는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자(Christus victor)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위임받은 대리인입니다. 셋째는 경건한 삶을 위한 모델 혹은 도덕적 영향력으로서 예수님입니다. 이 세 모델은 결국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신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을 그리스도의 사건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사건은 역사의 단면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역사를 잘라 놓은 듯 나누어졌습니다. 마치 두부를 칼로 자르듯 예리하게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오신 후를 갈라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기원전이라 합니다. BC는 ‘Before Christ’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이루를 기원후라고 합니다. AD는 ‘Ano Domini’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 주님의 해’(in the year of our Lord)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해가 주님의 원년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 역사의 분기점입니다. 예수님은 세계사를 갈라놓은 분입니다. 
  
스펄전은 “그리스도는 세계 역사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중심 되는 인물이다. 모든 것이 그를 기대하고 그에게로 돌아간다. 역사의 모든 회전은 그에게로 집중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주님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류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 오신 이 날을 우리는 찬양합니다. 

둘째, 성탄은 하나님의 나라의 인도자가 태어난 날입니다. 

마태복음 2:6에는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백성을 인도하실 왕으로 오셨습니다. 백성들을 바르게 이끌 목자로 오셨습니다. 왕이 오셨는데, 목자가 오셨는데 백성들이 아직도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왕이 오시면 나라를 바르게 세웁니다. 목자가 오시면 바른 길을 찾게 하십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마치 길을 잃은 양과 같았습니다. 길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 혼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때에 이스라엘에게는 인도자가 필요하였습니다. 길을 잃은 양과 같은 그들에게 목자가 필요하였습니다. 
  
‘목자가 되리라’는 말씀은 구약성경 미가 5:2의 인용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다윗과 같은 목자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실 메시야는 누구입니까? ‘선한 목자’입니다. 베드로전서 5:4에는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선한 목자이며 목자장인 분,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다스리는 자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로 오셔서 길을 잃을 양들에게 길을 알게 하고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오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비로소 길을 모르던 인류에게 길이 열렸습니다. 인류의 목자가 오셔서 길잃은 양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사야 53:6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목자는 양 같은 인류를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합니다.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유일한 인도자이십니다.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길입니다. “내가 곧 길이다”라고 하십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바르게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많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 “와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을 취하실 때에 “불러 오라”고 하십니다.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수많은 주리고 목마는 백성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청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혼인잔치에 오라”고 하십니다. 잔치에 청함을 받도록 모든 사람을 “청하여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주님께로, 영생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고 오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별이 그들을 인도하는 대로 따라갑니다. 별이 멈추었을 때에 헤롯 궁으로 들어갑니다. 헤롯 궁에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별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마굿간이었습니다. 이곳까지 박사들은 별의 인도로 예수님이 계시는 곳까지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누가복음 2:11에는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라고 합니다. 천사의 말에 대해 15절에는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고 합니다. 목자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목자를 잘 만나야 양들이 편하게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나침반은 방향을 알리며 길을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나침반이 없는 것보다 더 고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장 난 나침반을 복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바른 방향, 바른 길, 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목자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이스라엘 나라의 왕입니다. 우리 모두의 왕입니다. 
  
요한복음 14:6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진리는 결코 변치 않는 것입니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틀림없는 길입니다. 유일한 길입니다.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성탄은 새롭고 유일한 길이 생긴 날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가 태어난 날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날입니다. 
  
‘독생자’란 말은 요한의 용어입니다. 요한복음에 세 번 기록되었고, 요한일서에 한 번 기록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독생자란 말은 헬라어로 ‘모노게네스’(monogenes)입니다. ‘모노’ 즉 ‘유일한’이란 말과 ‘게네스’즉 종, 종족, 일족, 자식, 동류란 뜻을 가진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아들입니다. 유일한 길입니다. 유일한 인도자입니다. 유일한 목자입니다.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이는 없습니다. 성탄은 비로소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인도자, 구원자가 생긴 날입니다. 그러므로 온 인류에 인간의 전 생애에 가장 기쁜 날입니다. 

결론 

일전에 어느 신문에 보니 ‘만일에 큰 지진이 나서 한 가지만 지니고 나올 수 있다면 무엇을 가지고 나오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첫째가 휴대전화로 27%이고, 둘째가 지갑으로 24%이고, 셋째가 인감과 통장으로 9%라고 했습니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오겠다는 이유는 ‘통화할 수 있어서’, ‘불빛으로 밖으로 나올 수 있어서’라고 대합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나님과 통화하는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과 언제나 통하는 길입니다. 
  
가일스 플레처는 그리스도는 ‘길 잃은 자에게 그 분은 길입니다, 헐벗은 자에게 옷입니다. 굶주린 자에게 음식입니다. 묶인 자에게 자유입니다. 약한 자에게 강함입니다. 죽은 자에게 삶입니다. 병든 자에게 강건입니다. 눈먼 자에게 광명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부요입니다. 다시는 잃지 않는 즐거움입니다. 도둑맞지 않는 보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탄은 모든 인류에게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당했든지 예수님은 해결자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 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나의 인도자가 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찬양하며 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기쁜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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