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탄절]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 19:1~10)

  • 잡초 잡초
  • 410
  • 0

첨부 1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 19:1~10)


성탄주일이 되었습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오신 날입니다. 성탄절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다> 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공동체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정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인생 안으로 들어가시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결혼의 꿈에 부풀어 있던 나사렛의 한 처녀 마리아에게 들어오셨습니다. 어느 날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이 마리아의 인생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신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아들이란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분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후로 평생 그녀의 인생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이란 젊은이의 인생에도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마리아를 데려 오라.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했다.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임이니라>고 하시는 순간, 요셉의 인생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아버지로서 예수님을 양육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을 죄에서 구원할 구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탄 사건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 후로 예수님은 무수한 사람들의 인생에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에만 사람들에게로 들어오신 게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물고자 하십니다.

상대방이 들어오고자 할 때, 안에 있는 사람의 마땅한 태도는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지키는 방법은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들어와 머물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기꺼이 자신의 인생에 받아 모셨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는 순간 그는 예수님께 인생의 문을 연 것입니다. 

요셉은 잉태하여 이미 배가 부른 마리아를 기꺼이 아내로 영접하여 집으로 데려오는 그 순간 예수님께 문을 연 것이고, 평생 예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2009년도 성탄 주일을 맞이한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가짐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우리 인생에 모셔야 합니다.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영원히 머물도록 우리 방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멋진 성탄절을 맞이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여리고 성의 삭개오입니다. 삭개오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그는 여리고 성의 모든 세리들 중에 가장 높은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물론 그 재산은 정당하게 모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리의 지위를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여 그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몹시 고단하고 피곤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수전노로 여겼습니다. 민족의 피를 빨아 로마 제국에 바치는 매국노로 여겼습니다. 

그런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삭개오야, 네 집 대문을 열라, 네 방문을 내어 다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삼십 삼 년 전에도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집을 좀 내 놓아라. 방 좀 내 놓으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마리아의 몸 안에 계셨던 예수님은 베들레헴 마을의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방을 내 달라, 들어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분을 대신하여 대문을 두드린 사람은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만삭이 되어 이제 막 예수님을 출산하려고 하는 마리아를 부축한 채 베들레헴의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방을 열어 영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관도 만원이요, 집집마다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할 수 없이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탄생하셨고, 세상에서의 첫 날을 마구간에서 맞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로부터 약 삼십 삼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여리고의 키 작은 한 남자 삭개오가 기꺼이 자신의 방을 예수님께 내드렸습니다. 아니 방만 내드린 게 아니라, 자신의 집을 통째로 내드렸습니다. 그것도 마지못해서 한 것이 아니라, 즐거워하며 영접했습니다. 이 일로 삭개오는 아무도 방을 내 주지 않아서 세상에서의 첫 밤을 마구간에서 맞으셨던 예수님의 섭섭한 마음을 위로한 셈입니다. 이로써 삭개오는 뒤늦은 성탄 축하 인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집을 내어드린 순간, 예수님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 네 인생에 머물고자 한다. 날 영접하라>고 하십니다. 삭개오는 올라가 있던 나무 위에서 속히 내려왔습니다. 여러분도 어서 속히 내려오십시오. 만사를 제쳐놓고 내려와 예수님을 여러분의 인생에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인생의 방안에서 사랑의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을 지키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우리의 인생에 들어오려고 하십니까? 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려고 하셨습니까? 

그 대답은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서 하신 말씀에 너무도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려고 하신 이유는 삭개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받으려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리가 아닙니다. 세리는 세금을 징수하려고, 돈을 받아내려고 사람들의 집에 들어갑니다. 세리인 삭개오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사람들의 집에 도착하면 집주인들은 원망스런 눈길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세리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주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대접을 받으려고 그의 집에 들어가신 게 아닙니다. 주려고 오시는 분입니다. 삭개오는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받고 싶은 게 많았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찾아오는 손님이 필요했습니다. 함께 머물러줄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평생을 함께 할 가족 같은 분이 필요했습니다. 위로,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징수하려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 주려고 오시는 분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랬기에 기쁨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느니라>, <내가 네게 구원을 준다. 사랑을 준다. 넌 내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구원을 주려고 오십니다. 사랑을 주려고 오십니다. 위로를 주려고 오십니다. 축복을 주려고 오십니다. <방을 내 놓으라>는 명령 속에는 <구원을 주려는 사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요구에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명령 속에는 은총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요구로 알고, 명령으로 아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실수록 행복해 집니다. 예수님께 방을 내어 드리십시오. 결코 손해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쁨으로, 더 빨리 모실수록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도 오시려나?> 이런 생각일랑 버리십시오. 세리는 당시 유대에서 가장 천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께서 먼저 삭개오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습니다. 삭개오가 먼저 예수님께 손을 내밀고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주신다고 해도 대단한 일인데, 오히려 예수님은 먼저 <네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잘것없다고 천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돈을 잘 벌지 못해 가난한 사람, 배울 기회가 없어 아는 게 많지 않은 사람, 줄을 잘못 서서 출세하지 못한 사람, 넓은 가슴을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해 고독해 하는 사람들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125년 전에 조선 사람에게도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오셨습니다. 

2009년 한 해 동안에 사랑하는 가족을 천국으로 먼저 떠나보내 슬퍼하는 교우님들, 어렵게 준비했던 일에서 실패하여 괴로워하는 교우님들, 재산을 까먹어 염려하는 교우님들, 취직과 입시의 높은 장벽 앞에서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젊은이들, 어려운 질병의 진단을 받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교우님들,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불화 중에 눈물 흘리는 남편과 아내들, 잘 해 보려고 하지만 부모님과의 관계를 잘 못해 힘들어하는 자녀들, 좋은 아버지 어머니가 못된 것 같아 마음 아파하는 부모님들에게 오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대문을 여십시오. 안방 문을 여십시오. 인생 문을 여십시오. 기쁨으로 여십시오. 베들레헴 주민들처럼 하지말고, 그 분을 추운 대문 밖에 방치하지 말고 문을 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사연을 나누십시오. 

그리고 그 분이 여러분을 버리고 떠날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고 떠나실 분이 아닙니다. 엊그제 금요일 새벽에 집회 강사로 오실 정태기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41세 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몹시 고운 분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닮아 그녀도 고왔습니다.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늘 남편에게 차갑게 했습니다. 조금만 의견 대립이 있으면 <갈라서자>고 말하곤 했습니다. 남편을 정말 힘들게 했습니다. 그녀는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녀와 사귀어 보려고 많은 청년들이 접근했습니다. 친구가 되려고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아이 둘을 낳고 사는 남편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갈라서자>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알고 보니 그녀에게는 버림받은 쓰라린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찍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여덟 살 되던 해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와 두 어린 동생을 남겨둔 채로 다른 곳에 시집을 갔습니다. 그녀는 어린 동생들과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엄마가 곱게 화장을 하고 집을 떠나던 날 그녀는 엄마 치마에 매달려 울고 울었습니다. <엄마 가지 마! 엄마, 제발 우리 버리고 가지 마!> 그러나 엄마는 가 버렸습니다. 그 후 중학생이 될 때까지 엄마가 몇 차례 학교로 찾아왔지만, 만나지 않았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다 버리고 떠날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정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버림받은 상처가 이렇게 컸습니다. 그러나 염려 마십시오.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 번 우리 인생에 들어오시면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이 여인이 정 목사님께서 운영하는 치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면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교회집사였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진정으로 자신의 삶에 모신 그 순간, 그녀 속에 깊이 배어 있던 쓴 뿌리가 뽑혀졌습니다. 그 동안의 잘못을 빌면서 남편 앞에 무릎꿇고 목놓아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과 한 번 연결된 사람들은 영원히 그 분과 함께 살아갑니다. 예수님 안에서 상처의 치유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상처받은 사람, 사람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일수록 다른 것으로 보상받고자 합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아픔을 돈으로 보상을 받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세리라고 조롱할수록 그는 돈을 끌어안고 위로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힘들고 가난한 사람을 보아도 한 푼의 돈도 내놓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돈이 그에게 아내요, 자식이요,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집에 들어오셔서 함께 계셔 주시는 예수님을 통해 위로를 받은 후, 그는 변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나도 사랑 받고 있다>는 그 느낌은 그로 하여금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드디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요구하지도 않았는데도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건 삭개오가 정말 오랜만에 해 보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란 쥐어짜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을 통해 감동 받은 사람의 마음에서만 우러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말은 우러난 말이었습니다. 그 순간 삭개오의 얼굴은 사랑을 아는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광채가 나게 되었습니다.

삼십 삼 년 전 어느 날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도 귀한 것을 드린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 마구간까지 찾아와서 탄생하신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가장 고귀한 것을 바쳤습니다. 그 후 삼십 삼 년이 경과했을 때 여리고의 삭개오가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예수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 삭개오는 네 번째 동방박사가 되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그 분께 여러분의 소중한 것들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교우님들도 네 번째 동방박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9장을 읽으면서 삭개오를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을 가지십니까? 우리는 삭개오를 접할 때 조금도 혐오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당시 여리고 사람들이 세리인 삭개오를 보면서 느꼈을 그 경멸하는 느낌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삭개오는 매우 친근하고 가까운 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그가 악명 높은 세리로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빛나는 존재로 바뀌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인생에 들어오시면 그 누구의 인생이나 빛이 나는 법입니다.

성탄절 트리의 유래를 아십니까?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이렇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어느 성탄절 전날 숲 속을 산책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바라보니 하얀 눈으로 덮인 전나무가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눈에 눌려 있는 전나무, 어둠 속에 서 있는 전나무였지만, 달빛을 받을 때 찬란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루터는 우리도 예수님의 빛을 받을 때 비로소 찬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루터는 이 진리를 가족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전나무 하나를 베어 방에 들여놓고 그 가지에 촛불을 달고 예수의 탄생일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그 빛으로 빛나는 인생이 아름답다면, 삭개오의 인생이 그러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금번 성탄절에 예수님을 인생의 중심에 영접하십시오. 예수님으로 인하여 빛나는 인생이 되십시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