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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성탄 - 신비한 이야기 (눅 1:39~45,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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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 신비한 이야기 (눅 1:39~45, 56)


성탄은 신비한 이야기이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시기 위해서 마리아의 몸을 빌리셨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을 빌려 사람으로 오실 때 천사가 이렇게 알려주었다. 눅1: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참으로 신비한 이야기다. 사전을 보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인식이 되지 않는 영묘한 일이 신비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신비를 믿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는 것을 선포하는 천사의 메시지 앞에서 마리아는 모든 사건을 수용하였다. 예수가 자기 몸에 잉태되고 출산된다는 신비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리아는 빨리 일어나 친족 엘리사벳의 집으로 갔다. 사가랴 제사장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축복하였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소리로 복을 선언하였다. 말씀으로 잉태된 소식을 들은 엘리사벳이 어떻게 이를 믿고 자기 집으로 달려온 마리아를 대면하자마자 복 중에 있는 아이를 축복할 수 있는가? 

성탄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출생까지가 다 신비다. 육을 가지고 육적으로 판단하려는 이들에겐 신비가 아니고 거짓말 같은 이야기이다. 인간이 쌓아올린 과학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겐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 신비스러운 성탄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이야기이기에 신나는 신비다. 과학의 시대라고 안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탄의 사건이 더욱 신비스러운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이 믿음을 더해준다. 
  

첫째 신비, 세례 요한이 예수를 보고 기뻐하고 뛰놀았다. (눅1:41)

눅1: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복중에 뛰는 아이는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크고 있는 6개월된 세례 요한이다.(눅1:36) 6개월된 세례 요한이 뛰놀았다는 말이다. 눅1:44을 보면 마리아의 문안하는 소리가 엘리사벳의 귀에 들릴 때 아이가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다고 하였으니 6개월된 요한이 예수님으로 인해 춤을 춘 것이다.

태아가 뜀을 뛰며 복중에서 논다. 이것은 임신부가 다 겪는 일이다. 하지만 복중에서 세례 요한이 이제 잉태된 아기 예수를 향해 기뻐한다는 것은 신비다. 남자를 모르는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게 된 기적 이상의 신비다. 예수가 이 땅에 빛으로 왔어도 영접하지 않고 환영하지도 않았는데 세례 요한 만큼은 환영한다. 6개월된 아기 요한 만큼은 예수에 대해 춤을 춘다. 이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인 동시에 아기 요한과 아기 예수의 첫 만남이기도 하다. 

성탄을 둘러싼 신비한 이야기는 장차 나타날 요한과 예수님의 장래 사역의 상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미 모태에서부터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 예수님의 신들매도 감당치 못하는 광야의 소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태 중에 막 자리 잡은 태아, 현대 과학으로도 진단하기 어렵다. 일주일도 안된, 하루 밖에 안된 임신부의 태아를 어떻게 알아낸다는 말인가? 하지만 성령 충만함을 입은 아기 요한은 6개월된 아기가 예수를 알아보았다. 예수님 때문에 기뻐 뛰었다.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믿음이 생긴다. 이 신비함이 내게 믿음의 걸림돌이 아니라 더 큰 믿음을 주는 도약대와도 같다. 

  
둘째 신비,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향해 축복의 말을 한다. (눅1:43)

눅1: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이 본문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거룩하신 처녀 마리아, 그저 가난하고 가장 평범한 사람에게 지어주는 영희, 영자, 순자와 같은 정도의 이름을 지니고 사는 마리아, 그 마리아가 내 주의 어머니가 되어 있다. 엘리사벳의 눈과 입이 놀랍다. 엘리사벳이 어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엘리사벳의 제사장의 아내다. 마리아는 목수 요셉과 정혼한 미혼의 여인이다. 그런데 미혼의 여인이 아기를 잉태했는데 율법으로 정죄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설수에 오를 여인을 내 주의 모친이라 하였다. 엘리사벳은 성경의 예언, 천사가 알려준 예언, 주님이 오시면 이루실 나라,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여인처럼 선포한다. 

내 주의 어머니! 이 말은 태아로 잉태된 아기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말이다. 어떤 주님이신가? 눅1:32~33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왕위를 이어 받으신 주님! 선택 받은 야곱의 집을 다스리실 주님! 그 분은 큰 주님이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아들이라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님이시다. 엘리사벳이 이제 잉태된 아기 예수를 그렇게 믿고 고백하고 마리아가 주의 모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축복한다. 서슴없이 축복의 말을 한다. 이것이 신비다. 

엘리사벳의 축복은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작은 음성이 아니었다. 큰소리로 자신감이 넘쳐서 본인 스스로도 감격해서 외치는 축복이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이 축복의 외침은 엘리사벳의 성령 충만한 믿음을 보여준다. 그 믿음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성령의 지배 아래 머무는 엘리사벳은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거부하지 않으며 잉태되어 찾아오게 된 마리아의 모든 것을 축복의 말로 되돌려 주었다. “너는 복 있는 여자다.” 마리아를 평안하게, 마리아를 감사하게 해 주었다. 세상 그 누구가 마리아의 임신됨을 공격한다 하더라도 마리아가 가장 복 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성탄의 이야기는 이런 두 사람의 신비스러운 관계로 인해 더욱 믿어진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하는 성령의 사건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신비스러운 것이 좋고 믿음이 밀고 들어온다. 믿지 못할 이야기가 아니다.

  
셋째 신비, 두 임신부가 석 달 동안을 함께 지냈다. (눅1:56)

마리아는 기쁨이 충만하였다. 세상은 마리아에 대해 온갖 스캔들이 될 만한 이야기를 던질 수 있지만 오해, 헛소문, 비난, 정죄 당함 등은 받을 수 있지만 마리아는 감격의 시간을 지냈다. 눅1:46~55까지 기록된 마리아의 찬가를 보면 글자 그대로 기쁨 충만이다. 그런데 눅1:56을 보면 그 기쁨에 넘치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석 달인가? 엘리사벳이 아기를 임신한 지 6개월째이니까 석 달을 머물었다는 것은 산 달이 될 때까지 같은 지붕 아래 머물렀다는 말이다. 마리아는 6개월 늦게 아기 예수를 잉태했지만 아이가 몸 안에서 잘 자라고 안정을 취할 수 있을 때까지 엘리사벳과 동거하였다. 마리아는 눅1:35을 보면 성령의 능력이 임한 여인이다. 

엘리사벳도 눅1:41을 보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여인이다. 성령 충만한 두 여인이 함께 거한다. 기적적으로 불가능의 벽을 넘어 임신을 하게 된 두 여인이 함께 거한다. 아기 예수를 안내하는 세례 요한과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게 되는 예수라는 관계가 운명적으로 주어진 두 여인이 함께 거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앞에서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만남은 기쁨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기쁨이었다. 그들의 함께 거하는 생활은 기쁨이었다. 그러나 기쁨으로 석 달을 지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에 쓰임 받는 두 사람의 동거는 신비 중의 신비다. 

날마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나누었을까? 추측한다면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손길과 구원의 역사는 서로에게 눈물이 되고 격려가 되고 아이들에게 축복이 되는 삶의 향연의 자리였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추측일 뿐이다. 사실 함께 거했다는 것 외의 다른 말씀은 없다. 90일의 거함, 그것은 침묵으로 닫혀 있다. 그것이 신비다. 세례 요한의 출생을 눈 앞에 두고서야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간 마리아! 그는 무한한 안식과 힘, 용기 등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신령한 양식으로 노래하며 돌아갔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믿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는 감정과 신앙이 교류하는 빛이 필요한 것이다. 임신부에게 석 달을 함께 지낸 이 이야기의 신비는 믿음을 더해 준다. 최고의 태교, 영적인 기름부음이 흘러가는 태교, 상호 성령에 지배받는 여인으로서 서로를 복 되게 하는 이 90일의 시간들. 세례 요한은 세례 요한답게, 예수는 예수답게 태어나는 환경을 하나님이 조성하신 것이다. 90일의 신비스러운 시간들! 그래서 하나님의 이끄심, 하나님의 만드심, 하나님의 행동하심, 하나님의 성육신은 신비하고 묵상할수록 신비하다. 이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손길에 붙잡혀 믿음을 가지고 복된 성탄을 받아들이자. 하늘에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의 평화라고 외치자. 

신비한 성탄의 이야기. 그래서 믿음이 생겨난다. 신비하여 내 이성으로는 인식되지 못하지만 그 신비가 내 믿음의 땔감이 되어 열정의 믿음으로 서게 한다. 나를 보니 내 안에 예수가 계신다. 예수님이 머물고 계신다. 그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수없이 말하고 싶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바로 당신을 위한 탄생이라고 외치고 싶다. 예수님을 모신 내가 얼마나 복된지 얼마나 기쁜지 그 삶을 외치고 싶다. 나 같은 사람이 예수를 모신 목사가 된 것, 이것이 기적이다. 기적 같은 신비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다. 그 신비가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 

성탄에 오신 예수를 믿고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고 만입으로 주님을 선포하며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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