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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성탄의 조연(2)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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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조연(2) (눅 2:1~7)


해마다 연말이 되면 방송사의 연말시상식이 거행됩니다.  저도 시간이 되면 보면서 수상소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연예인 중에 크리스천이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겠지만 먼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말을 들을 때면 왠지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시상식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신앙을 각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에 어떤 수상자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성경을 정확히 인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낮추기도 하
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하나님,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고 고백한 것
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도 어떤 수상자가 어떤 말로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는지 기대가 됩니다.  특히 빛나는 조연들의 아름다운 수상소감을 기대해 봅니다.

인류의 역사와 성경의 이야기에서 성탄보다 큰 사건이 없습니다.  성탄을 마치 한편의 영화로 생각한
다면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성탄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당연히 아기예수이
십니다.  그 예수님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기위한 빛나는 조연들의 믿음과 삶의 모습이 귀하게 전개되
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마리아와 요셉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 성탄의 조연으로서 마리아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요셉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탄의 역사에서 요셉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그는 어떤 믿음, 어떤 삶으로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빛냈을까요?  마리아와 같이 성탄을 위해 그에게서 돋보이는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소속입니다. 

본문은 성탄의 배경을 설명하는 누가복음 1장에 이어 본격적인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말씀입
니다.  로마황제의 칙령으로 시작하는 말씀에서 우선적으로 주목할 말씀은 바로 3절입니다.  여기에 요
셉을 소개하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짤막하게 알려줍니다.  그는 다윗의 집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
니다.  그가 사는 곳은 북쪽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였지만, 그는 다윗가문에 속한 유력한 자손이어서 
호적을 위해 그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내려가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기에서 먼저 주목할 것이 바로 그의 소속입니다.  그의 정체성과 그가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그는 다윗의 가문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기 다윗의 족속이란 다윗의 후손을 가리킵니다.  다윗의 후손은 왕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은 메시야의 가문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꿈에도 그리는 메시아가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가문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사람이 바로 요셉인 것입니다.  당시 비록 요셉은 나사렛이란 가난하고 못사는 동네에서 목수 일을 하며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지만, 그는 분명 왕족에 속한 다윗의 후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강력
한 유다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인중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요셉은 평생 이것을 잊지 않았습
니다.  그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살았습니다.  이런 분명한 소속감과 정체성이 그의 믿음과 삶을 형성
한 것입니다.  성탄의 빛나는 조연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소속을 알고, 깨닫는 것보다 귀한 일이 없습니다.  인간 삶의 모든 것은 소속감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
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나 한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입니다.  
김씨, 이씨, 박씨의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누구누구의 아들과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우리
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보니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속입니다.  한평생 변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에게 가장 강력하게 심어주려는 것이 바로 소속감입니다.  이
스라엘이 처음 가나안에 살 때부터, 그들이 애급에서 종살이하며 힘들게 살 때에도, 또한 극적으로 애급
을 탈출하여 광야를 지난 다시 가나안에 들어와 역사를 만들어 갈 때에도, 매순간마다 하나님이 백성에
게 가르치는 핵심적인 진리는 오직 하나 소속감이요, 정체성이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과 명령과 약
속은 모두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누구이고, 나는 어떤 존재이고, 나는 어디에 속한, 어디 사람인가를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소속감을 분명히 할 때 그들은 번영과 성공과 승리와 영예의 날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소속감을 잃어버리고, 정체성이 밑바닥으로 떨어져 헤맬 때 그들은 치욕과 실패와 고통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오직 소속감에 대한 차이 때문에 영욕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소속을 신앙과 삶의 모토로 삼습니다.  바로 그 소속감이 수천 년 역사동안 유리하고 방황해도 그들 민족이 명맥을 유지하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우리 믿는 자는 분명한 소속감과 정체성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빛나는 조연, 인생
의 주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
려워하지 말라...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
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
하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소속감에 대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주님을 만난 뒤 나는 결코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에 아니라 하
늘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거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자, 진정한 의미의 대강절을 지키고 보내며 사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의 소속을 분명히 하십시오.  나의 정체성을 한순간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그래서 
성탄의 역사에 주님을 높이는 조연들이 되시고, 인생역사에 성공하고 승리하는 주연들이 되시기 바랍니
다. 

둘째는 행동입니다. 

성탄의 조연역할에 있어서 마리아와 요셉의 큰 차이는 요셉은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요셉이 말한 흔적이 없습니다.  그가 벙어리가 아닐진대 그는 말이 없습니다.  영화
로 표현한다면 그는 대사가 없고 액션만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마리아는 많은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말이 없다는 것은 말 대신 행동으로 그의 신앙과 삶을 보여주었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요셉은 
행동하는 자입니다.

성탄의 역사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행동은 크게 3가지로 나눕니다.  우선 자기신앙의 양심을 따라 행동
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는 뜻
입니다.  그는 자기믿음과 신앙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 믿음으로 마리아의 수태사실을 알고 가만히 끊
고자 합니다.  그가 만약 입을 벌려 이 사실을 여러 사람에게 알렸다면 마리아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
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입을 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약혼자
라 할지라도 남의 말, 남의 상황, 심지어는 남의 허물처럼 보이는 것을 쉽게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이것
이 요셉의 뛰어난 행동입니다. 

또한 그는 천사의 지시대로 행동합니다.  마태복음에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요셉이 마리아의 수태사
실을 알고 조용히 넘어가려고 할 때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알
립니다.  자기와 가정을 통해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받아드린 요셉은 말씀을 소중하게 받고 천사의 지
시대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
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그는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내를 데려왔으나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천사
의 분부대로 아들을 낳자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당시 황제의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칙령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최초의 황제입니다.   그의 
위세와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그가 통치하는 모든 나라에 호적을 명령합니다.   식민지가 된 것도 서러
운데, 황제의 지시를 따라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아마 황제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개인과 나라
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강제로 집행하기 위해 황제는 공권력을 동원했을 것입니다.  

매우 어수선하고 복잡한 상황입니다.  이때 요셉은 아주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는 말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본문은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요셉이 움직입니다.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갑니다.  
호적 하러 베들레헴으로 올라갑니다. 

그의 이런 행동이 매우 소중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 성경의 예언과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메시아를 향한 하나님의 예언이 무엇입니까?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고, 베
들레헴에서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여느 사람처럼 황제를 
욕하고 거부했다면, 아무리 공권력을 동원해도 요리저리 피해 다니며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았다면, 자기
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나사렛에 안주했다면, 메시아의 탄생은 빗나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요셉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큰일을 이룬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말이 아니라 오직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자기신앙을 따라 행동하고, 천사의 분부대로, 황제의 명령대로 움직이고 행동합니다.  이것이 빛나는 조연의 귀한 모습으로 전합니다.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동작이나 행동을 뜻하는 말로 널리 사용
됩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의 이 말은 좋은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이 말에 감시라는 말을 덧붙이면 
아주 기분 나쁘게 기억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원래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중국 당나라의 ‘한유(韓愈)’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과거시험에 낙방한 뒤 시험관에게 편지를 보
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힘이 있는 그대가 나를 궁한 처지에서 옮겨주는 것은 손이나 
발을 잠깐 움직이는 것과 같은 손쉬운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其窮而運轉之蓋一擧手一投足之勞也).’  바로 여기에서 이 말이 나왔습니다.  이 말은 ‘손을 한 번 들어 올리고 발을 한 번 옮기는 일’입니다.   ‘약간
의 수고로도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일’  또는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바로 일거수일투족입니다.  손을 한번 들어 올리고, 발을 한번 
옮기는 것입니다.  굉장히 쉬워 보이는데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한번 손을 들어 악수하고, 만지고, 다
듬고, 껴안으면 되는데, 한번 발을 옮겨 찾아가고, 전하고, 봉사하면 되는데, 이렇게 쉬운 것이 이렇게 어
려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말도 중요하지만, 행동이 필요합니다.  요셉처럼 자기신앙의 양심을 따
라,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그리고 황제의 명령, 즉 내가 속한 현장에서 권위 있는 것의 바른 지시에 따
라 움직이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동행입니다. 

성탄의 위대한 사건에서 요셉에 빛나는 조연상을 받을 수 있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소속감과 정체성을 갖고, 말없이 행동하고 움직였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그는 혼
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함께 이루었습니다.  마리아를 만나기전에는 혼자였지만 정혼한 이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천사의 이야기를 듣고 행동하는 것을 함께 했습니다.  황제의 분부에 따라 호적
하러 고향으로 가는 것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했습니다.  

당시 마리아는 배가 만삭이 되어 움직이기가 매우 힘든 상황입니다.  융통성을 가졌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두고 혼자 갈수 있었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여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로 여행길에서 아이를 낳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혼자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움직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탄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요셉의 믿음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만약 혼자 움직였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성탄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논쟁이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문에서 중요하게 볼 말씀이 5절입니다.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여기 ‘함께’라는 말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성탄의 역사는 바로 이 함께하는 것에서, 동행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베들레헴으로 올라갈 때에는 마리아와 함께 갔지만, 베들레헴에서부터는 주님과 함께 갑니다.  
아기예수님과 함께 그는 움직입니다.  평생 예수님과 더불어 갑니다.  할례를 받기 위해 성전에 올라갈 
때에도 주님과 함께,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급으로 피난할 때에도 주님과 함께 갑니다.  애급에서 나사
렛으로 올 때에도 주님과 함께 했고, 짧은 생을 마칠 때까지 그는 주님과 동고동락하며 살다가 하늘나
라로 올라갑니다.  요셉의 생애는 이처럼 동행하는 삶입니다.  마리아와 함께, 그리고 주님과 함께입니
다.  사람과 함께, 예수님과 함께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요, 신앙의 길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태어나시기 전부터 붙여졌습니다.  주님의 중요한 이름 2개가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
입니다.  그 이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 이름 그대로 주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
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트리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앞으로,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 이름은 바로 구원자입니다.  다른 하나의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라는 뜻을 갖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동행하기 위해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 그분은 임마누엘, 나의 동행자이십니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나를 버리지 않고, 붙잡고 계십니다.  설령 내가 주
님을 멀리하고, 주님을 잊어버리고, 주님을 버린다고 해도 주님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세상친구
들 나를 버리고, 나를 떠나고,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해도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찬송의 
가사가 있습니다.  ‘이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친구, 날버리잖
네, 온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않네/ 괴로운 일 당해도, 낙심말아라, 영원하신 주능력, 나를 붙드네, 예
수 내친구, 날버리지 않네, 온천지는 변해도 날버리지 않네’

여러분, 주님은 나와 함께 가십니다.  임마누엘로 동행하십니다.  주님은 고달프고 힘든 인생길에 나를 
친구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때론 뒤에서 밀어주시고, 때론 앞에서 끌어주시며, 때론 지치고 힘든 나를 
업고 가십니다.  영원히 나와 동행하십니다.  이제 다시 힘을 내십시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 믿음 안에서 큰 위로 받으십시오.  그리고 이제 나는 주님의 사람이라는 분명한 소속감을 갖고, 이제 
일거수일투족, 한번 손을 들고, 한번 발을 옮기면서, 날마다 승리하며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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