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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님 (눅 2: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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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님 (눅 2:15~20) 
 
  
❚개신교의 강점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유행하는 말 중에 하나가 “종교편향”이라는 말입니다. 왜 자꾸 언론에서, 또 불교나 다른 종교계에서 툭하면 “종교편향”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일까요? 그야 당연히 현직 대통령이 개신교 장로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대통령이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해 언급하거나 조금만 우호적으로 나오면 어김없이 종교편향이니 뭐니 하며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대통령은 자기 종교를 가질 자유가 없습니까? 독실한 크리스천인 미국 대통령이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종교편향이 아니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예배에 참석하면 종교편향입니까? 

과거 불교를 믿는 대통령이 청와대에 불상을 세우고 개인적으로 절을 짓고 불교를 도와줄 때 그 누가 “종교편향”이라는 말을 썼다는 말입니까? 심지어 그들이 불교에 지독하게 ‘편향’되어 일방적으로 도울 때도 우리 개신교는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전직 대통령이 절에 들어가 칩거할 때도 “왜 교회에 안 가고 절에 들어가느냐”는 말 안 했습니다. 대통령도 그 누구도 얼마든지 종교의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나 지도층의 신앙적인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에 트집을 잡고 툭하면 “종교편향”을 부르짖습니다.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마치 이 나라의 개신교 전체가 심각한 종교편향에 빠져 기독교 패권주의를 부르짖는 이상한 집단인 것처럼 매도당한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것은 아마 다른 종교뿐 아니라 언론의 영향이 클 것입니다. 

교회가 조금만 어떤 주장을 하면 금세 “종교편향”이라는 말이 쏟아져 나옵니다. 인터넷은 온통 “개독교(기독교를 폄하하는 말)”니 “먹사(목사를 폄하하는 말)”니 하는 반 기독교적인 글로 도배가 됩니다. 물론 우리 개신교가 조금도 문제가 없거나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실수나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너무 일방적으로 공격당하고 매도당하는 것 같아 어떨 때는 정말 억울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특히 요즈음 언론을 보면 이만저만 분통 터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완전히 밥입니다. 조금만 실수가 드러나면 얼마나 집중적으로 두들겨 패는지 몰라요. 반면 타종교의 부끄러운 부분은 상대적으로 잘 덮어주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지금 “종교편향”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또 불교나 천주교가 하는 일은 마치 전부 다 거룩하고 훌륭한 일인 양 포장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타 종교에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든지 자선사업을 하면 정말 대단한 일로 선전을 합니다. 천주교의 음성나환자촌인 꽃동네나, 불교가 소년소녀 가장 돕기 등을 하면 얼마나 언론마다 크게 다루는지 몰라요. 물론 이런 좋은 일들을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 잘하는 일이요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좋은 일들을, 어려운 이웃을 돕고, 낮은 자들을 돌보는 일을 지금까지 개신교가 얼마나 많이 해왔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터넷에 올라온 어떤 글을 보니까 천주교가 하는 사회봉사가 100이라고 본다면 개신교가 하는 사회봉사는 3에서 5정도 밖에 안 된다고 쓰여 있습디다. 그 뒤에는 그대로 옮기면 “그나마 개신교 놈들은 순전히 교회 나오게 하고 전도 하려는 목적으로만 하니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여져 있습니다. 이게 과연 사실일까요?

저는 지금 이런 저런 숫자와 통계를 증거로 들먹이면서 우리가 더 잘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일이야말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정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면서 그렇게 조용히, 이름도 빛도 없이 해왔던 그 수많은 일들을, 그 수많은 사회봉사를 이렇게도 무시하는 처사가 너무 답답해서 부득이 숫자를 인용해 봅니다.

좀 오래 된 자료입니다만 보건복지부와 한국사회복지협회가 발표한 “2005년도 사회복지 자원봉사 통계연보”에 따르면 종교를 가진 자원봉사자 중 개신교인이 45.7%, 천주교가 26.8%, 불교 26.3%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교계가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 중에서 개신교가 60%, 가톨릭이 26%를 운영하는 데 비해 불교는 14%에 불과합니다. 특히 사립학교나 병원 등을 살펴보면 개신교는 타종교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절대적인 숫자입니다. 

이는 처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때 선교사들이 주로 학교나 병원 같은 사회봉사사업을 중점적으로 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자, 이렇게 개신교가 다른 종교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회봉사를 해왔는데 누가 이것을 부인하겠습니까? 누가 개신교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편파적인 종교라고 비난합니까? 누가 개신교는 종교편향적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어려운 사람, 힘든 사람, 낮은 사람, 소외된 사람을 돌보고 돕는 정신은 우리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요 최대의 강점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닮기 위해

그런데 이 모든 정신이, 즉 섬김과 봉사와 낮아짐의 정신은 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한 순간도 이 낮아짐과 섬김의 자세를 잊은 적이 없는 분입니다. 낮아짐과 섬김은 바로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요 예수님은 이러한 영적 습관을 통해 그야말로 봉사와 섬김을 몸소 실천한 최고의 모범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이렇게 열심히 사회봉사를 하고, 남들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열심히 섬기고 돌보고 낮아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이렇게 사신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이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셨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을 닮아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어떻게 전 생애를 통해 이 낮아짐과 섬김을 실천하셨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의 탄생, 그 태어나심 자체가 낮아짐이었습니다. 이제 점점 성탄절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이 바로 12월 25일 성탄절입니다. 그런데 이 성탄절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낮아지고 또 낮아져서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저 높은 하늘나라 보좌에 계셔야 할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낮아져 오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 가운데 신이 인간이 되어 땅으로 내려오시고 그뿐 아니라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죽기 위해 오시는 그런 종교가 또 있습니까? 

하나님의 귀한 외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베들레헴 말구유에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누가복음은 베들레헴 동네의 들판에서 밤을 새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이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천사들에게 들었다고 증언합니다. 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온 것처럼 바로 이 목자들이 갓 태어난 아기 예수께 찾아와 경배했노라고 말씀합니다. 목자가 누구입니까? 

당시 유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직업 중에서 목자라는 직업을 아주 천한 직업으로 여겼습니다. 또 목자들이 하는 일을 부정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식일이라고 해서 양을 안 돌볼 수 있습니까? 안식일에 규례대로 쉬지도 못하고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율법 규정들을 잘 지킬 수 없을 때가 많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천하고 죄악시까지 되던 직업인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가장 먼저 알려지고, 또 이 목자들이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을 처음 찾아뵙고 경배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파격적인 메시지인 것입니다. 

왕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힘깨나 쓰는 벼슬아치나 하다못해 당시 존경 받던 종교지도자인 제사장이나 레위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이런 사람도 아닌 바로 그 시대에 가장 낮고 천하게 여겨진 사람들, 무시당하고 천대 받던 목자들이 이런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잘 나가는 사람들, 성공하고 높은 자리 차지한 사람들, 잘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낮고 천한 사람들, 무시당하는 사람들,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오셨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은 시작부터가 벌써 낮아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낮아짐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이 바로 빌립보서 2장 5~8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에 계셔야 할 그 분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온 것부터 벌써 엄청난 낮아짐인데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더 낮아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절은 마냥 기뻐하고 축하할만한 행사만은 아니겠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 사람들이 기뻐하며 행복해 할 바로 그 때, 하늘에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만큼 낮아지기 위해, 섬기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저 하늘의 보좌에서 영광과 존귀를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그 분이 이 땅에 죽기 위해 오셨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사명 그 자체가 낮아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도대체 어떤 사명을 가지고 오신 것일까요? 다같이 누가복음 4장 18~19절을 찾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안식일에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 61장 1절 이하를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시는지, 도대체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실지 예언하고 있고 예수님은 바로 그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이런 표현들이 눈에 띕니다.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라는 표현 말입니다. 한 결 같이 뭔가 부족한 사람들, 약한 자, 소외된 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의 사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셔서 내가 이 땅에 가장 약한 자, 소외된 자, 고통 받는 자, 힘든 자들을 위해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왔다.” 여기서 ‘주의 은혜의 해’란 성경에 나오는 희년(禧年=Year of Jubilee)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희년’이란 오십 년째 되는 해를 뜻하며 매 50년째 되는 해마다 빚진 자들의 빚이 탕감되고 노예들이 해방되고 땅의 경작을 쉬게 하고 모든 거민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정하신 해방의 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이 희년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 소외된 자들, 가난한 자들과 고통 받는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인간으로 낮아지고, 십자가까지 낮아져서 이렇게 낮고 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 메시야를 믿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높은 자들, 힘 있는 자들을 더 위하고 그들에게 기대는 모습이 아니라 주님처럼 낮아져서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 소외된 자들, 가난한 자들과 고통 받는 자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참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삶, 그 자체가 낮아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늘 듣던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칭찬이 아니라 비난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입니다. 우리는 힘깨나 쓰는 사람을 아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나 누구 잘 알아, 그 사람하고 친구야” 얼마나 자랑하고 내세웁니까? 심지어 그 사람 실제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자랑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누가 못 사는 사람, 힘없는 사람과 친하다고 자랑합니까? 

더욱이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나 죄 짓고 욕먹는 사람과 친한 친구라고 내세우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기꺼이 죄인들과 친구라는 이 비난을 감수하신 것입니다. 왜요? 여기서 ‘죄인’(罪人)이란 살인이나 강도, 도적질을 한 죄인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죄인을 뜻합니다. 즉 당시에 세리나 창녀처럼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율법의 규례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앞서 목자도 그런 사람들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처음 태어나셨을 때 목자들이 경배한 것처럼 공생애를 사시면서도 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은 세리나 창기 같은 사람들과 제일 잘 어울리신 것입니다. 

또 당시 가장 천대 받고 사람 숫자에도 못 끼던 여인들과도 잘 어울리셨습니다. 그러니 복음서를 읽어보면 열두 제자들 중에도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르고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들 중에 유난히도 세리나 창기, 그리고 여인들이 많은 것입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왜 교회에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냐고요. 정말 그렇지요? 우리 교회도 이 자리에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많습니다. 그랬더니 이러더군요. “원래 예수님도 여자들과 더 친하게 지내셨기 때문”이라고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자라서 친하게 지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소외 받고 천대 받은 계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처음 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도 가장 소외되고 고통 받는 계층이 누군가 살펴보니 하층민들과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격적인 대접도 전혀 못 받을 뿐 아니라 교육의 기회도, 또 아플 때 의술의 혜택을 볼 기회도 거의 없었습니다. 여성들은 심지어 사람이라기보다 그냥 애 낳는 기계 정도로 취급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해 병원을 짓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려고 세운 학교들이 지금의 이화여대를 비롯한 여학교와 수많은 미션 여자학교들입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을 닮은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도 이렇게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정말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상관없이 이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못 배우고 힘든 사람들, 천대 받고 소외 받는 이들, 그들을 위해 그 누구도 해주지 못하는, 심지어 국가도 잘 못하는 일을 우리 교회가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면서 계속하여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낮아지셨습니다. 여성뿐 아니라 당시로는 사람 취급도 못 받아 제자들조차도 귀찮아하던 어린이들을 품에 안아 축복하시고,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전혀 없던 부자가 아니라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갔다고 말씀하시고, 자신은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밥도 못 잡수시고 잠도 못 주무시면서까지 병 든 자를 고치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을 닮기 위해 우리 한국 개신교의 전통 중 섬김과 봉사, 낮아짐과 사랑을 베푸는 일, 이런 일들을 통해 우리가 이 한국사회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비난을 받고 마치 천하에 몹쓸 사람들처럼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억울하지요. 하지만 억울해하기 이전에 우리는 다시금 겸손하게 낮아져야 합니다. 묵묵히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잘 해나가고, 앞으로 더 낮아지고 더 섬기면서 낮아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더 잘 닮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 한국교회의 신뢰가 회복되고 언젠가 반드시 인정받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섬겨야 합니다

이제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 성탄절에 우리가 가장 기억해야 할 것은 성탄절 선물도 성탄카드도 산타클로즈 할아버지도 아닙니다. 바로 성탄절은 낮아짐의 날이라는 사실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가장 화려하게 성탄장식을 하고 성탄 캐럴을 크게 트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 백화점이라는 사실이 참 묘합니다. 왜냐하면 상업적으로 성탄절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 성탄절이 최고 매상을 올리는 날, 구매욕과 소비심리를 최대한 끌어올려 소비자들의 주머니를 털고 그 돈을 쓰게 하는 날, 그래서 즐겁고 신나는 날로 자꾸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백화점을 지나가거나 산타클로즈가 등장하는 TV광고를 보노라면 왠지 가족이나 애들에게 비싸고 좋은 선물을 사주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성탄절에 선물을 주고받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성탄절 선물은 본디 예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작은 선물이라도 나누는 삶을 살라는 뜻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성탄절이 12월 25일, 거의 한 해가 다 끝나가는 시점이라는 데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내가 너무 바빠서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옆도 뒤도 못 돌아보고, 내 한 몸 먹고 살기도 바빠서 조금도 남을 돌아보거나 나누지 못했다면 이때만이라도, 이 12월 25일 성탄절만이라도 작고 조촐한 선물을 준비해 나누자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성탄절이 최고 매출을 올리는 소비의 날, 돈 펑펑 쓰고 흥청망청 먹고 놀고 마시는 날이 되고 말았는지요.

아마 오늘날 이 대한민국의 성탄절을 보시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마치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장사하는 강도의 소굴을 만든 것처럼(눅 19:46) 내 생일인 성탄절을 너희가 상업적인 날로 변질시켰구나. 내 생일은 그런 날이 아니다. 그날은 더 낮아지고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는 섬김의 날이다. 남들은 몰라도 너희 그리스도인들만은 이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성탄절이 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성탄절에는 선물을 사주고 카드를 보내며 흥청망청 놀며 보내는 것보다 조용히 돈을 아끼고 절약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더 그 본디 취지에 맞는 행동인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백화점이나 선물가게는 참 싫어하겠지만 말입니다. 여러분도 이번 성탄절에 물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겠지만 이렇게 해보기 바랍니다. 그동안 감사를 잊고 산 분들에게 작은 감사를 표현하고, 그동안 돌아보지 못했던 내 주변 어렵고 힘든 분들 위해 기도하고 나누는 성탄절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닮아가려면, 그래서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을 닮아가려면 우리 기독교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성도가 이렇게 낮아지고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지난 93회기 주제가 “섬겨야 합니다”였습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 교단은, 우리 교단에 속한 교회들은 더 낮아지고 이 세상과 이 땅을 섬기며 예수님을 닮아 가겠다는 의지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끝까지 낮아짐으로 이 세상을 섬긴다면 우리의 작은 노력이, 우리의 작은 사랑들이 모이고 모여 이 세상을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를 향해 손가락직하고 오해하던 분들이 “교회가 정말 다르다”고 인정하는 날이 오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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