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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빈방 있습니까?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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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 있습니까? (눅 2:1~7)


성탄절을 목전에 두고, 대림절 넷째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복음서 중, 예수님의 역사적 성탄소식을 증언하고 있는 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복음서뿐입니다. 그 중에서도 누가복음에서만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어떤 역사적․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탄생하게 되었는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2000년 전 예수님성탄하실 그 때의 역사적․정치적 상황이겠습니까? 그것이 오늘 우리의 상황이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2000년 전까지 굳이 갈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오늘 여기, 내 삶의 자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성탄하시는 자리라면, 나는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그 누구의 역할을 하는 자일까요? 분명, 그 사람들 중 하나 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2000년 전 유대 베들레헴 다윗 城에서 있었던 역사적․정치적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오늘 내 삶의 문제입니다. 우리 시대, 역사적․정치적 상황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늘의 문제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본문(눅 2, 1-7)은, 성탄절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세 가지 문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성탄하실 때의 역사적․정치적 배경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결코 아무 때나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갈 4, 4)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성탄의 역사적․정치적 배경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이야깁니다. 그 역사적․정치적 상황은 어떠했을까? 왜, 굳이 그런 역사적․정치적인 배경 속에서 예수님께서 오셔야만 하셨을까? 중요한 문제이지요.

누가의 증언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그 때(예수님 성탄의 때)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令을 내려 天下로 다 호적하라” 한 때입니다. 여기 매우 중요한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人物입니다. 로마제국의 황제입니다. ‘아구스도’라는 말은 본래 라틴말로, 황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명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굳이 ‘아구스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동기가 있지 않겠습니까?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입니다. 그런데 B.C. 27년부터 그는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구스도’라는 칭호를 부여받습니다. 그렇게 부여된 칭호의 의미는, 당신은 (공식적으로) 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 받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이름자체가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원로원에 의해서 이름이 개명된 사람입니다.

아시는 대로 로마의 원로원은, 로마제국을 통치하던 최고의 정치기관입니다. 입법, 사법, 행정을 두루 통할하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정치기관입니다. 元老院 의원들은 종신직입니다.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사람들입니다. 요즘 같은 민주시대에는, 종신직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대의직이지요, 임기직입니다. 권력이 제한되어 있다, 그런 이야기지요. 원로원으로부터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 주후 14년까지 다스립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 로마제국을 직접통치 하던 황제입니다.

탁월한 통치력을 발휘했던 황제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수많은 정복국가들을 거느리던 때이지요. 로마령 국가들에 대해서, 강온정책을 구사했습니다. 부분적인 지방 자치도 허용했습니다. 점령지의 문화, 종교, 생활 풍습을 인정해 주기도 했습니다. 로마법과 크게 상충되지만 않으면, 그 나라의 법률까지도 인정해 주었습니다. 예술, 문화, 건축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비로운 정치가라는 평판까지도 받습니다. 로마의 대부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권력의 중심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로마제국의 황제’라는 막강한 힘과 권력으로, 로마뿐만 아니라 점령지국가들의 모든 종교까지 아우르는 宗敎首長의 자리, 자칭 大祭司長의 자리에 오릅니다. 점령지 국가들의 종교도 인정해주는 척 했지만, 內幕을 뜯어보면 감추어진 정복욕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신으로 숭배 받고자 하는 이글거리는 욕망이 불타던 황제였습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유일신 야웨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유대종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神이고, 하나님보다 더 숭배 받아야 할, 황제라는 겁니다(황제숭배사상).

그는 특히, 자기 外曾祖父 ‘율리우스 시이저’를 노골적으로 신격화했습니다. 기념신당을 건립합니다. 신으로 섬기게 합니다. 外曾祖父를 신격화하고, 기념신당 짓고, 신으로 섬기게 한 그가, 자기 자신을 神으로 받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감추어진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하지요. 

한창, 자신의 종교적 위상을 높이자, 점령지 국가들에서 자연적으로 종교, 신앙적인 갈등과 충돌이 왜 안 일어났겠습니까? 타협하는 직업종교인들에게야, 무슨 문제였겠습니까? 그러나, 순수한 자기신앙을 지키려던 사람들로부터는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됩니다. 유대 역사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종교의 宗敎首長들, 대제사장들(특히, 사두개파)은, 전형적인 현실타협적인 정치종교인들입니다. 친 로마적인 인사들이었던 거지요.

점령지 국가들의 반란과 저항 운동이 일어나자, 가이사 아구스도가 쓴 정책이 무엇입니까? 全, 로마령 국가들에게 다 호적하라 命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인구조사를 명한 겁니다. 인구조사에는, 인적사항 뿐만 아니라, 직업, 재산, 친인척 관계까지 다 조사합니다. 조사 목적은, 세금징수에 있지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이 통치하는 데 쓰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경제권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북한의 김정일이가, 최근에 화폐개혁을 단행한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굶겨죽이면서도 계획경제를 유지하겠다는 겁니다. 인민들을, 자기 손 안에 넣고, 좌지우지하겠다는 어리석은 獨裁妄想에 불과합니다. 

구소련이 무너진 후, 러시아에 갔을 때 놀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70년 동안 共産主義 이론으로 사회주의경제정책을 폈던 구소련이 국민들을 장악하던 수단이, 통제였습니다(다리로 통제했습니다. 광장문화 없습니다. 러시아의 겨울, 얼마나 춥습니까? 건물 벽 두께가 보통, 1m 그 이상 됩니다. 그런데 난방, 온수, 모두 중앙통제식입니다. 수 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파이프라인으로 난방, 온수 공급합니다. 통제가 쉽기 때문이지요). 경제권을 장악하면, 사람들은 따라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그 정책을 폈던 겁니다. 그 정책에 적극적으로 편승한 인물들이, 세리들입니다. 그러다보니 稅吏들은, 동족으로부터 가장 멸시천대 받는 사람들이 된 거지요. 이방인 취급받았습니다. 세리장 삭개오,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마태도 세관에 앉았던 세리출신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이사 아구스도가 자신이 신으로 숭배 받고, 경제권을 거머쥐어 점령지 국가들을 영구히 다스리고자 꾀하던 그의 권력의 정점에서, 누가 介入하신 것입니까? 온 세상의 주권자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같은 역사적․정치적 상황에 突入하신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보십시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언합니까?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政事(역사, 정치적인 일)를 메었고,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의 이름은 奇妙者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正義와 公義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熱心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 6-7).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권력이 정점에 달할 때, 힘이 강해질 때, 높이 존경받을 때, 우러러 봄을 당할 때, 자신의 힘, 권력, 명예의 정점을 지향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자리에서 참 왕이신 하나님으로, 주권자로 介入하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볼 줄 아는 그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인생과 삶의 주권자로 모시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일을 행하십니다. 이 땅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권력과 명예, 부, 자기교만의 정점에서, 오직 자기만 보이는 그 자리에, 突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와 비교해 볼 때 비록 초라하게 보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분 안에, 인간의 힘, 권력, 명예, 부를 무너뜨리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비밀이신 분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게 보입니다. 흠모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고운 모양도, 風彩(무늬)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이 우리의 주권자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2. 그러면,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는 왜, 굳이 호적하러 베들레헴에 올라갔을까요?

누가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洞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洞네로, 그 定婚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마리아가 이미 孕胎하였더라. (그런데)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 아들을 낳았다”합니다.

여기,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호적법은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자기 고향까지 가서 호적을 합니다. 로마의 호적법은, 현 거주지에서 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 고향으로 가서 호적했습니다. 최소한의 민족적인 자존심을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가 굳이 호적하기 위해서, 요셉을 따라서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사렛으로부터 요셉의 고향 베들레헴 다윗 성까지, 약 144km나 되는 거리를 여행을 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겁니다. 위험이 뒤따르는 여행입니다. 당시 법으로 보자면, 여자들도 호적할 의무는 있었지만, 직접 고향에까지 가서 호적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면,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가 왜, 굳이 호적하기 위해서 요셉과 함께 베들레헴 다윗 城까지 간 것입니까?

거기 갔을 때, 해산할 날이 찼다고 하는 것을 보면, 어려운 결단입니다. 이유가 뭡니까? 성경은 요셉이 하나님을 敬畏하는 의로운 사람이라 증언합니다(마 1, 19). 그의 아내 된 마리아 역시, 천사 가브리엘의 수태고지를 받았을 때, 놀라기도 했지만, “主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며 순종한 여인이라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던 의로운 요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마리아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하라는 令을, 자신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던 겁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것이라 예언한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자신들을 통해서 성취되게 하기 위함이었던 거지요. 예수님 생애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전 生涯는 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시기 위한 삶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약의 성취자가 되는 삶이 귀합니다. 言約을 破棄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다. 요셉과 마리아처럼, 내 인생과 삶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삶, 언약의 성취자가 되어야 합니다. 언약의 성취자들이 되십시다.

3. 예수님은 왜, 마구간 구유에서 나셔야만 했습니까? 
누가의 증언을 보십시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襁褓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7).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이 걸림돌이 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를 참 고통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여쭙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그 때, 예수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르시되, 여우도 窟이 있고 空中의 새도 집이 있으되, 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 51-62). 이 말씀들은, 우리를 참 당혹스럽게 하는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성탄하신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이셨던 이유가, 누가의 증언처럼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빈방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우리 성경에는, 사관이라 번역되어 있는데, 여관(숙박업소)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사관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탈뤼마(kata,luma)는 여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의 객실을 말합니다. 다락방을 말합니다. 베들레헴 그 작은 도시에, 몰려든 손님들로 북적북적 대는데,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게, 누가 한 사람 해산할 수 있도록 방 한 칸 내어줄 사람, 흔치 않지요. 

결국, 마리아는 짐승들을 가둬놓는 마구간에서 해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낳으시고, 강보로 싸서, 짐승들이 먹이를 먹는 여물통, 구유에 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卑賤한 자의 모습으로, 온 세상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와도 비교할 수도 없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탄생하시고 구유에 누이신 것은, 물론 빈방이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섭리적인 비천한 자의 모습으로 자기를 낮추심입니다. 모든 자에게, 위로 자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시고, 복이 되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탄생하신 것입니다. 

서민 대통령을 자부해도, 보통 사람 대통령론을 부르짖었어도, 국민들은 믿어주지 않았습니다(믿어 주세요). 이미, 서민이 아니고, 이미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80년대 한국교회에, 민주화 물결과 더불어 민중신학이 한창 주창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기 되었던 질문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민중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또 민중신학을 하며, 주창하던 그 신학자들은 민중이었는가? 사람들은, 이미 그분들을 민중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노동운동하는 분들이 이미 노동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마구간에 탄생하시고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만나는 기준을 가장 낮추어 주셨습니다. 높고, 영화로운 자리, 왕궁에서, 예수님 만날 수 없습니다. 성탄하신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들에서 양 치던 목자들처럼, 마구간 구유로 찾아가십시다. 아멘. 

자비하신 하나님, 부족한 우리들이 대림절 넷째주일을 지키며 성탄하신 예수님 모시기를 소원합니다. 베들레헴 들녘에서 밤에 양 치던 목자들은, 천사가 전해 준 말 대로, 달려가서 강보에 싸여 마구간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님께 경배했습니다. 우리도 성탄하신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 마구간 구유로 달려가게 하옵소서. 거기서, 예수님을 뵙는 기쁨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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