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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성령 충만한 믿음으로 메시야를 맞읍시다 (눅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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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한 믿음으로 메시야를 맞읍시다 (눅 1:41)


(눅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눅 1: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메시야의 오심을 에언한 미가 선지자는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로서, 제사장이나 귀족 출신이 아닌 예루살렘 동남쪽의 한 작은 마을 출신입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남왕국 유다는 끊임없는 위협에 놓여 있던 때에 활동하였는데, 이사야가 정치 현실에 초점을 맞춘 데 반해 미가는 철저히 가난한 백성들의 입장에서 메시아의 오심을 부르짖었다는 점에서 대조를 이룹니다.

4장에서는 주로 종말에 도래할 메시아 왕국과 그 구성원들인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메시아 왕국의 영광과 평화 및 남은 자의 포로 귀환을 통한 선민 이스라엘의 회복과 열방에 대한 선민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어 5장에서는 그 초점을 새 왕국의 주인이신 메시아께 맞추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탄생 직전에 선민 이스라엘이 대적들에게 받을 수치와 고난을 서론적으로 간략하게 언급(1절)한 이후, 예루살렘 남방에 있는 작은 성읍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나실 것(2절)과, 메시아가 포로생활의 속박으로부터 남은 자들을 해방시키실 것, 그분의 통치와 함께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것(3절), 그리고 오시는 왕이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를 보여준다(4절). 그분은 평화를 가져올 것이며 그 자신이 우리의 평강이시다(5절)고 합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 5:3)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미 5: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미 5:5)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라고 말씀 합니다.

유대인의 제사 제도에 능통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제사 제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와 대조합니다. 죄를 없이 할 수 있는 제사에 대하여 성경적 근거 아래에 말씀하고자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6-8)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임하셔서 새 언약을 세우셨음을 말씀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의 우월성을 다룬 히10:1~18절의 가운데에 놓인 5-10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의 완전성과 일회성이 반복되며, 특히 영원성이 강조합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라 드려지는 동물의 희생 제사는 반복적으로 드려져야 했는데,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인 번제나, 범죄한 자가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하나님께 드린 속죄제(6절)와 같은 제사는 인간의 죄를 없애 주지는 못하였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충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셨고 그 효과는 영원합니다. 이제 동물의 희생 제사 형식의 옛 제사 의식은 폐지되었으며,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제물인 스스로의 몸을 희생하여 드리심으로써 불완전한 구약의 제사는 완성되었음을 말씀합니다.

(히 10: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히 10: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히 10: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고 말씀 합니다.
미가 선지자와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한 메시야에 대해 누가 복음을 통해서도 말씀 합니다 

처녀의 몸으로 수태하게 된 마리아가 자신의 친척인 동시에 장차 자신이 낳을 예수의 선구자가 될 세례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이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고 했을 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라고 대답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겸손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은 자기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가브리엘로부터 엘리사벳의 수태를 고지 받았을 때 모든 일을 제쳐 두고 과거에 잉태치 못하던 엘리사벳의 아픔을 위로하고 또한 늦게 하나님의 은혜로 수태케 된 엘리사벳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눅1:39)라는 말씀은 마리아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즉시 떠났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수태고지를 들으면서 엘리사벳 방문을 떠올린 것입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사흘 길입니다. 이러한 전제에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먼 여행을 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눅 1:40)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 1:41)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눅 1:42)고 합니다.

임신 6개월에 엄마 뱃속의 아이가 뛰노는 것은 흔히 있는 자연적 현상입니다(창 25:22).   그런데 자연적인 것 같은 현상을 특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까닭은 이 순간 아이가 뛰 노는 태동이 다른 때와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이것을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기록하였음이 분명하다고 이해합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요한이 복중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방문을 기뻐 뛰놀며(44절)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역사하신 성령의 감동이 그의 모친 엘리사벳에게도 역사해 그녀의 마음에 놀라움과 감사, 사랑을 가득 채워주었다. 엘리사벳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는 예언을 통해 나타났으며, 이러한 예언의 영은 구약에서도 종종 나타났습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 그 인사를 들은 엘리사벳, 복중의 태아, 모두가 성령 안에 있었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기적들과 비교했을 때 그 의아함과 이해 불가능성에 있어 전혀 뒤지지 않는 놀라운 사건들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탄생에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한 믿음으로 메시야를 맞이 합시다.

성부와 성자를 연합시키는 성령 충만함으로 메시야를 맞이 합시다.

태초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성부로서만이 아니라 삼위일체로서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천지창조의 순간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말씀(로고스)으로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안에서 내재적으로 연합하여 상호교류, 내주하십니다.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있는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범죄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대속의 방법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놀라운 일, 성부가 성자를 보내시는 기적이 인류 역사속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는 경탄할만한 접점에 바로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성령으로’잉태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감싸져서 마리아의 태중에 성자로 임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인류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서막이 오르는 그 시점에, 하나님이 이제 하늘에 계시지 않고 땅으로 거처를 옮기신 것이 아니요, 성부는 성부로서 성자는 성자로서 사역하며 활동하실 때에 삼위 하나님을 일체로 연합시키십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한 연륜 있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를 반신반의하던 한 남자가 수도사에게 다가가 진정 기적이 일어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약 자네 아내가 벙어리인데 어느 날 갑자기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게 바로 위대한 기적이 아니겠는가요?” 그러자 수도사를 찾아온 그 남자가 대꾸했습니다. “어르신은 진정한 기적이 무엇인지 모르시는군요.” 이 말에 노승이 벌컥 화를 냈습니다. “그럼 당신은 진정한 기적이 무엇인지 안단 말인가? ”남자가 말했습니다. “제 집사람의 입이 닫히기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기적이겠지요.”

유대 사회에 한 풍자적인 속담이 있다합니다. 랍비가 간절히 바라던 바를 하나님께서 아시고 이루어 주실 때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랍비가 이루어 드린다면 그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라고 원하던 메시야가 오시는 기적이 성부와 성자가 일체이심을 보증 하시는 성령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함으로 메시야를 맞이 합시다.

성자와 우리를 연합시키는 성령 춤만함으로 메시야를 맞이 합시다.

친척 마리아가 방문한 것을 알고 기뻐한 것은 엘리사벳이기 이전에 그녀의 태중의 아이었습니다. 엘리사벳 복중에 있던 세례 요한은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태중에서 기쁨으로 뛰어놀았으며,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 1:15) 라고 하신 말씀대로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서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분이 메시아임을 알았기 때문이며,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도 41절 말씀대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으로 마리아가 메시아를 잉태했음을 알고 기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사를 이루어가고 계시건만, 정작 우리가 오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지 못한다면, 유대 땅에 태어난 한 아기가 바로 우리에게 주신 바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인간과 하나님은 분리되었고, 이에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를 화해시킬 수 있는 중보자로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부와 인간 사이에서 중보자로서 연합의 길을 열어 주시지만,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서 예수님을 주로 믿고 시인하게 하는 중보의 역할을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알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우리 같은 무지한 존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진짜 기적 아니겠습니까. 이 기적을 일으키시어 ‘오셨고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소망을 갖게 하고, 믿음을 갖게 하며, 회개하게 하시는 영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충만함으로 메시야를 맞이 합시다.

우리 서로를 연합시키는 성령 충만으로 메시야를 맞이합시다.

어머니 복중에 있던 요한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으로서 마리아 태중의 메시아를 알아보고 복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또한 그의 어머니도 성령이 충만하여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성령님은 전 인류를 위하여 오신 메시아가 다름 아닌 나의 구주가 되게 하시고,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신 나의 하나님이 되게 하시며 하나님과 우리를 연합시키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은 그 기적과 은혜안에서 우리 성도들 서로가 기쁨으로 연합되게 하십니다.

메시아의 초림이 임박한 상황에서 마리아는 홀로 열 달을 지내지 않고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갔고,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반갑게 맞이하며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참된 교제(코이노니아)를 이루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입니다.

메시아의 재림을 앞둔 오늘의 성도들도 홀로 기도하며 지낼 뿐 아니라, 주님 오심의 기쁨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기쁨을 전하여 알게 함으로써 우리 서로를 연합시키시는 성령님의 충만한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창조 세계의 창시자이신 하나님께서도 창조의 질서를 준행하시며 그 질서 안에서 행하시고 일하십니다. 그런데 창조 질서를 초월하여 발생하는 일을 기적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창조 질서보다 상위의 개념인 구원 질서를 위하는 한에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동정녀가 잉태하게 된 것은 우리의 과학적 지식으로 설명 불가한 기적이지만, 이처럼 규명할 수 없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성 안에서 성부 여호와와 성자 예수님을 연합시키시고, 경륜적 삼위일체 안에서 성자와 우리를 연합시키시며, 나아가 성도들 서로를 연합시키는 보혜사(pracletos, 중재자)이십니다. 이 같은 연합은 성령님과의 연합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령님과의 연합은 성령의 연합, 그 기적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페르시아 왕 압바스는 종종 농부로 가장하고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보곤 했습니다. 
성탄절이 되어 그는 어떤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길을 떠나 공중목욕탕 근처를 한동안 돌아다녔습니다. 얼마 후 그는 불 때는 방으로 들어가 불을 때는 사람과 더불어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니다. 그 사람은 자기 점심을 왕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왕은 그 후 그 사람을 만나러 여러 차례 갔습니다. 그 때마다 그 두 사람의 우정은 깊어갔습니다. 

드디어 왕이 자신이 페르시아 왕임을 밝히고 나서 그에게 성탄절에 무슨 선물을 원하는지 묻자 볼 때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부(富)를 원치 않습니다. 다만 당신이 지금까지 주신그것만을 계속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시 찾아 오셔서 저와 더불어 얘기만 나눠 주시는 것으로 족합니다.' 성탄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오심입니다. 이 일에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부와 성자를 성자와 우리를 우리 서로를 연합시키시는 성령 충만으로 메시야를 맞이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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