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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1) : 엔 케렘 (눅 1: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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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1) : 엔 케렘 (눅 1:39~45)


저는 성탄절이 가까운 오늘부터 시작하여 여러분을 모시고 성지 순례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위대한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 분의 발자취야 말로 그분의 제자들인 여러분과 제가 따라야 할 발걸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드림으로 이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후 출산하기 전 어머니 뱃속에서 처음으로 나사렛을 떠나 여행했던 곳이 어디일까요? 그 곳의 지명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8km 가량 떨어진 수목이 우거진 아름다운 마을 ‘엔 케렘’(Ein Karem)입니다. ‘엔 케렘’(혹은 아인 케렘)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포도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이 곳에는 고대로부터 샘이 있어서 주변에 물을 공급함으로 자연스럽게 포도원과 농지, 그리고 촌락이 형성되어 왔던 곳입니다. 지금도 이 곳은 아름다운 촌락으로 성지 순례자
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이 마을 한 복판에는 침례 요한의 탄생지이자 그의 부모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살던 것을 기념하는 ‘침례 요한 기념 교회’(The Church of St. John the Baptist) 가 있고, 마을에서 언덕으로 오르다보면 ‘마리아의 샘’(Mary''s spring)이란 곳이 있고, 마리아가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가진 것을 기념하는 ''마리아 방문 교회‘(Church of the Visitation)(1955년 고대 교회의 터위에 세움)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교회 마당에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기념하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뜰에 접한 벽면에는 마리아의 기도찬가들이 여러 나라 말로 새겨져 있는데 한글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마리아의 잉태를 낭만적인 신학적 사건으로 회고합니다만 어린 미혼 소녀 마리아에게는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런 사건이었을까요?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이 때 천사가 마리아에게 주신 말씀을 읽어보실까요? 

눅1:36입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느니라”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네 친족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신하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지기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미혼인 네게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면 동일한 생명의 잉태가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자기와 마찬가지로 기적을 경험한 또 한명의 여인을 만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나사렛을 떠나 140km나 떨어진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엔 케렘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늙어 임신이 불가능한 여인으로 임신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 여자와 미혼으로 남자를 알지 못한 처지에 임신을 경험한 한 여자의 희한한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기적을 경험한 두 여인의 만남과 대화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신 역사적 여인 마리아의 레슨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주께서 마리아를 쓰신 이유-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1.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마리아를 만나자마자 엘리사벳은 자신도 임신했지만 마리아의 잉태 사건은 아주 특별한 일임을 알아차렸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녀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리아를 향해 예언하게 되었습니다. 42절의 말씀입니다. “큰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에 아이도 복이 있도다” 여기 두 번씩 강조된 단어가 무엇입니까? <복>입니다. 성령은 그녀가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마리아의 잉태 사건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일찍이 여호와 하나님은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에게 창12:2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시고 이어 그 다음 절인 창12:3에서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인하여 복을 얻는 일이 문자 그대로 가능하겠습니까? 

이 말씀은 궁극적으로 구세주의 탄생을 통하여 온 인류가 구원의 복을 누릴 것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마리아가 이 축복의 통로로 선택된 것입니다. 여기 이 구절에 <너로 인하여>로 번역된 부분은 영어 NIV번역에는 <너를 통하여>(All peoples on earth will be blessed through you)로 옮기고 있습니다. 네가 축복의 통로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존재 하나의 행복을 붙들고 씨름하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내 인생이 다른 이웃들을 축복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보람, 이보다 더 큰 감동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소녀 마리아가 바로 온 세상을 축복하는 통로로 쓰임을 받기 위하여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마리아만 아니라 오늘날도 동일한 이유로 여러분과 저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부르는 복음 성가에서도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되리”라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2.믿음의 레슨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마리아는 어떤 의미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믿음의 레슨을 전달하고 있습니까? 본문 45절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마리아가 믿음의 여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마리아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믿음의 레슨을 전달하고 있을까요?

1) 믿음의 첫째 레슨은 믿음의 근거가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었을까요? 그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천사를 통한 마리아의 수태고지에 대한 그녀의 최초의 반응을 눅1:34에서 읽어 보십시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다시 이 말씀에 대하여 마리아가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눅1:38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말씀과 동일하게 오늘의 본문 45절에서 엘리사벳은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라고 말합니다. 마리아의 믿음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롬10:17의 말씀을 다시 상기해 보십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마리아가 어린 소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놀라운 믿음을 보일 수 있었음은 그녀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믿음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교회에 나오시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주관적 신념이나 철학을 신앙의 근거로 삼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성경은 그런 것들은 모래와 같은 것 결코 굳건하게 내 신앙의 집을 세울 수 없는 연약한 기초들이라고 말합니다. 내 주관과 신념이 무너지는 날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천지는 변해도 변할 수 없는 이 영원한 말씀에 우리의 믿음이 뿌리박고 있다면 그 만큼 우리의 믿음은 견고한 기초를 지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찬송가 작시자와 더불어 이렇게 고백할수 있을까요?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2) 믿음의 둘째 레슨은 믿음은 자주 희생적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제 천사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고 미혼모의 삶을 살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쉬운 결단이었을까요? 오늘 날도 이런 사건은 세간의 스캔들이겠지만 당시로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고 할 때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종의 신앙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녀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먼 훗날 십자가를 지시기에 앞서 그녀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순종은 일종의 십자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순종 때문에 세상에서는 손해보고 출세하지 못하고 돈을 더 벌지 못하고 인기를 더 누리지 못하고그래도 순종하겠느냐고 주님은 묻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하나 하나의 순종은 십자가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누가 9:23에서 모든 시대의 당신의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지금 이 순간도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숱한 그리스도인들이 전 세계 도처에서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고 있지 않습니까?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 독일의 등장과 함께 숱한 그리스도인들 지도자들은 정치적이고 정신적인 고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히틀러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의 선택이었습니다. 이 때 제3의 길은 없을까를 생각하던 한 젊은 신학자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디히트리히 본 훼퍼’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가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로 초빙 받게 되자 그는 한 일년간을 미국에 건너가 조국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1939년 여름 6월 2일에 미국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 도착한 다음 순간부터 기도시간마다 주님은 그에게 그가 있어야 할 곳은 독일이라고 말씀하시자 마침내 그는 어느 아침 기도 후 조국으로의 귀향을 결단합니다. 유명한 라인홀드 니이버 교수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7월 8일 한 달 만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는 위험천만한 독일로 배를 타고 돌아옵니다. 

“주님은 이 어려운 시기를 내가 조국의 백성들과 함께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들과 이 고난의 시기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전후 교회의 재건에 참여할 특권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는 기독교 문명의 존속을 위해 조국의 패배를 소원할 것인지, 아니면 조국의 승리를 위해 기독교 문명을 포기해야 할 것인지를 선택할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귀국하자마자 1940년 목사로서 모든 설교와 출판을 금지당하고 1943년 반체제 음모자로 체포되어 1945년 4월 9일 39세를 일기로 플로센불그 교도소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교수대에서 이슬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한 편의 기도시가 있습니다. 
“주님/우리가 공허한 말들과/경건한 문구들을 늘어놓지 말게 하시고
/사랑이 언어를 짓는 것보다 더 나으며/순종이 논증보다 더 좋음을 알게 하소서.
/우리는 항상 좋은 말들과 온갖 경건한 상투어들을 갖다 붙이며/
당신의 계명으로부터 도망치려 하나이다.

주님/우리를 굳게 붙들어 주시고/우리를 사로잡아 
/오늘 날 필요한 당신의 말씀에 굴복시키시고/우리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행하게 하소서./그리고 이를 믿음으로 행하게 하소서.“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희생이 그녀를 온 세상에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한 것처럼, 본 훼퍼도 이런 믿음과 순종, 희생으로 자신의 조국과 세상을 위한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축복의 통로로 남은 생을 살기 위해 우리가 내려야 할 믿음의 결단, 순종의 결단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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