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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 (롬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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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롬 6:3~5)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여 세례식을 갖는 날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세례를 꼭 받아야 하나?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스럽게…” 
“세례를 받으면 교회에 매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매이고 싶지 않는데…” 
“나는 집사도 싫고, 권사도 싫고, 장로도 싫고, 그냥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을까?”

따라서 우리는 먼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세례는 교인이 되기 위한 하나의 통과 의례가 아닌가? '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중요할 뿐, 세례는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면 다음 성경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막 16: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은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이 개신교의 중요한 신앙원리입니다. 
그렇다면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라고 ‘세례’를 강조하셨을까요? 

행 2:38절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떻게 할꼬.’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라고 권면합니다. 
성경에 보면 그날에 3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41절)

여러분, 하루에 3천 명씩 세례를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한 사람이 세례를 받는 데에 1분이 소요된다면 3천 명이 세례를 받으려면 50시간이 필요합니다.
꼬박 이틀이 필요해요.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세례를 받으라고 해서 그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을까요? 

 세례란 의식 이상의 구원과 직결되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병상에서 임종 시 세례를 베푸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회자들에게는 이런 때를 위해 가지고 다니기에 편리한 세례기가 있습니다. 
왜 병상에서 임종을 맞는 환자에게 급하게 세례를 베풉니까? 

임종을 맞이한다면 유언도 해야 하고, 마지막 인사도 해야 하고, 할 일이 적지 않을 텐데.......
세례는 구원과 직결된 중요한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실제적으로 어떤 도움을 줍니까? 
성경을 살펴보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죄 씻김을 체험합니다. 

 딛 3:5절을 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여기서 ‘중생의 씻음’이란 세례를 의미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죄 씻음의 은총을 체험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엡 5:26절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물로 씻어’라는 말씀은 ‘세례로 죄 씻음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세례와 죄 씻음을 연결한 말씀은 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원래 물이란 더러운 것을 씻어냅니다.
찬 274장에도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옵기는/ 나의 몸과 나의 맘을 깨끗하게 하옵소서./ 물가지고 날 씻든지 불가지고 태우든지/ 내 안과 밖 다 닦으사 내 모든 죄 멸하소서”

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렇게 감격합니까?
저도 세례 받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고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만, 제 친구는 이 앞에 서서 세례문답을 할 때부터 눈이 시뻘겋게 되더니 무릎은 꿇고 세례를 받을 때는 콩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그렇게 감격해하지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셨다”는 용서받은 감격으로 그렇게 떠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주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존재입니까?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고 나올 수 있는 존재입니까? 
우리는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잘 알잖아요? 

저의 경우를 보더라도 나이를 먹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죄질이 더 나빠지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에는 속과 겉이 같아서 잘못을 저지르면 숨기지 못하고 금방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안 그런 척 ‘위선’을 더 보탭니다. 
어린 시절에는 잘못인 줄 알면 금방 돌이켰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자존심 때문에’ ‘입장 때문에’ 고집을 더 보탭니다.

어린 시절에는 하나님 앞에서 ‘무조건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이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합리화와 변명을 더 보탭니다.
이런 나를 용서하셨다는 표식이 세례입니다. 
이런 나를 받아주셨다는 표식이 세례입니다. 
이런 나를 말갛게 씻겼다는 표식이 세례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세례 받을 때 머리 위에 붓는 성수는 추악한 죄를 씻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2.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체험을 합니다.

 옛날의 세례식은 주로 사람을 물에 푹 잠그는 침례를 행했습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어서 땅속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장사지냄’을 뜻합니다. 
‘물에 잠김으로’ 아담으로 말미암은 육적인 사람은 이제 죽었습니다. 
죄에 종노릇하던 과거의 사람은 이제 죽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 갈 사람은 이제 죽었습니다.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좇아가던 육적인 사람은 이제 죽었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올리운다.’는 것은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납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죄를 물리치고 죄를 정복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진노와 형벌의 자식이 아니라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육적인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영적인 사람으로 하늘의 것을 사모하며 좇으며 사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자기 목표와 욕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이 한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려고 기도하고 애쓰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께서는 세례를 통한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의 신비적 연합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롬6:3-4절을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합하여’란 말씀이 많이 나오지요? 
이 말씀들은 신비적 연합을 뜻합니다.
신비적 연합!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우리의 죽음과 새 생명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함께 죽는 것입니다. 
호흡이 끊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심장이 멎은 것도 아닙니다. 
땅속에 장사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비적이란 것입니다.
또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과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함께 사는 의식입니다. 
약하던 건강이 좋아진 것이 아닙니다. 
침침하던 안력이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숨이 차오르던 것이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비적이란 것입니다. 
이 진리를 믿으시길 바랍니다.

세례와 함께 옛사람이 죽었음을 날마다 고백하십시오. 
세례와 함께 옛사람이 죽었음을 날마다 확인하십시오. 
옛사람의 죽음을 선언하고 사십시오. 
옛사람의 속성인 혈기가 일어날 때도 ‘나는 죽은 사람이야’, 옛사람의 속성인 시기심이 일어날 때도 ‘나는 죽은 사람이야’, 옛사람의 속성인 원망이 생길 때도 ‘나는 죽은 사람이야’, 옛사람의 육적인 욕망이 꿈틀거릴 때도 ‘나는 이제 죽었잖아?’라고 고백하시면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천국 백성의 일원이 되었음을 증거 받습니다. 

성경에서는 세례를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할례와 비교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 2:11-12절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은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여기에 보면, 할례와 세례를 연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받은 백성이란 육체적 증거입니다. 
창17:10-11절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할례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받은 백성임을 증거하는 언약의 표징인 것처럼 세례는 우리가 약속받은 천국시민임을 증거하는 표징입니다.

세례는 ‘내가 천국 백성이 되었다.’, ‘내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아는 이 땅에서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가보기를 했습니까? 
조회를 해보았습니까? 
인터넷에 떴습니까? 
그러나 세례를 통하여 ‘내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징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개념적으로 가장 먼 거리는 한국과 지구 반대쪽에 있는 아르헨티나도 아니고, 이념적으로 다른 남한과 북한 사이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리가 먼 것은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인 나 사이일 것입니다.
어떻게 죄 된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죄 된 인간의 손을 하나님께 뻗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죄 된 인간이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얘기지요.
그런데 그 멀고 먼 거리를 세례를 통하여 하나로 묶어놓았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죄 씻음을 체험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육적인 사람이 죽고 영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세례를 통하여 천국 백성임을 증거 받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세례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꼭 받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미 세례를 받으셨다면 세례 받을 때의 그 감격을 늘 간직하길 바랍니다.
그 감격을 잃었다면 회복하십시오.
무슨 수를 쓰더라도 회복하십시오.
세례를 받으려고 준비하신다면 세례야말로 크나큰 은총임을 알고 꼭 받으시길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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