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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말 찬송합니까? (행 16: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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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찬송합니까?  (행 16:16~34) 
 

1. 언제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언제, 어떤 때 노래를 부르고 싶을까요? 아마 여러분도 가끔 다음과 같은 때가 있을 것입니다. 까맣게 잊어버린 줄 알았던 노래인데 갑자기 곡과 가사가 딱 떠오를 때, 그때 그 노래를 부르고 싶어집니다. 불현듯 어떤 노래가 목에까지 차오를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어디서 누군가에게 내놓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냥 불러보고 싶은 노래도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라디오 등으로부터 아주 오래 전에 자주 들었거나 불렀던 노래, 한 때 자신의 18번이었던 노래가 흘러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그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됩니다. 혹은 ‘기분이 나쁠 때, 우울할 때, 슬플 때, 노래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미워질 때’, ‘때로는 자신이 미워질 때 노래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독특한 경우로, 자신이 ‘여자가 되고 싶을 때’, 혼자 노래방에 가서 여자 가수의 노래를 여자키로 부른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생각 없이,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어떤 때 노래를 부릅니까? 여러분이 노래를 부른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부르는 노래는 어떤 종류이며, 그 내용은 어떻습니까? 오늘 설교는 성도의 노래, 즉 찬양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찬양생활은 어떻습니까? 즉, 여러분은 언제, 어떤 경우에, 어떤 노래를 부르시냐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바울과 그 일행들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리고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살펴보면서, 여러분의 찬양 생활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2. 바울과 실라의 노래

1) 바울과 실라가 노래한 상황

오늘 본문은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을 하던 중, 빌립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바울의 일행은 바울과 실라, 누가, 그리고 루스드라에서 참여하게 된 디모데(16:1-3) 등 네 명이었습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퇴역 군인들이 많이 살던 도시로서 주전 167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주전 27년 빌립보 시에 자치권이 부여되면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때 이후로 번성하여 로마의 마케도니야 지방 제일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에게 해를 건너 마케도니야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로 갔습니다. 

그들이 유럽으로 발길을 옮긴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 부분에 있는 대로 성령께서 아시아에서의 사역을 막으시고 대신에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케도니야 사람의 환상(9)”을 보여주심으로서 된 일이었습니다. 성령의 가이드를 받은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함으로써 유럽이 최초의 기독교 대륙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후 아프리카, 북미, 호주, 남미, 아시아, 그리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세계 선교의 중심 기지가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경험한 일은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에게 전도한 일, 점치는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일, 그리고 최초의 교도소 선교로서 재소자가 간수에게 전도한 일 등 세 가지입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가 회당이 없는 도시인지라, 예배와 기도를 위하여 강가의 한적한 곳을 찾아가 기도하던 중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배워서 하는 점쟁이가 있고, 신이 들려서 하는 점쟁이가 있습니다. 배워서 하는 점쟁이는 틀릴 때가 더러 있지만, 신이 내려서 하는 점쟁이는 상당히 잘 맞춥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여종은 악한 귀신이 들려서 점을 치는 여자였는데요. 상당히 용한 점쟁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객들이 엄청 많았고, 따라서 그 수입이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 점쟁이 여종에게 주인이 여러 명 있었다고 말합니다(16절).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인신매매단이나 앵벌이의 주인들처럼 소녀의 불행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자들이었지요. 그런데 이 귀신들린 여자가 바울 일행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았습니다. 말 그대로 ‘귀신 같이’ 알아본 것입니다. 그 여자는 바울 일행을 여러 날에 걸쳐서 쫓아다니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17).” 

생각하기에는 이 여자가 바울의 사역을 선전해 주는 것으로 보여 바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사실 귀신이 지껄이는 소리는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도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더욱이나 귀신이 이 여종으로 떠들게 한 것은 빌립보 시민들로 하여금 주님의 복음과 사역자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와 거부감을 갖게 만들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이 귀신들린 소녀의 가련한 형편과 잘못된 전도(?)로 인하여 무척 괴로워하던 바울은 그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그 여종을 자유케 해주었습니다(16:16-18).

문제는 일이 이렇게 되자, 자신들의 큰 收入源을 잃어버린 주인들이 가만 있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소녀가 귀신에게서 놓인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자신들의 돈줄이 끊긴 것 때문에 憤慨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와 누가를 제외하고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을 관에 신고하여 그들을 유치장에 집어넣어버렸습니다. 바울 일행을 관청으로 끌고 간 그들은 자신들의 본심은 숨긴 채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20,21)”고 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빌립보는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퇴직 군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입니다. 로마 정부가 자치권을 주고 시민권을 주는 등 특혜를 베풀다보니, 그들은 자신들이 황제의 덕을 입어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 지역보다 황제 숭배가 심했습니다. 이런 도시에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이자 주라고 선포한 것이나, 그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은 것은 황제숭배와, 로마인들의 인종적 교만과 애국심, 그리고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무리들이 일제히 일어나 여종의 주인들에게 동조하여 바울과 실라를 함께 고소했습니다.

관리들은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고, 로마와 빌립보의 평화를 깨트렸으며, 사이비 종교를 전파한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笞刑을 가하여 그들의 맨 몸을 쳤습니다. 유대인의 태형 법은 서른아홉대로 제한했지만(고후11:23,25), 로마의 笞刑法은 판사 마음대로 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울과 실라는 무제한으로 엄청나게 많은 매를 맞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과 실라는 온갖 비난과 욕설을 받으면서 모진 매를 맞았습니다. 셀 수없는 채찍질을 당한 그들의 벗겨진 몸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죽지 않을 정도의 심한 매를 맞은 후, 그들은 더럽고 음산한 지하 감옥에 내던져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피투성이 발에는 묵직한 차꼬가 채워졌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마의 감옥은 바깥에 현관이 있고, 바깥 감옥과 ‘안 감옥’으로 三分되어 있었는데, ‘안 감옥’은 지하 땅굴로서 문이 열릴 때 외에는 빛과 공기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발이 차꼬에 든든히 매어져 있었는데, 사실 ‘안 감옥’은 그 자체로도 죄수들이 脫走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굳이 관원들이 그들의 발을 차꼬에 채울 필요는 없었습니다. 

자, 여러분이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의 잘못으로 매를 맞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일이나 세상일을 하다가 갇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빌립보에 와서 주님의 복음을 전했는데도, 이러한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한밤”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밤”이란 성경원어로 밤의 중간, 즉 밤이 가장 깊을 때를 말합니다. 이 시간에는 모든 것들이 잠듭니다. 글쎄요, 부엉이나 야밤을 노리는 산짐승들이나 깨어있을까, 그 외에는 살아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잠에 들 시간입니다. 빌립보 교도소의 재소자들이나 간수들까지 전부 잠이 들 시간에, 바로 그 빌립보의 감옥에서 나즈막히 노랫소리가 울려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은은하면서도 평화스런 노래였습니다. 

그곳이 흉측한 감옥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영혼을 감동시키는 그 노랫소리에 어느 누구 한 사람 단잠을 깨운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험악한 죄수들까지도 잠잠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요. 그 아름다운 노래는 바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바울과 실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매 맞은 자리가 너무나 아파서 신음소리를 낼 수도 있었고, 불평하거나 낙심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도와 찬미의 제사로 그 깊은 밤을 밝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노래하는 이 상황도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 놀라운 일이 그때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더니, 옥 터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빌립보 교도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요? 땅을 뒤흔들던 지진의 기세가 사그라들자, 몸을 바닥에 댄 채로 죽은 듯이 엎드려있던 사람들, 한쪽 벽으로 가서 고개를 푹 파묻고서는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지진으로 인하여 단단히 잠겨있던 감옥 문이 다 열려져 있었고, 모든 죄수들을 아프게 조이던 차꼬가 다 벗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감옥들은 대부분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옥 터가 움직이니까 문들이 자동적으로 열렸고, 벽에 붙어있던 쇠고랑들이 떨어져 나가니까 죄수들의 발에 매인 차꼬가 자연스럽게 풀린 것입니다. 

그때 잠을 자고 있던 간수는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라고 자다가 너무나 황당한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脫走한 것으로 생각한 그는 칼로 自殺하려고 했습니다(27). 그때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고 했습니다(28). 그 말에 놀란 간수는 등불을 들고 감옥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벌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29). 그러고 나서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감옥 밖으로 데리고 나와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30)”라고 물었습니다. 

간수는 이런 상황에서 “하늘이 준 기회”라며 감옥을 빠져나가기는커녕 죽으려는 자신을 살려준 바울과 실라가 평범한 죄수가 아닌 특별한 사람들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31). 이에 간수는 사도들의 말씀에 따라 예수님을 믿었고, 그 말씀을 자기 집에 있는 모든 가족들에게도 전하여 온 가족과 식솔들이 다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 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33). 그러고 나서 그날밤 간수의 집에서는 계획에 없던 잔치가 벌어졌습니다(34). 

2) 바울과 실라의 노래

이상이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찬송한 일과 그로 인하여 벌어진 것에 대한 槪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설교의 주제에 따라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➊ 첫째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그 힘든 상황에서, 왜 기도하며 노래했을까요? 매 맞은 자리가 아파서 신음소리를 대신하여 노래를 부른 것일까요? 전혀 뜻밖으로 당한 감옥생활의 서러움을 잊으려고 노래를 불렀을까요?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의 내면에는 그 무엇인가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이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로,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 때문에,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고난 받았다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고, 그래서 감사하여 찬양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들 앞서 똑같이 그렇게 사셨던 예수님과 같은 모양으로서, 그들은 자신들을 그 자리에 세워주신 것이 감사했습니다. 죄인을 불러 복음의 도구가 되게 하시고,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에 참여하게 해 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두 사람은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여 주신 은혜도 감당할 수 없는데, 목회자로까지 불러 주신 것은 이루말할 수 없는 은혜로서 늘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데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을 받을 수 있단말인가!’ ‘나 같은 것이 무엇이라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살 수 있단말인가!’ 이것이 그들이 그 밤중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찬양한 이유였습니다. 

두 번째 그들이 찬양한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작은 시련과 고난에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시련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하실 그 다음을 기대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고난은 고난 다음에 더 큰 선물을 주시기 위함인 줄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찬양을 부릅니다. 고난이 크고 깊을수록 그 다음에 주실 것은 더 놀라운 것이 될 줄로 믿기 때문이지요. 비록 예정에 없던 빌립보로 왔고, 와서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어쩌면 이 감옥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지도 모른다는 믿음으로 그들은 찬양했습니다. 

그들이 그 상황에서 노래한 세 번째 이유는, 일종의 선택에 의해서였습니다. 산다는 것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어떤 일과 상황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물이 반만 든 컵을 보면서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이 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 마실 물이 남아 있다고 생각해서 행복해하고, 어떤 사람은 먹을 물이 점점 줄어든다고 불행하게 생각합니다. 같은 일에 대해 어떤 사람은 즐거워하기로 선택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일로 우울해하고 괴로워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생각에도 없던 반역자가 되어 뭇매를 맞았고, 죄수가 되어서 깊은 밤 대낮에도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혔지만, 그 가운데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어차피 삶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가지가 다 오기 마련입니다. 그때 믿음의 사람이 선택하는 것은 긍정적인 면이고, 기쁨이고, 찬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긍정적인 면 대신에 부정적인 면을 보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어서 인생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일이 많으면 일이 많다고 불평합니다. 일이 없으면 ‘이거 어떻게 밥 먹고 사냐?’고 불평하며 염려합니다. 이래도 불평, 저래도 불평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죠.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상황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기쁨을 한결같이 간직하고 웃고 노래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인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그 지독한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뻐하기로 결정하고 찬송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도 기뻐하고 노래할 일보다 우울하고 괴롭고 슬픈 일이 더 많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선택을 할 수는 있습니다. “주님, 저는 기쁨을 선택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주 안에서 기뻐하겠습니다!” 지난 12월 17일, 루마니아가 민주화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리처드 범브랜드 목사는 공산정권 루마니아에서 오랜 감옥생활을 했던 분입니다. 그가 감옥에서의 오랜 세월을 <하나님의 지하운동>이라는 책에 기록했습니다. 그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공산당국은 범브랜드 목사에게 ‘기독교를 버리고 공산당에 협조하라’고 설득하고 협박했습니다. 그가 말을 듣지 않자 그의 아내도 가두어 버렸고, 하나 있던 어린 아들은 아무도 돌보지 못하게 만들어 迷兒가 되게 했습니다. 범브랜드 목사는 온갖 고통을 가해오는 감방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도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였습니다.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뻐하겠습니까? 그는 도무지 기뻐할 상황이 못 되었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빗물에 흠뻑 젖듯이 기쁨을 충만하게 입혀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것,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 다른 방에 수감된 아내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아들을 지켜주실 것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기쁨이 얼마나 컸든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기까지 했습니다. 

갑자기 독방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을 본 간수가 ‘드디어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가 맛본 기쁨은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오래전 빌립보 감옥을 흔들어 놓았던 그 주님이 루마니아의 감옥에도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기쁨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일들이 여러분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➋ 설교의 주제에 따라 오늘 본문에 대해 묻게 되는 두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과 실라는 노래를 잘했을까요? 못했을까요? 바울은 평소 노래를 좋아하고 잘 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상황에서 쉽게 노래를 불렀을까요? 류형선이라는 작곡가는 “바울과 실라가 노래를 잘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뒤, 다음과 같이 스스로 답했습니다. 

“… 땅이 갈라지고 담이 무너진다. 기어이 옥문이 열린다. 바울과 실라가 노래를 얼마나 잘했으면 그랬을까? 잘해봤자지. 바울과 실라가 노래를 잘했으면 얼마나 잘했겠는가. 송정미보다 잘했겠는가, 홍순관이 그들만 못하겠는가. … 아닐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노래를 썩 잘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나보다는 잘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기라성 같은 21세기 한국 CCM 가수들만은 못했으리라. 

그렇다면 그들의 노랫소리가 옥문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비결, 그 힘의 출처, 그 비밀은 다른데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게 무엇일까? 그 비밀정보를 캐내기 위해 탐색기를 예민하게 작동하고 있는 우리에게 한 가지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음악 감상’을 즐기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음악 감상의 교양과 보폭을 더 넓히시기 위해 우리에게 노래로 찬양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정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삶’이다. 삶이 담긴 노래, 하나님의 행적이 묻어나 있는 우리의 널브러진 일상, 그 일상이 담긴 찬양, 그것이다. … 삶이 담긴 노래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래서 하나님은 삶의 처지가 힘겹고 고달프며 눈물겨운 자들의 노래를 먼저 들으신다. … 견디기 힘든 일 가운데 부르는 노래에 하나님은 가장 먼저 귀 기울이신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가 어찌 땅을 움직이지 않으리! 그래서 땅이 갈라지고 담이 무너지며 기어이 옥문이 열린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음악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작곡을 하고 작사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많은 찬송가와 복음송을 기억하고 있다가 여러 가지 상황에서 적절한 것을 골라서 부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처럼 고난조차도 주님이 주신 특권으로, 장차 주실 영광의 디딤돌로 알고 기뻐하는 사람은 위대한 음악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 어떤 악조건 하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탁월한 찬양자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이 동시에 다가오는 삶의 현실에서 부정, 원망, 불평, 저주보다는 기쁨과 감사와 찬양을 선택하는 사람은 주변을 변화시키고 기적을 불러오는 신령한 찬양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찬양하는 삶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노래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가장 노래할 수 없는 상황에서 노래한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감옥에 갇혔고,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아파 죽을 지경 …, 그것도 복음을 전하여 사람 살리고 영혼 살리다가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들은 노래했습니다. 그렇게 노래했더니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지진이 일어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명되었고, 사람들의 묶인 것이 풀려졌고, 간수의 가족들이 복음을 듣고 변화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 도시에 유럽의 첫 번째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노래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오늘 본문은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노래한다면 그 노래가 불러오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래하십시오! 찬양하십시오! 그 어떤 경우에라도! 특별히 지금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노래하십시오! 밤의 두려움 속에서 좌절하지 말고 그 어둠을 밝은 빛으로 만들어주실 하나님께 노래를 올려드리십시오! 감사와 찬미의 노래만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불러오는 열쇠가 됩니다. 

중고등부 시절에 자주 불렀던 복음송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 노래할 이유 있네/ 놀라운 일 그곳에 있으리/노래할 이유 있네/ 그의 곁에 있으면 노래할 이유 있네/ 밤낮으로 노래 부르리/ 온종일 즐거운 노래를/ 노래할 이유 있네/ 노래할 이유 있네/ 내 죄를 주가 씻었네/ 노래할 이유 있네/ 새 생명 내게 주셨네/ 노래할 이유 있네/ 날마다 찬양하리라. … 
이 노래를 즐겨 부르시고, 이 노래처럼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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