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탄절] 성탄 찬송 (눅 1:46~55)

  • 잡초 잡초
  • 284
  • 0

첨부 1


성탄 찬송 (눅 1:46~55) 
 
 
생일을 맞이한 사람은 그날 잔치의 주인공입니다. 참석자들은 선물을 주고 축하의 말도 건넵니다. 재주가 있는 사람은 노래를 불러주거나 시를 낭송하기도 하지요. 생일 자는 그날 모든 사람으로부터 관심의 초점이 됩니다. 생일 자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참석자들끼리 선물을 주고받고 즐거워하다가 잔치를 끝내버린다면 참 이상한 생일파티라 하겠지요. 그런 잔치라면 생일 자에게 기쁨이 되지 않고 오히려 슬픔이 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이 아니지만 그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한 날입니다. 그렇다면 선물이든 찬양의 말이나 노래나 시든 예수님을 향해야 하겠지요. 주님께서 특별히 관심의 초점이 되는 날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 날의 주인공이신 주님께는 별 관심이 없이,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만 있다면 참 이상한 크리스마스라고 생각해야 마땅하겠지요. 그것이 불신자들의 모습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이라면 마땅히 우리 주님의 어떠하심을 참으로 기념하는 날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리아의 성탄 찬송 내용을 통해 하나님이신 그분께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마리아는 그녀의 존재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시작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46-47)다고 찬양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48a)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당시에 여인은 로마 제국과 유대 사회에서 멸시를 당하는 소외계층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목수의 정혼자로서 재정적으로도 비천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내 구주”를 의지해야하는 비천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느 것 하나 내세울 수 없는 비천한 여인을 돌아보셨습니다. 그녀를 통해 구주 예수님을 탄생시키는 역사에 쓰셨습니다. 비천함을 돌아보셨다는 사실이 마리아로 찬양케 하였습니다.

성도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찬양을 드리게 될 때가 언제입니까? 솟구치는 기쁨을 억제할 수 없을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보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입니다. 기독교인은 금욕주의자나 피학적 쾌감 속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일지라도 비천함 속에 있을 때는 슬픔과 아픔을 느낍니다. 돌아보는 이가 아무도 없을 때는 더욱 고민하고 탄식하며 울부짖지요. 성도에게도 비천함 자체가 기쁨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비천함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에 비천함 속에서도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이지요. 언제나 “내 구주”께서 성도의 기쁨의 근원이십니다. 언제나 그분만이 찬양의 대상이 되시지요.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은 마리아는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8b)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사실이 당장은 마리아에게 복이 되지 않습니다. 정혼자가 잉태한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더라도 간음녀라는 더러운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동정녀 수태는 이 세상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이어서,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만 할 상황이었습니다. 짧은 시각으로 보면 그녀는 지지리도 복이 없다고 슬퍼해야 합니다. 돌아보신 것이 이 모양이냐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만세를 내다보았기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날 눈앞에 펼쳐진 당장의 현실만을 보면서 살아간다면 찬양하기 어렵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의 비천함을 돌아보지 않는 것 같은 상황에 처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원만하게 사는 것 같은데 유독 나만 별나게 고생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 같을 때가 있지요. 아무런 진전 없이 제자리걸음만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처럼 만세를 내다보는 눈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님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으며 사는 자를 반드시 복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세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합니다. 마리아에게 하나님은 “큰 일”을 행하신 “능하신 이”(49a)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한 여인의 비천함을 돌아보시는 일을 하신 분이 아닙니다. 동정녀 탄생을 통해 아담 때부터 계시하셨던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의 씨’ ‘유다의 후손’ ‘다윗의 자손’을 드디어 역사 속으로 보내시는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님의 지혜를 따라 당신님의 뜻을 반드시 역사 속에 성취시키시는 전능한 분이십니다. 어떤 피조물과도 구별되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49b).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긍휼하심”이 대대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50).

현실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작아 보이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현실이 작아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현실이 커 보입니까? 하나님이 커 보입니까? 현실이 마음을 채우고 있나요? 하나님께서 마음을 채우고 계신가요? 우리의 진정한 문제가 각박한 현실 때문일까요? 아니면 현실에 매몰되어 현실만 바라보고 사는 우리의 태도 때문일까요? 비천한 현실에 처하든 풍족한 현실에 처하든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 때에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는 고백처럼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베풀어지지 않고 “두려워하는 자”에게로 제한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 곧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은 그분의 전능하신 팔로 힘을 보이셔서 흩으십니다(51). 통치하는 권세를 가진 자들을 그들의 보좌로부터 끌어 내리시며 비천한 자를 높이십니다(52).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시는 역전의 하나님이시지요(53). 이는 하나님께서 마구잡이로 권력을 휘두르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분께서는 언제나 ‘교만한 자를 낮추고 겸손한 자를 높인다’는 당신님의 통치 원칙에 충실한 분이심을 찬양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 원칙을 공평하게 적용하십니다.

풍족한 사람이라고 해서 교만한 것은 아닙니다. 장사 잘되는 식당의 사장님이 장사 안 되는 식당의 사장님보다 훨씬 겸손한 경우도 많습니다. 반대로 비천에 처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겸손한 것도 아니지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자존심만 강해서 온 세상을 향해 거만한 태도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겸손해 보이지만 속으로 교만한 사람도 있고, 장삿속으로 겸손한 척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이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낮추시는 평가는 “마음의 생각이 교만”하냐 아니냐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다윗도 그 마음이 교만해 졌을 때는 그를 한 없이 낮추셨습니다.

시편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 긍휼을 얻을 수 없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를 높이셨지요(눅 5:8). 또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혀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였던 세리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셨습니다(눅 18:13).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교만한 바리새인들은 책망하셨지만, 스스로 죄인 중에 괴수로 여겼던 바울은 바리새인일지라도 귀히 쓰셨습니다(딤전 1:15).

많이 가지고도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무형의 정보를 가졌을지라도 마음이 높아지고 발언권이 세어지는 경향이 사람에게 있지요. 교회만이라도 가진 자가 겸손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교회도 각종 죄인들이 모인 집단이라 현실적으로 그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열심히 충성한 후에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지라고 가르치지만, 충성하고 나면 유익한 종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가 어렵지요(눅 17:10). 없던 자도 가지게 되면 슬며시 마음이 바뀌는 것이 죄인 된 인간의 특징이기 때문에 누가 누굴 비난할 처지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언제나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는 진리를 명심해야 할 뿐입니다.

초보 운전 때는 사고를 내도 가벼운 접촉사고 정도로 끝납니다. 이제는 운전에 능숙하다는 생각이 마음에 자리 잡을 무렵에, 목적지에 다 왔다고 방심할 때 주로 큰 사고가 나지요. 가벼운 접촉 사고 때마다 마음을 낮추어 초심으로 돌아가는 계기로 삼는다면 오히려 큰 사고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리 삶에 부딪치는 참을 만한 정도의 문젯거리들은 쉽게 교만해지는 우리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 생각됩니다. 너무 긴장을 풀어버려서 기도 없이 지내지 않도록,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의지함도 없이 살지 않도록,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도록 하시려는 제동장치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54-55). 만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신실하지 않다면, 언제 변경되고 취소될 지 알 수 없는 말씀을 신뢰하고 사는 일은 매우 어리석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님께서 하신 약속을 취소하거나 변경하지 않으십니다. 약속하신 말씀대로 어김없이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나 불가능해 보이는 말씀일지라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것이지요.

비천한 여인에 불과했던 마리아는 ‘예수님’과 관련되면서 만세에 복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 은혜를 생각하면서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참으로 만세를 두고 생각할 때 가장 복된 삶은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는 삶입니다. 비천할지라도 주님께서 돌아보시는 삶이 가장 복됩니다. 성탄절에 우리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기 바랍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