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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가 나를 위해 오셨다면? (막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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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가 나를 위해 오셨다면? (막 2:13~17)


우리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보편적인 시험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 생활을 통해서 만나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실망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의 반응이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실망을 안겨 준 어떤 사람, 교회 안에 어떤 사람, 어쩌면 그 사람이 교회 지도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저런 사람이 있는 한 이 교회에 나오고 싶지 않다, 그래서 교회를 옮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그마나 굉장히 좋은 예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저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예수를 안 믿겠다면서 아예 교회를 등지고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처럼 교회에서 겪게 되는 상처나 갈등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우리가 가진 교회에 대한 지나친 이상적인 기대 때문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성서적인 교회에 대한 우리들의 그림, 비성서적인 교회관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 역사상 가장 교회가 이상적이고 역동적인 교회의 시대가 있었다면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초대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일세기의 초대교회, 그래서 우리가 종종 표어를 붙일 때에도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표어를 붙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들 가운데에서도 성경에 나타나 있는 가장 영적이고 모범적인 교회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에베소교회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이상 머물면서 개척했던 교회입니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교회를 개척했고,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에베소 교회만큼 오랫동안 머물면서 목회를 했던 교회는 없습니다.  바울이 한 곳에서 3년 이상 머물면서 집중적인 선교를 했던 곳이 바로 에베소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교회는 아주 괜찮은 교회, 아주 좋은 교회의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향해서 보내는 편지 가운데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교인들 가운데 거짓말쟁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겁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여러분 거짓을 버리세요.  참된 말을 하세요" 이런 권고가 필요했겠습니까?  그러니까 교인들 중에 거짓말쟁이가 있었다는 겁니다.

또 28절에 보면,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 가운데 도둑놈이 있었다는 겁니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도둑질하지 말라'는 편지를 썼던 것이지, 만약에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는데 바울이 그런 편지를 썼겠습니까?

또 29절에 보면,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무슨 말입니까?  교인들 가운데도 더러운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음담패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교회 생활을 하시다가 그런 교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거짓말하고 도적질도 하고, 사기도 치고, 또 이상스럽게 말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거나 경험하거든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그렇게 은혜롭고 뜨거웠던 초대 교회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느냐?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을까?  혹여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오늘 봉독한 본문의 사건 결론이 여기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17절을 다시 한번 같이 읽도록 하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것이 사건의 결론입니다.  결론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온 이유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고 고백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면 예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면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부르시겠습니까?  지금도 죄인들을 부르시고 있을 거란 말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죄인들을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누가 모여야 합니까?  의인이 모여야 합니까, 죄인이 모여야 합니까?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죄인의 집합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비유하셨습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않느냐?  나는 병든 사람을 부르러 왔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교회는 병원입니다.  그러면 좋은 병원이 어떤 병원입니까?  좋은 병원은 건강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좋은 병원입니까?

여러분, 소문난 병원에 한 번 가 보십시오.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소문난 병원에 가면 각종 병자들이 다 모여듭니다.  다른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병자들이 소문에 소문을 듣고 모여듭니다.  그곳이 좋은 병원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각종 죄인들이 모이는 곳, 각종 병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병원이라는 곳이 병자들만 많이 모이는 곳이어서는 곤란합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병원에서는 병자들이 잘 낫는다, 병을 고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나야만 합니다.  병 고치는 소문이 나지 않으면 그 병원은 일찌감치 병원 문을 닫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병을 고치는 것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병을 고치는데 오래 걸리는 사람도 있고, 빨리 고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 와서 이상한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병 고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병자들이 병원에 갈 때 어떤 기대를 하겠습니까?  병 고칠 기대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병자들이 병원에 가면서 늘 갖게 되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 병원에 가면 병자인 나를 어떤 식으로 다룰까?  좀 친절하게 나를 존중하면서 다뤄 줄까?  아니면 막 다룰까?  가급적이면 내가 치료받는 과정에서 나를 잘 다뤄 주었으면 좋겠다.  병원 직원들이 보다 친절했으면 좋겠다.'  나름대로 이런 소망들이 다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처음 출입을 하면서 '이 교회는 친절한가?  이 교회 성도들은 나를 어떻게 대해 줄까?'하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에 보면 우리가 성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약한 병자들과 죄인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모본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접촉할 때, 나도 죄인이지만 또 다른 죄인들을 접촉할 때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야 하느냐에 대한 모본을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어떻게 이웃들을 접촉해야 합니까?

첫째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보시는 방식으로 우리도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가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죄인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보셨을까?  예수님이 보시는 방식으로 우리들도 사람들을 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본문이 시작되면서 14절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본문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세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리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리를 보셨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리를 보셨다는 그 자체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리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회피하는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랍비입니다.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 당시에 만약 유대인 랍비, 유대인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교사가 지나가다가 세리를 만났다면 그를 안봅니다.  안보고 지나갑니다.  피합니다.  그렇게 세리들은 그 당시에 인간으로 취급을 당하지 못했습니다.  쓰레기로 취급을 당했습니다.  민족의 반역자, 로마에 빌붙어서 세금을 걷어 내기 위해 동족들을 착취하고 있는 사람, 반유대주의자, 반 민족주의자, 인간으로 취급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세리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정상적으로 걷는 세금으로는 '정세'와 '관세'라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정세'만 해도 인두세, 토지세, 소득세라는 세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라에서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의 머리에 따라 무조건 인두세를 내는데 열 두 살부터 65세까지 인두세를 내고, 토지세를 내고, 소득세를 냅니다.

이것만해도 죽을 지경인데 그 당시 세리들은 제멋대로 '관세'라는 것을 붙였습니다.  이 관세는 주로 로마 정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전부가 세리들이 차지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길을 통과할 때 받는 통과세, 마차를 끌고 가면 마차 세, 마차 바퀴가 여러 개면 바퀴마다 바퀴 세, 근처에서 물고기를 잡으면 물고기 세, 그렇게 부과했습니다.  한 마디로 약탈자들입니다.  그렇게 거두어들인 거의 전부를 자기들이 착복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세금을 받아내기 위해서 그 동네 살인 청부업자와 세리들은 결탁되어 있었습니다.  강제 집행을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러한 세리들을 만나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상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법정 증인으로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판사가 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증인도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으로서 도무지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세리들을 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모두가 기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나가시다가 일부러 이 세리를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세리를 보셨다, 여기서부터 보통 일이 아닙니다.  보시고….  그런데 어떤 식으로 봤을까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보셨을까요?  유명한 성서학자인 윌리암 바클레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이 세리를 보았을 때 '예수님은 세리였던 레위 안에서 위대한 전도자 마태를 보았다'

사랑하는 여러분, 레위라는 사람은 잘 몰라도 마태라는 사람은 잘 아실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과 동일한 사람인 마태를 잘 아실 겁니다.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세리 레위 안에서 전도자 마태를 보았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된 다음에 하나님이 쓰시는 특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아마도 마태라는 이름은 이 사람이 변화된 다음에 붙여진 새로운 이름이었을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마태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물처럼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께서 마태복음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그러니까 본래 마태가 유대인 관리였으니까 유대인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으며 손가락질 받는 세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리의 특유한 관찰력을 가지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유대인의 메시아 구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정확하게 관찰하여 우리에게 그의 생애를 증거하는 마태복음서를 남깁니다.  변화된 후에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예수님이 "야, 세리, 넌 상대하지 않아" 라고 천대하면서 그냥 지나가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셨습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되면 얼마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놀랍게 쓰임을 받을 수가 있는가?  이 가능성의 안목을 가지고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가능성의 안목을 가지고 사람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그렇게 보십니다.  현재 있는 모습대로만 안 보십니다.

성경에 보면, 대표적인 다혈질의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어디로 어떻게 행동할는지 종잡을 수 없는 격정적이고 충동적인 사람,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시몬을 만나셨을 때 예수님은 첫 번째로 그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시몬아, 네가 장차 게바라 하리라"  '게바'의 뜻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반석의 이미지….

생각해 보십시오.  육중한 반석의 이미지.  이것은 시몬에게 어울리지 않는 별명입니다.  충동적이고 급하고 조변석개하고 계속 변합니다.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처음 보았을 때 그런 사람으로 보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님의 손에 붙들렸을 때 초대교회가 세워지는 기초 같은 역할을 할 위대한 전도자 베드로의 가능성을 시몬 안에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을 보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창녀로 보시지 않았습니다.  창녀 막달라 마리아, 육신의 욕망을 좇아 달려가는 생애를 살았어도 도무지 만족이 없고 불안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왔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안에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증거할 여인으로 보셨습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창녀 마리아 안에서 성녀 마리아의 가능성을 보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변의 사람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이 내게 얼마나 상처를 준 사람이든, 아니면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든, 그러나 그 사람 안에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예수 믿고 성령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이 사람이 어떻게 변할까?  이런 가능성을 가지고 사람을 보십니까?
우리 다같이 한 번 따라서 기도하십시다.

"오늘, 예수님의 눈을 가지고 저도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그렇습니다.  주님의 눈을 가지고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사건은 오늘 우리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재 그 모습 그대로 사람을 보지 마십시오.  미래에 되어지고 세워질 그 가능성을 가지고 오늘의 그를 보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의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지금은 그 사람이 가난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멀지 않은 미래에 나보다 더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가 천대받는 사람이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 하나님께서 그를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높여 주실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있다고 교만하지 말고, 없다고 기죽지도 말아야 합니다.  있는 사람이라고 잘하고, 없는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만큼 나쁜 죄도 없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다루셨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고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가 전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저 그렇게만 보신 것이 아니라 보신 다음에 그들을 부르십니다.  자기에게로 부르십니다.  지금도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람들을 만날 때 예수님의 안목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고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그를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마태를 하나님의 선물로 보셨습니다.  위대한 전도자의 가능성을 가지고 보셨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본문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보신 다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말씀하셨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따르라"고 초청하셨습니다.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을 따라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심장과 안목으로 사람들을 보신 다음에 당신 자신에게로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십니다.  지금도….  믿으십니까?  지금도 예수님이 당신에게로 사람들을 초청하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오라. 오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초청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 '나'가 누구입니까?  그 '나'….  굉장한 분입니다.  그냥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서 나를 따르라고 그래봐야 수지 맞는 것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예수,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육신을 입고 오신 구세주, 그 분이 나를,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진리이신 예수님, 생명이신 예수님, 그분을 만나 그분을 따라가면 영생을 경험할 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분을 따라가면 놀라운 하늘의 복을 얻게 될 것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분은 진리이십니다.  그 분은 생명이십니다.  그 분은 구원이십니다.  그 분은 소망이십니다.  그 분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 생활이 무엇입니까?  신앙 생활을 간단히 말하면 결국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만나고, 두 번째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 생활의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먼저 할 일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사건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아직도 내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내가 교회에 나와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시간이 흘러가니까 잘 처세하고 잘 적응해서 교회에서 직분도 받습니다.  교회에서 그럴듯한 감투도 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현대 교회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나의 길이 되시며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앙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두 번째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것이 영적 성숙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니까 신바람이 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니까 내 삶에 보람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풍성함이 있습니다.  물론 시련도 있습니다.  고통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흔들리지 아니하는 소망과 천국의 희망이 생깁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의 시련과 고통을 이기는 내 마음속의 저력과 비전과 능력이 생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의 삶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다 보니까 너무너무 좋단 말입니다.  그래서 '야, 아무개도 예수님 만났으면 좋겠다'  그때부터 제자들의 전도가 시작되는 겁니다.  전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도하는 것은 나를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 보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다 보니까 이 삶이 놀랍더라는 겁니다.  기쁨이 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소망이 있고, 비록 약간의 시련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내 삶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인생이 달라집디다.  우리 예수 믿읍시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우리를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경험을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때때로 '나'라고 하는 것이 전도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나 때문에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 때문에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내 주변의 이웃들이 예수님을 만나는데 방해요인이 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는 이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예수님을 따라가십시다.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이렇게 막힘 없는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웃들을 정말 주님 앞으로 인도하려면 예수님처럼 사람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에 대한 편견,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넘어서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합니다.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보니까 마태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잔치를 열었습니다.  본문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예수님을 만난 감격으로 예수님을 초청하고 잔치가 열렸습니다.  누가복음 5장 29절에 보면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큰 잔치가 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찬치, 동네 잔치가 열렸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누가 모였겠습니까?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모였다고 했습니까?

15절에 보면, 많은 세리가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죄인들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죄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죄를 지은 죄인들입니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일반적으로 말하는 죄인에 대한 보편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것은 그 당시의 소위 종교인,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구전율법을 따르지 않고 율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정죄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모였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종교 지도자들은 그 사람들을 정죄하고 심판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다 환영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같이 끌어안고,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조심해야 할 것은 함부로 사람에 대한 타이틀을 붙여서 사람들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오셨다면 그 예수님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죄인의 타이틀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 붙여져야 할 타이틀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을 받아들이느냐, 수용하느냐?  이것은 전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안되면 전도가 안됩니다.  어쩌다가 전도가 되어와도 그 사람은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예수님은 편견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다 받아들였습니다.  사회가 멸시하고 내 버린 사람들을 다 받아주었습니다.  거기서 복음의 위대한 잔치와 복음의 위대한 역사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람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서 이렇게 우리의 이웃들 앞에 설 수 있다면 우리의 전도는 언어 이상의 감동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설득력과 감동과 능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복음이 지체되고, 이웃들과의 담이 단절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좁은 인간관, 우리의 좁은 선택된 제한적인 교제, 우리가 성도의 교제라고 하면서 밤낮 그냥 자기하고 잘 어울리는 몇 사람하고만 밤낮 몰려다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이웃들을 향한 우리의 세계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편견,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뛰어넘어서 이웃 앞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가설 때 새로운 선교의 장이 열릴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또 다른 아름다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성탄의 계절입니다.  이제 몇 일 후면 우리 주님이 오신 성탄절입니다.  이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가 나를 위해 오셨다면 그 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가 나를 위해 오셨다면 그 분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웃들에게 전도하지만 힘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사람들을 선입관을 가지고 대하고, 편견을 가지고 대하면서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대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눈으로 보시면 언짢아 보이는 이웃들이라도 빛나는 내일의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가슴으로 내 이웃들을 느끼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이웃들에게 다가서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이웃들이 탕자처럼 돌아오기 전에 사실은 어쩌면 집안에 있는 탕자와 같은 우리들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돌아올 때 우리의 찌꺼기가 다 사라지고, 우리가 새로워질 때 교회가 새로워지며 민족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워지면 이웃들을 향한 전도가 능력 있는 전도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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