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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안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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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  (막 4:35~41)


I. 생명의 종교

크리스마스를 맞아 모처럼 고교 동창들끼리 모여 파티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친구들이 갑자기 화제를 종교문제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종교학과를 다니는 영자가 순자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과 부처님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한참을 진지하게 생각하던 순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건 무엇보다도 헤어스타일 아니겠니?”

여러분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살아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만약 기독교가 종교라면 다른 종교는 철학 혹은 도덕은 될 수 있을지언정 종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종교가 종교이어야 한다면 사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영생입니다. 

II. 풍랑을 만나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마가복음 4장은 씨뿌리는 비유 그리고 겨자씨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설교하시고 바로 그날 저물 때에 갈릴리 바다 저 건너편으로 가자고 제자들을 종용하셨습니다. 그 밤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커지더니 물결이 배에까지 들어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은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고,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고 하는 너무나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씨앗의 비유 다음에 예수님이 풍랑의 사건을 통해서 씨앗의 신비, 믿음의 신비를 체험적으로 제자들에게 지금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아열대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덥습니다. 이 찬물이 헬몬산에서부터 내려오면서 이 아열대성의 더운 갈릴 리 바다의 표면의 물과 부딪치면서 갈릴리 바다는 예고하지 않았던 급작스런 풍랑을 일으킵니다. 갑작스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 바람이 불어와 누구의 배를 삼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 바다엔 일기예보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바다엔 일기예보가 없습니다.  

1. 본문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곤혹을 치루고 있는 것은 배를 젖는 저들이 애숭이라서 초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노련한 뱃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자신들의 고향이고 직장이고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뱃사람들이었던 제자들이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소연합니다. 인생의 바람은 인생항해가 서툰 사람에게만 오는 것 아니지요. 건강하던 사람도 질병으로 쓰러집니다. 노련한 경영가들도 사업에 실패를 겪을 수가 있습니다. 능숙한 신앙인들도 시험을 만나고 유혹에 부딪힐 수가 있습니다.

2. 본문의 제자들, 요나처럼 불순종하여 도망하다가 만난 풍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풍랑이 일어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지 않았다면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를 모시고 가던 제자들에겐 일어났던 풍랑 마져도 멈춰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이 배 한가운데서 지금 풍랑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3.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사실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이 난리 풍랑 속에서 예수님은 고요히 주무시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인생의 바다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파산을 겪습니다. 실패를 경험합니다. 질병으로 신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무지 무관심한 듯 보일 때가 있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울부짖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응답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이때 흔히 사람들이 말합니다. 야! 정말, 인생 모르겠다. 저희들이 어릴 때 어른들에게 인생에 관하여 물으면 어른들은 그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크면 알게 될거라고... 그러나 크면 클수록 더욱 모르겠는게 인생 아니었습니까?  

여기, 분명한 한 가지 결론이 있습니다.
인생은 고해다. 인생은 괴로운 바다입니다. 

중세기 어느 수도원에 신부복을 입은 어느 낯선 구도자 한 사람이 찾아와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수도원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나와서 구도자에게 물었습니다. "누구를 찾으십니까?" 낯선 구도자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바로 이 구도자가 저 유명한 '신곡'을 쓴 단테였습니다. 

"평화를 찾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60억이 넘는 사람이 한결같이 찾고 있는 것은 평화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지식을 얻으면 평화로울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밤잠을 안자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면 평안할 것을 믿기 때문에 이윤의 추구를 위해서 전력을 기울입니다. 권력을 잡으면 평안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권모술수도 사양치 아니하고 권력쟁취를 위해 눈에 불을 켭니다. 

그러나 인생 한가운데서 누구도 진정한 평안을 찾지 못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평안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주의자들이 본 인간입니다.

지난주 “목포는 항구다”, 목포지역 연합 집회가 있어 잠시 다녀왔습니다. 목포엔 쓰러진 황소도 벌떡 일어난다다는 세발 낙지로 유명하지만, 신안 앞바다에서 나온 천일염은 유익한, 유명한 소금입니다. 염전을 하시는 장로님의 얘기를 들으니 소금 가마니를 바닷물에 넣으면 넣은 순간 녹아버린 답니다. 그러나 민물엔 소금가마니를 바닷물에 짚어 넣어도 건재해 거의 그대로 있답니다. 왜 그럴까요? 소금의 고향이 바다 이기에 소금은 바다엔 너무나 쉽게 녹아 버린다는 거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이 고향인 사람,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바다에서 잘 녹습니다. 예배에 빠져듭니다. 말씀에 사로잡힙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의 바다가 고향인 사람은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사소한 문제에 짓눌려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부정적인 일에 쉽게 현혹 됩니다. 받은 은혜도 세상에 한번 빠져 버리면 너무나 쉽게 잃어버리고 맙니다. 

맞습니다. 당신의 고향은 천국의 바다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바다입니까? 예수님은 풍랑 한복판에서도 편히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그의 평안을 녹일 수 없었습니다. 세상이 그의 기쁨을 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III. 예수님: 풍랑속에 주무시다

1. 주무시는 예수님

제자들이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는 시간에 예수님은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라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깨워 일어나신 예수님, 바람을 꾸짖어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때 제자들의 반응이 마지막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이것 보십시오! 제자들은 바람을 꾸짖어 잔잔케 하시는 예수를 보고 놀랐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거기에 있는 것 아닙니다. 제자들이 진짜 놀라야 될 일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지금 제자들, 주제 파악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 광풍 속에서 고요히 주무시는 예수님의 인격! 풍랑, 비바람 가운데에서도 편히 쉬시고 주무시는 예수님의 그 믿음 속에 우리가 놀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주무신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셨다는 기록도 이 사건에만 나타납니다. 물론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 밤이 되면 주무셨겠지요. 그런데 성경 상에 기록은 이 사건에서만 예수님께서 주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풍랑속에서, 질풍노도 한 가운데서 예수님이 편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이 본문의 주무신 사건은 의미심장한 사건이요,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커다란 메시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신 것은 상당히 의도적 행동이었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이 아니고,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의도입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든 더욱 거센 풍랑을 일으키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킬 수도 있고 하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산을 세우기도 하시는 분이시며 산을 무너뜨리기도 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풍랑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기대하십니다. 

주기철 목사님처럼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잡혀가 고문을 받은 주남선 목사님이 있습니다. 일본 경찰의 고문은 잔인하여 말로 다 형용하기 힘들었습니다. 엄지손가락 두 개를 노끈으로 한데 묶어 대들보에 매다는가 하면,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콧구멍에 붓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에 나무 토막을 끼우고 짓누르며, 손톱사이에 대나무침을 꼽고, 인정사정없이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악형을 한 차례 가한 형사는 "잘 생각해 보고 마음을 돌이켜!"라고 주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백번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요. 참신은 하나님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소!" 또 다시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듭니다. 주 목사님은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기절하였습니다. 얼마 후, 의식을 되찾았고 사방은 조용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그 자리에 엎드리어 이 시련을 이기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다가 우연히 시멘트 바닥을 만져보니 추운 겨울 물로 젖은 시멘트 바닥이 불 땐 온돌방처럼 따뜻했습니다. 목사님의 온몸은 포근한 담요에 싸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눈이 사르르 저절로 감겨 그는 깊은 잠에 잠겼습니다. 주 남선 목사님은 후에 이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포근한 담요는 우리 주님 자신이었어요. 나는 주의 품에서 평안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해야 할 일은 “환경을 잠잠케 해 주시옵소서, 풍랑을 꾸짖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안식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어떤 풍랑 한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주여! 제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23편에서 다윗이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없습니까? 많은 신학자들은 사울에게 쫒겨 다닐 때 이 시가 쓰여졌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다윗은 푸른 초장을 꿈꾸고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처한 환경보다 함께 하시는 이가 누구 인지가 중요했습니다.

2.  꾸짖으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꾸짖으셨다고 했는데 여기 꾸짖는 사건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먼저 꾸짖으시고 그 다음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에서는 먼저 풍랑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나무라시는 것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생의 풍랑을 잠재우기 전에 내 마음의 풍랑을 잠재워야 할 때가 있는 것이고, 다급한 인생의 바람을 끄신 다음에 내 마음의 풍랑을 치료해 주실 때가 있는 거지요. 아무튼 결론은 “믿음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하는 것입니다.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 없음이 문제더란 말입니다.

“꾸짖다”라는 이 단어는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이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귀신을 꾸짖으시되 이때 “꾸짖다”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귀신은 풍랑 속에 있는 것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내 환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 속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바꿉시다. “환경을 꾸짖어 주세요” 하기 전에 “내 믿음 없음을 꾸짖어 주세요” 

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단 10퍼센트만이 사실이고 나머지 90퍼센트는 사건에 대한 반응이라고 합니다. 10퍼센트의 사실보다는 90%의 반응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 이 아니라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10퍼센트의 사실을 90퍼센트의 반응을 통해서 다 뒤집는 사람들입니다. 

스티븐 코비가 말하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중 그 첫째는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환경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을 변화시키는 사람입니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최고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IV. 예수와 함께 기적을 기대하라

어리석은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시련에 부딪힐 때마다, 고난 한 가운데 서 있을 때 마다, 왜 내가 이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가? 이유를 캐묻고 다닙니다. 그러나 왜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그와 같은 고생을 해야 했는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1. “그 시련, 풍랑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시련을 당할 때에 고독한 인생길을 걸어 갈 때에 고아와 같이 너희들을 버려 두지 않으신다. 주님은 너희를 혼자 두지 않는다. 늘 동행하신다. 우리 인생 항로에 동행하신다. 당신의 고난의 배 위에 동승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 내 인생의 선장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여행을 하는 인생 바다라 하면 너는 평안할찌어다!” 마지막에 배가 뒤집혀져 죽으면 제자들만 죽습니까? 예수님이 그 안에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선장 되십니다.  

어떤 한 소설가가 여객선을 타고 여행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섭게 바람이 몰아쳐 옵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갑판위로 뛰어 올라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하나가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깡총깡총 뛰어놀며 재미있게 갑판을 오가지 않겠습니까? 아이의 손을 꼭붙들고, “얘야, 너는 무섭지 않니! 얘야, 너는 저 풍랑이 무섭지 않니?” “아저씨, 제가 지금 선장실에서 나오는 길이예요. 우리 아빠가 선장이예요. 그런데 우리 아빠의 얼굴을 보니 아빠의 얼굴이 편안했어요, 아무일 없을 거예요 아저씨!”  

여러분 두려우십니까? 불안하십니까? 예수님의 얼굴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주님의 얼굴이 평안하시거든 여러분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아무 일 없다 말씀하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 마침내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엄청나게 크다”고 하는 단어가 하나 나오고 있습니다. “메갈레”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크다고 할 때, “빅(Big)”이라고 하는 단어를 씁니다. 좀 더 클 때, 영어로 “그레이트(Great)”라고 하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너무나 엄청나게 클 때는 “메가톤(Megation)”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오늘 본문에 메가톤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 메가톤급 광풍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꾸짖으시사 아주 잔잔해졌다. 

메갈레라고 하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메가톤급 고요가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메가톤급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메가톤 광풍을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메가톤 고요가 흘렀고 그 엄청난 사건을 보고 제자들은 메가톤 감격, 메가톤급 경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광풍이 클수록 고요도 클 것입니다.
고난이 클수록 위로도 클 것입니다.
아픔이 클수록 더욱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찬송가는 작사자 호례이쇼 G. 스패포드((Horatio G. Spafford) 교수의 엄청난 비극 속에서 탄생한 찬송가라 하여 “찬송가 속의 욥기”라고 부릅니다. 

그는 변호사요, 린드 대학교와 시카고 의과대학의 법리학 교수요, 신학교 이사 및 운영위원이며 무디 교회 회계집사였고 부동산 사업가였는데 1873년 이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에 시련이 닥쳤습니다. 화재로 집은 불타고 재산은 전부 잿더미로 바뀌어 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부인은 충격으로 인해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환경을 바꿔보라는 의사의권유로 병약한 아내의 휴양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출발하려고 여객선을 예약한 상태였지만 시카고의 대 화재로 자신의 집 뿐 아니라 그가 출석하던 무디교회도 잿더미가 된 것입니다. 

스패포드는 무디교회의 재정을 맡고 있었으므로 교회당 재건 때문에 그의 부인과 네 명의 딸이 먼저 여행을 떠나고 자신은 며칠 후에 뒤따라가기로 했습니다. 여객선은 일주일 동안 대서양을 순항하였으나 새벽 2시, 손님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그 여객선은 영국선적의 철갑선 '로키안'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2백26명의 선객을 실은 채 바다 속으로 침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고 직후 스패포드 부인은 네 아이를 이끌고 갑판 위로 달려 올라와 두려움 속에서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에 여객선은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30분도 채 못 되는 동안의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스패포드 부인은 익사하기 직전 실신한 채 구명정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4명의 아이들은 익사했습니다. 9일 후 스패포드 부인은 웨일스의 카디프에 도착하여 남편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혼자 구조됨‘ (Saved alone)'. 

소식을 들은 교인들이 찾아와 스패포드를 위로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게 어려운 고난이 닥쳐왔으나, 주님을 의지하게 되니 매우 기쁘다". 그는 아내를 데리러 서둘러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가 탄 배가 비극의 대서양 사고지점을 지나면서 그는 아픔과 슬픔으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3시경에 그는 일찍이 체험해보지 못한 평안이 그의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종이를 꺼내어 마음의 평안을 기록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스패포드는 유명한 작곡가인 블리스(Bliss,1838~1876)에게 자신의 찬송시를 보여주며 작곡을 부탁하여 이 유명한 찬송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스패포드는 1881년, 시카고에서 아주 떠나 예루살렘에 가서 한 수도원에 정착하여, 주의 사도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스패포드가 그 환란 중에서 체험한 평안을 세상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평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게 되는 것도 세상이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이기 때문입니다.

V.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살자

본문의 엄청난 기적 앞에 제자들의 마지막 물음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그분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당신과 함께 동행하십니다.

마지막 결론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 하나님의 사람들은 풍랑 한 복판에서도 평안하다. 
- 인생 풍랑을 만나는 이유는 그 풍랑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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