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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 2: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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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 2:22~38)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갓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의 한 말구유에 누이셨던 성탄절이 있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 날은 우리 모두에게 제일 유명한 날입니다.
하지만 그 날에 비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성탄절과 아주 가까운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날로서 성탄절 이후 40일이 지난 날이었습니다.
바로 이 날에 있었던 사건을 22절부터 24절에 기록하기를 "22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찼다"는 말은 당시 해산한 여인은 일정한 기간 동안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사실과 관련됩니다.
"모세의 법" 즉 레위기에 기록된 율법에 의하면, 여인이 사내아이를 출산한 경우 7일 동안은 부정했으며 그 후에도 33일 간은 집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 40일이 지난 다음에 일정한 희생제사를 드림으로써 비로소 해산 후의 부정으로부터 정결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희생 제물은 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 혹은 양 한 마리와 집비둘기 새끼 즉 "어린 반구" 한 마리였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경우에는 양 대신 비둘기 한 마리만 더 추가함으로써 그 희생제물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마리아의 결례를 위한 희생제사를 두고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은, 요셉 부부는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 택했던 후자의 제물로 제사를 드렸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날은 마리아의 결례의식 외에도 또 한 가지 중요한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치는 이른바 '초태생의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 이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처음 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하나님께 바치도록' 명하신 율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법적으로는 요셉과 마리아의 첫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제사도 드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그 초태생 희생 제물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민수기 18장 16절에 명시된 대로 '은 다섯 세겔'을 대신 바침으로써 "아기를 주께 드리는" 제사를 그날 함께 드렸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날은 요즘으로 치자면, 아기를 낳은 어머니가 해산 후에 몇 주간 집에서 몸을 푼 후에 약 한 달 만에 처음으로 그 아기를 데리고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많은 교인들이 그 귀여운 아기를 보면서 감탄하기도 하고 축하하기도 할 것인데, 이제 탄생한지 40일이 지난 우리 예수님에게도 바로 그런 날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 예수님을 성전에서 첫 대면하게 된 사람들 중에 그 아기 예수님을 범상치 않은 눈으로 본 사람들이 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아기 예수님을 여느 사람들이 으레 하듯이 그저 귀여워하는 눈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안목을 가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했던 말은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아기에게,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어른들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아주 신기한 말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노인들로서 한 명은 시므온이라는 할아버지였고 다른 한 명은 안나라는 할머니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게 되셨던 그 날, 오직 이 두 사람만이 그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고 지극히 기쁘게 반겼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곧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는 오늘 주일에 저와 여러분은 주신 말씀을 통하여 시므온과 안나가 그 아기 예수님을 반갑게 영접한 자세, 탄생하신 주님 앞에서 실로 동서고금 남녀노소 그 누구나 똑같이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원의 성취인 줄을 믿으면서 이 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25절부터 33절의 말씀에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시므온이란 할아버지에 대해서 본문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간략하게 소개했습니다.
'의롭다'는 말은 그가 사람을 대할 때 항상 바르게 처신했다는 뜻이며, '경건하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항상 바로 살아온 신전인격자였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시므온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는데, 이 '이스라엘의 위로'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달리 표현한 말입니다.
그는 이 메시아의 도래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메시아 즉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 시므온은 '초태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들어온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므온은 그 아기가 바로 자기가 죽기 전에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받았던 그리스도이심을 성령의 감동으로 곧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이제 자신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즉 이제 곧 죽어도 한이 없도록 자기에게 이런 큰 복을 누리게 해 주신 하나님께 찬송했습니다. 

그러면서 시므온은 말하기를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말했던 첫마디였습니다.
예수님은 곧 "주의 구원" 즉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시는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시므온은 자기가 개인적으로 받은 계시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이것이 자기에게만 주어진 약속을 성취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은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인 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구원이 "이스라엘의 위로"라고 해서 결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아님을 시므온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구원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시므온은 그 구원이 유대인을 벗어나서 이방인에게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해서 이스라엘 자체에 어떤 불명예스러운 일이 되는 것도 결코 아니라는 사실까지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처럼 이방인에게까지 이르게 된 구원이 바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그렇게 된 것이야말로 선민 이스라엘로서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찬송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나오는 할머니 선지자 안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보자마자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말했다고 했습니다.
이 '예루살렘의 구속됨' 역시 구약에 약속된 구세주 소망을 달리 표현한 말로서,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말과 똑같은 뜻입니다.
 
이처럼 시므온과 안나는 둘 다 아기 예수님을 바로 이런 공통된 심령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알았습니다.
그 아기 예수님을 볼 때, 그가 바로 '만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다른 그 어떤 사실보다도 제일 먼저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의 탄생은 결코 또 한 명의 평범한 아기의 출생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위인이나 천재의 탄생' 정도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이 예수님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구세주'로 오신 것을 확실히 깨닫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와 백성들의 빛이 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한 할아버지의 평생소원을 이루어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고통하는 만민들, 바로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참된 위로가 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아기 예수님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 땅의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던 구세주임을 믿고 맞이함으로써,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의 큰 구원을 직접 보게 된 것'을 두고 시므온처럼 뜨거운 감사의 찬송을 부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모든 사람들은 영생과 영벌로 나누어지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34절과 35절에 "34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그처럼 감사 감격의 찬송을 드렸던 시므온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뜻밖의 충격적인 예언을 했습니다.
  
그 아기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라고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 즉 '많은 사람들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함'이란,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멸망과 구원, 이 둘로 완전히 나누어지게 될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는 망하고 영벌에 떨어지게 될 것이며, 그를 영접하는 자는 죄에서 일어서게 되고 영생 부활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런 구원사역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서 예수님 자신은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당하실 수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진짜 메시아께서 당하실 필연적인 일 중에 하나가 바로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며...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사 53:3)가 될 것이라고 한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예수님의 수난은 마리아로 하여금 "칼이 마음을 찌르듯" 하는 심적 고통을 당하게 만드는 동시에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드러내게"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은 각 사람들의 생각 즉 그 심령에 있는 바를 정확하게 드러내게 만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처럼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생애를 보고 그것이 바로 자기 죄를 인하여 대신 당하신 고난인 것을 깨닫고 마음에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회개한 심령의 소유자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수난을 보고도 전혀 마음에 찔리는 아픔이 없다면 그 사람의 심령은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교만하고 악할 뿐인 것 역시 정확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탄생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바로 이 사실을 똑바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성자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화육강세는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높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나를 못 알아주니까 이래서는 안 되겠다."라고 하시면서 좀 더 높임을 받고 좀 더 많은 경외를 받고 싶으셔서 일부러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 쪽은 바로 우리 사람 쪽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예수님을 대하는 자세를 통하여 각자의 심령이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즉 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인하여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패하든지 흥하든지' 둘 중의 하나로 갈라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구세주께서 대신 당하신 고난을 보고도 끝까지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은 원래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망의 저주 속으로 완전히 '넘어지게' 될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이 성자께서 당한 고난이 바로 나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 앞에 아픔을 느끼면서 죄 가운데서 '일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심을 나타내는 자는 영생의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이렇게 볼 줄 모르면, 아무리 그저 귀엽게 보고 사랑스럽게 여긴다고 해도 다 헛일입니다.
그 평화롭고 아름다운 얼굴이 후에는 우리 죄를 위하여 가시관에 찔리시고 상하신 고난의 얼굴이 된 것을 우리는 반드시 볼 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아기 예수님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얼굴이며 또한 오직 택자들만이 볼 수 있는 '기묘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죄와 아무 상관없으신 순결한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셨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서 마치 '칼이 마음을 찌르는 듯한' 영적 충격을 느낄 줄 아는 신비한 성탄의 은혜를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한 후에 이 소식을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할 사명을 결단해야 합니다.

36절로 38절에 기록하기를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과부 된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안나라는 할머니는 84년을 과부로 살아왔습니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하자면 정말 외롭고 한 많은 인생을 살아온 할머니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안나는 그 평생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전에서 주거하며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성전의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또 그런 공식예배가 없는 시간에도 "주야에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섬긴" 즉 개인적인 경건생활 역시 한결같이 지키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을 하는 여선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할머니 역시 그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그녀 역시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누리게 된 복을 인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부터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곧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했다"고 했습니다.
즉 구약을 통하여 메시아 소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바로 이 아기 예수님이야말로 그 약속대로 오신 구세주임을 증거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안나 선지자의 평생에 최고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평생토록 성전을 중심으로 지켜 왔던 예배생활과 경건생활은 바로 그날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 '모든 사람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말하게' 됨으로써 최고의 정점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기 예수님에 대한 증거야말로 그녀가 여선지자로서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전해 왔던 그 어떤 말보다도 가장 귀한 말이 되었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안나뿐 아니라 첫 성탄절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외가 없이 또한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탄절이 주어진 목적 중에 하나도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로 그저 예배당 안에서 성탄축하예배에만 참석하고 끝나는 것은 성탄을 진정으로 맞이하는 자세가 결코 아닙니다.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으면 즉시 '베들레헴으로 달려가고' '동방으로 돌아가서'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데까지 갔다고 해서 성탄절을 다 지킨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수님은 나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을 위시하여 각 나라의 열방과 민족들의 죄를 구속하시려 오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나만 듣고 끝날 소식이 아니라 땅끝까지 이르러 온 세상 만민에게도 들려지게 만들어야만 할 소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무슨 절의 중처럼 도를 닦는답시고 골방에 틀어박혀 앉아 있는 따위를 두고 '경건생활'이라고 결코 자랑하지 않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아름다운 발'을 자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경건의 능력을 발휘하는 성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배시간마다 은혜를 받는 성도는 그 말씀을 통하여 약속된 '예루살렘의 구속'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증거하며, 진정 기도의 영이 충만한 성도는 한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간구와 함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모든 사람에게' 이 초림하신 구세주와 재림하실 심판주를 전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목도하게 된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동적으로 나타내게 되어 있는 이 반응, 곧 온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오신 '이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는 전도'의 사명을 특히 성탄절을 통하여 더욱 굳게 결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를 처음 보게 될 때의 반응이라는 것은 거의 다 같습니다.
그 어떤 아기라 해도 다 한없이 순결하고 아름답기만 합니다.
또 그 어떤 어른이라 해도 그런 아기들을 보게 되면 '참 귀엽기도 하네.'라든지 '어쩌면 이렇게 이쁘지?'라고 말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과 안나는 그런 일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할아버지와 할머니라도 그런 어린 아기를 보았으면 으레 나올 수 있는 말들이 정말 신기하게도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이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구원 언약의 성취'를 감사드리고 '구세주께서 당할 고난'을 벌써부터 느끼고 있었으며 '이 아기에 대하여 증거하는 사명'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아기가 생후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그런 '신기한 아기'가 되었던 것은 그 예수님이 실제로 '유일무이한 독생성자'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이 예수님의 탄생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습니까?
아기 예수님께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평화로운 모습이 예쁘게 인쇄된 성탄 카드를 인사차 여러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아기 잘도 잔다"라는 성탄 캐럴은 불신자들까지도 이맘때가 되면 누구나 다 흥얼거립니다.
  
선물과 파티만으로 성탄절을 지키는 사람들도 '아기 예수를 생각하며 서로 용서하고 서로 베풀어 주고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찾자.'라는 따위의 미사여구는 마치 입에 발려져 있는 형식적인 인사처럼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서로 나누고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그저 아기 예수님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얼굴만 잠깐 보고 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 딴에는 아기 예수님을 꽤 귀엽게(?) 맞이하고 있는 듯이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다른 아기라면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겠지만, 이 아기 예수님에게만큼은 결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자라면, 적어도 주님의 몸 되신 교회에 모여서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고 있는 기독신자라면, 이 아기 예수님을 보는 눈과 마음이 그저 '순결하고 귀여운 아기 하나를 대하는' 정도로 끝난대서야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이 바로 '구세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진정 이 땅에 태어난 그 어떤 아기보다 더욱 '아름다운 아기 예수님'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순결한 아기 예수님'께서 바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고난의 종'이 되셨음을 깨달아야 우리는 이 주님 탄생을 통하여 참된 '사랑과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탄생을 바로 이와 같이 자신이 먼저 영접하고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가운데 또한 온 세상을 향하여 '이 아기에 대하여 소리 높여 전파함'으로써 이 성탄절을 더욱 큰 은혜와 축복 가운데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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