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인의 후예들과 도시문명 (창 4:16~26)

  • 잡초 잡초
  • 460
  • 0

첨부 1


가인의 후예들과 도시문명 (창 4:16~26)


창세기 4:16-26
(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가인이 성을 쌓고

현대 문화를 특징짓는 현상중 하나는 도시화입니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모두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공장을 돌리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린 곳에는 많은 소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장사가 됩니다. 도시는 효율적이고 다양한 계층과 성향의 사람들이 살기에 문화 또한 다양하고 고급문화가 가능합니다. 여기에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지역에 몰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줍니다. 엘리베이터가 없고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고층건물이 설 수 없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농촌은 비기 시작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고 자녀들이 없어 학교가 폐교가 되기도 합니다. 한국사회의 2008년 도시화율은 90.5%입니다. 1970년대만 해도 도시화율은 50%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도시화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수도권으로 많은 인구가 몰리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구의 절반가까이가 좁은 수도권에 몰려삽니다.

제가 도시에 대한 언급을 하는 이유는 17절의 ‘가인이 성을 쌓고’라는 문장 때문입니다. 영어 성경들은 성을 곧 ‘city'(도시)를 만들었다고 번역합니다. 가인과 그의 후예들은 인류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입니다. 20절 이하에 보면 가인의 칠대 손들인 라멕의 아들 야발은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고, 그 형제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은 모든 자, 곧 예술과 문화의 조상이 되었으며,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 곧 기계문명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도시화가 좋은 거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성서는 도시화에 대해서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창세기 11장입니다. 바벨탑을 쌓는 장면이 나오는데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은 이유를 성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11:4) 인간들이 한데 뭉쳐서 하나님께 대항하려 합니다. 고대 제국의 역사들이 그러합니다. 

대제국을 이루면 인간들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우상의 체제를 만들었고 이웃과 평등하게 사는 형제공동체가 아니라 왕과 귀족 중심의 소수 억압체제를 만듭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그들을 흩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제국을 이루지 못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몰려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또한 도시를 싫어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주님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도시 예루살렘을 배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 촌과 해변가를 돌아다니시면서 말씀을 전하시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단 한 번의 기적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 기적을 행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예수님 말씀대로 그것이 말라버린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대략 일주일 정도 머무셨지만 예루살렘에서 주무신 적은 없습니다. 

인근 베다니에서만 잠을 주무실 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자칭 의인들이라 칭하는 자들과 권력자들의 도시였으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악의 상징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시는 항상 권력의 욕망을 가진 자들이 몰려들고 그래서 진리를 대적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시를 싫어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핵심인 성전에 들어가 “너희가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하시며 채찍으로 장사치들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도시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적으면 가족 같습니다. 그 사정을 알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수가 커지면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하면 비효율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언제 다 마주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가진 일부분만 보며 지나치듯이 봅니다. 한 사람의 음성보다는 숫자와 집단으로 상대하게 됩니다. 도시의 목적은 사귐이나 삶보다는 효율성과 물질의 획득입니다. 그래서 도시 사람들은 각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보기 어렵지만 옛날 농촌 사람들은 정말 순박하고 인정이 있었습니다. 숫자가 작아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크기는 교회에도 문제가 됩니다. 교회는 사랑, 한 몸이라는 유기체, 작은 소자에 대한 관심 등이 본질입니다. 지금은 우리 교회는 숫자가 적으니까 모든 사람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숫자가 어느 정도 커지기 시작하면 서로 모르게 됩니다. 현대 교회는 도시화의 영향 때문에, 또 선교적 필요라는 이유로 대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목회자의 눈에 한 사람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집단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몇몇 사람 외에는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서로를 모르는 타인이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 수직적 관계만 형성되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는 없습니다. 성서는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의 회복 없이는 수직적 관계도 온전하지 않다고 누누이 강조합니다. 성서는 큰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도 크기에 대해서 주의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크기에 대한 반성이 부족합니다. 무조건 큰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에는 대형교회와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중소형교회만이 존재합니다. 큰 것은 효율적이고 영향력이 많으며, 많은 영혼을 구원한다는 논리로 대형교회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교회의 본질인 사랑이나 공동체성, 유기체성을 잃고 있습니다. 

또 도시가 그렇듯이 큰 것을 추구하는 것에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교묘히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고 그 안에는 인간의 냄새만 물씬 풍깁니다. 크기를 추구하면서 교회는 거룩성이 상실되고 경영 기법과 인간적 욕심과 술수가 판치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로서 어느 정도 크기가 가장 적당한지 크기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놋(유리함) 땅에 거하였더니

가인과 그 후예들이 만든 도시 문화에 대해서 좀 더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가인이 도시를 만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불안 때문입니다. 동생 아벨을 죽였던 가인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합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내린 저주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이었고, 가인 또한 14절에서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며 불안함을 고백합니다. 16절에 가인이 거한 에덴 동쪽을 ‘놋’ 땅이라 부르는데 이 ‘놋’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12절과 14절의 ‘유리한다’는 단어와 같습니다. 가인이 도시를 만든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성을 쌓고 그 안에 꼭꼭 숨어 있으려 합니다. 자기들끼리 한데 뭉쳐 위험을 피하려는 시도입니다.

현대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안에도 이 불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입는 옷, 먹는 반찬, 향락과 문화 수준들은 옛날 왕후장상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의료시설도 발달하고 편리해서 큰 병 걸리지 않고 오래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옛날 사람들보다 더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불안의 그림자들을 안고 있습니다. 안전한 조직사회에서 소외될 것 같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오늘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곳곳에 CCTV를 설치하고 경찰제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발달되어 있지만 우리는 불안해서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합니다. 집과 학원과 학교 몇몇 안전한 곳 외에 다른 곳은 마치 밀림처럼 위험한 곳이 되었습니다. 안전한 곳에서도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차라리 가난했지만 옛날 시골에서 마음 놓고 뛰놀던 때가 더 자유롭고, 불안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가인이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4절에서 밝히는 대로 하나님 앞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하나님의 보호해주시는 손길이 없이 홀로 자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시121:5-6)하는 인생하고 자기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인생은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그래서 가인은 성을 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하며 인생의 필요를 하나님께 맡길 줄 아는 인생에 비해 자기 손으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인생은 얼마나 불안합니까?

오늘 읽은 4장 23절과 24절에는 일명 칼의 노래라는 라멕의 노래가 있습니다.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매우 폭력적이고 보복적인 노래입니다. 자기를 조금이라도 건들면 그들의 목숨을 빼앗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7배의 복수를 하시겠다고 하며 표를 주었는데 라멕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에게는 77배의 복수를 스스로 하겠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매우 강한 척 하지만 실상 속에 있는 불안감의 반영입니다. 

연약한 동물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자기 몸집을 키우거나 가시를 세워 공격적으로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폭력정치를 통해서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정말 강한 사람은 부드럽습니다. 모든 것을 포용합니다. 그러고도 휩쓸리지 않고 이끌어갈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독재정치보다 강한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두려움 없고 정당성이 있기에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설득할 수 있고, 어떤 힘이든 함께 연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있는 인생하고 하나님 없는 인생은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얼굴만 보아도 그가 신앙인이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그 얼굴에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며, 욕망에 집착하지 않고 더 영원한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 중에서도 그 얼굴에 평화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 걱정과 염려에 시달리고, 또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교회 안에 있어도 불안합니다.    

가인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또한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라멕도 그렇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죽일 것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더 성을 쌓고 더 폭력적이 되어 갑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선합니다. 비록 좀 훼손되기는 했지만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사랑이 있습니다. 충분히 신뢰할 만합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의 감정은 사회생활에 매우 필요합니다. 지도자가 사람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일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신뢰해야 편하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학에서는 신뢰성을 매우 중시합니다. 기독교교육학자 글리슨은 인간의 발달 단계에서 가져야 할 중요한 8단계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 첫단계가 바로 신뢰감이었습니다. 신뢰감은 비교적 어린 시기에 결정이 됩니다. 예컨대 자녀들이 응아를 하거나 배가 고파서 울 때 이에 대해서 잘 처리해주면 아이들은 신뢰감을 갖게 됩니다. 세상은 믿을 만하다는 의식이 싹트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대응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세상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되고 자기중심성 속에 사로잡힙니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동네에 제법 재산을 모았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에게는 여덟 살 난 아들밖에 없었습니다. 이 분은 주위 친척이나 이웃들이 이 재산을 아이에게서 빼앗아 갈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유언하기를 “어떤 사람도 믿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너에게 친절히 대하는 사람은 도둑일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재차 강조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아버지의 유언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재산은 지킬 수 있었지만 그 삶은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 주변에는 친구나 친척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결혼했지만 그 가정도 불행했습니다. 아내도 믿지 못하고 자녀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자녀와 아내 모두가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믿지 말라는 한 마디가 그 삶에서 평화와 행복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세상은 충분히 사랑할만하며 세상은 충분히 믿을 만합니다. 우리가 인간에 대한 신뢰성을 가질 때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가인이 만든 도시는 욕망으로 가득한 세계였습니다. 라멕 대에 와서는 이제 일부일처제를 벗어나 두 아내를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 야발은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은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고,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가 되었습니다. 산업과 예술과 기술이 가인의 후예들을 통하여 꽃피워진 것입니다.   

도시는 욕망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라멕의 자녀들은 문명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셋의 후예들보다 가인의 후예들이 더 발달한 문명을 일으켰습니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신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흔히 헝그리 정신을 말합니다. 배가 고파야 눈에서 불똥이 튀고 그래서 악착같이 일하고 돈을 벌 것입니다. 불편을 느껴야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경쟁하고 도태되어야 강한 것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단지 감사하고 만족하고 형제사랑을 외치는 사람은 발전을 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세상에서는 매우 허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실제 신앙이 우위에 있던 중세시대에 과학기술이나 문명은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종교의 권위에서 해방되어 이성이 마음껏 활개를 치기 시작한 19, 20세기에 와서야 과학과 문명은 급속도록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으로 제약받던 물질에 대한 탐욕이 풀리면서 엄청난 부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제1차와 2차에 걸친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이제 인류는 핵무기의 위협이라는 새로운 불안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물질문명은 발달했지만 인간의 공허감과 불안감은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동양적 선이나 명상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물질에 따른 탐욕적 삶이 다가 아니라고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물질 중심의 삶, 크기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도시적 삶에 대항하는 다른 정신적 가치를 제공해주어야 하지만 현대 기독교도 가인의 후예들의 문화에 포섭되어 버린 듯합니다. 사실 자본주의 발달에는 기독교 프로테스탄트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청교도들은 게으르지 않고 근면 성실하여 자기 사업이나 일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경건과 같은 중요한 신앙적 가치로 높였습니다. 직업은 영어로 ‘calling’인데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달리는 ‘vocation’이라는 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부르다’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업가나 세속 직업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을 ‘세속 수도사’라 부를 정도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청교도 목사 리처드 백스터는 부의 추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어떤 방법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데도, 여러분이 이 방법을 거부하고 이익이 적은 방법을 택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명 가운데 하나를 거스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여 하느님이 요구하실 때 하나님을 위해 그 은총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육체와 죄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여러분은 부자가 되려고 힘써도 된다.”

이런 정신이 자본주의를 발달시켰고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 사회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선에 대해서도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철강 왕 카네기는 자선과 기부로 유명하지만 그는 게으름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른 바 자선 행위에 쓰는 1,000달러 가운데 950달러는 차라리 바다에 버리리는 것이 낫다. 자선으로 먹여 살리는 주정뱅이 부랑자 또는 무익한 게으름뱅이 하나하나가 이웃을 부도덕하게 감염시킨다.”

성서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였지만 청교도들은 부자를 경건한 수도사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자본주의의 탐욕과 결합하면서부터입니다. 사람들의 물질적 욕심이 이제는 합법성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독교마저도 물질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은 이제 신이 되었습니다. 물질이 없다는 것은 단지 불편한 정도만이 아니라 무능력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더 나아가 신앙적 차원을 결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물질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진 자처럼 느껴집니다.

최근에 한국교회에서는 『깨끗한 부자』논쟁이 있었습니다. 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정당하게 벌어서 선하게 사용하는 청교도적 부자는 분명 성서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자기만 알며 부의 획득 과정이 건전하지 못한 부자들이 많은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깨끗한 부자가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도 또 사회의 발전에도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사회의 현실입니다. 

모두가 물질을 향해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우리 사회에서 깨끗한 부자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욕망을 또 한 번 합리화시켜주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물질적 가치 외에 사랑이나 섬김이나 자족이나 공동체나 영혼의 평안이나 순결이나 비움이나 가난이나 겸손이나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나 기타 다른 여러 가치들이 소중함을 함께 역설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인간에게 참 행복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 지금처럼 물질중심의 사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드는 생각은 중세 사회를 다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중세를 암흑기라 합니다. 그러나 이성에서는 암흑기였다 할지모르지만 영성이나 삶의 다양성과 질이라는 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의 신학이 대표적입니다. 어거스틴은  신앙인의 두 가지 실존에 대해서 처음으로 신학적으로 언급했던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은 역작 『신의 도성』을 썼습니다. 이 책은 로마가 기울어가는 과정에서 쓴 책입니다. 

로마인들은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가 되었는데 불구하고 왜 로마가 이민족의 침입에 의해서 쇠퇴해져가는지 불만을 표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해서 기독교를 변론하였는데 그는 기독교의 목표는 이 땅의 도성의 건설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목표가 있음을 밝혔습니다. 

두 나라는 삶의 양식이 다릅니다. 로마인들은 돈을 모으고, 별장을 짓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기독교는 이것을 하찮게 여긴다고 어거스틴은 말하였습니다.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과 자선을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삶이 신에게 인정되는 삶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이는 성서에서 주장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도성에서는 왕일지라도 천국에서는 하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14세기에 나온 단테의 『신곡』이란 책도 재미있는데 이 책은 지옥과 연옥 천국 여행담에 대한 기록입니다. 지옥은 모두 9층 17개의 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각 원에 해당하는 죄구들이 벌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배교자와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에서 이름이 높았고 권력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장군, 시인, 황제, 주교, 교황, 사업가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끓는 피가 흐르는 곳에 눈썹까지 잠겨 고통을 겪습니다. 

이런 모습 속에는 물질과 욕망의 추구에 대한 경계를 담고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물질적인 방식을 떠나 다른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서 또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듯이 물질적 욕망을 좇아 산 사람이 지옥에 가게 된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물질적 욕망만을 위해서 사는 삶에 대해서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삶은 다양합니다. 세상을 부자와 가난한 자로만 나눌 수 없습니다. 꼭 물질적 발전과 성장이 좋은 것입니까? 그냥 자연과 어울려 사는 것은 안 됩니까? 부자가 되는 것보다 자신의 인격 성장과 평화를 위해서는 살 수 없는 것입니까? 내 영혼의 순결함을 위하여 나를 비우고 가난하게 되며 섬기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은 우리 삶이 일시적인 이 땅에 머무는 것을 경계할 뿐만 아니라 경고까지 합니다.  

아벨의 후예들

가인의 후예의 대척점에 아벨의 후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습니다. 26절에서는 셋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단지 여호와를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삶을 살았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가인의 후예들이 만든 도시적 삶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불안이 그들의 인생의 기초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도시의 욕망을 좇아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영원한 세계를 보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다양한 가치들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의 일시적인 것보다 정말 천국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라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 아벨의 후예들로서 비록 가인의 도시에 살고 있지만 하늘나라 시민으로서 신의 도성을 향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