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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1%의 순종이 만드는 기적 (왕상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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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순종이 만드는 기적 (왕상 17:8~16)


우리는 지난 주 추수감사주일을 보냈습니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요 감사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세 가지임을 배웠습니다. 에벤에셀, 임마누엘, 여호와 이레입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우리를 도와주셨고,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며, 앞으로 모든 삶의 구석구석까지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취감사, 절대감사, 전전후감사의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우쩨 이런일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너무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 해도 해도 너무 하십니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혹시 이 예배의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도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는 분도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어떻게 저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아마 따지고 싶은 마음이 계신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하실 때가 있습니다. 적어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요구는 어떻습니까? 해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런 것이니 괜찮은 것입니까? 그것은 결과가 그랬다는 것이지 당사자인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해도 너무하신 요구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런 차원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이 임합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훈련하십니다. 엘리야는 삼 년 가뭄을 예언하고 요단 앞의 그릿 시냇가에서 시냇물을 마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서 보내 주시는 떡과 고기를 먹고 지냅니다.
 
얼마 후 시냇물마저 말라 들어가자, 하나님은 한 과부에게 가서 식생활을 해결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사르밧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사는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녀는 엘리야가 사르밧에 갔을 때 나뭇가지를 줍고 있습니다. 그녀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전부는 가루 한 움큼과 병에 조금 남아 있는 기름뿐입니다. 극심한 가뭄에 더 이상 버틸 기운이 없어서 생명처럼 아껴 두었던 마지막 남은 한 가루 한 움큼으로 최후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 있는 여인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아무리 봐도 초라하기 모습이라 처음에는 ‘물을 조금 달라’고 합니다. 다시 용기를 내어 ‘떡 한 조각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인의 대답은 ‘만들어 먹고 죽을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는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요구하는 엘리야의 편에서 보면 왜 하필이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최후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음을 기다리려고 하는 한 과부의의 집으로 인도하셨는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좀 넉넉한 집으로 보냈더라면 엘리야의 입장이나 요청받는 입장도 곤란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가뭄이 심하여 견디다 못해 비장한 마음으로 마지막 음식을 만들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나타나서 하는 말이 ‘물 좀 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먼저 자기를 위하여 음식을 만들라’고 하니 정말 해도 너무 한 상황입니다. 그것은 대접이 아닌 죽음을 강요하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입니다.

이 상황은 엘리야 선지자나 홀로 사는 여인 두 사람 모두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엘리야 선지자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하나님의 선지자이고, 주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지만 상황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형편이 좋은 집을 찾아가서 오히려 그 여인을 살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다함께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과연 그런 상황에 직면해 있다면 이렇게 담대하게 명령을 할 수 있을까? 저는 성격적으로나 믿음으로나 엘리야처럼 말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나님! 저는 도저히 제 양심상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제가 굶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정이 있고, 합리적 생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믿음의 태도는 아닙니다. 믿음의 기준은 내 양심이나 정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내 의지나 결단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기준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그대로 전하는 것이 선지자의 역할이요 주의 종의 사명입니다. 주님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하면 서고, 전하라하면 그대로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사명입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한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환경이나 사람에게 매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의 명령하신 대로 순종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순종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사렙다 과부의 믿음과 순종, 헌신의 태도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이니까 그렇다쳐도 이 여인은 극심한 가뭄 속에서 아들과 함께 굶어죽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이야기로 들으면 그럴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 자신의 문제라면 정말 순종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먼저 엘리야 선지자에게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줍니다. 

사렙다 과부의 입장에서 작은 떡 한 개는 목숨입니다. 자신과 아들의 생명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1%의 희망이 바로 가루 한 웅큼과 바닥이 보이는 기름조금입니다. 100개 가운데 한 개 드리는 것은 맘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과 같은 1개를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준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여인은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14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아멘!
 
여인은 엘리야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1%의 자신의 희망마져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그 마지막 1%의 양식을 드린 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을 만듭니다. 16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아멘!
 사르밧 여인의 1%의 순종의 믿음이 바닥나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만듭니다. 그러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의 말씀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약한 자를 귀하게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시에 부요한 집, 권세 있는 집에 엘리야를 보내서 대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위기의 상황에서, 아무런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보잘 것 없고, 미련해 보이는 자를 통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부한 자나, 권세 있는 자나, 많이 배운 엘리트만이 인정받고 대접받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어느 정도는 이것이 사실로 보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미련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를 통하여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믿으십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실 때도 세상의 엘리트를 뽑지 않았습니다. 학식이 풍부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자녀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에 가장 미련하고 배우지 못한 어부들과 천대받는 세리를 택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약한 자들을 통하여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천한 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을 통해서 강하고 권세 있는 자들을 폐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약한 나를 통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통하여 부자를 부끄럽게도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잘난 사람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못나고 가난한 사람들을 들어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지금도 연약한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부족하고 미련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 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함께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 드리기 원합니다.

♪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

내가 지금 약하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남보다 많이 배우지 못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가난한 나를 부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영적 맹인과 같은 나를 어루만지셔서 다시 보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요 축복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먼저 순종하는 믿음을 보신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얼마든지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2700년 전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이루어집니다. 오늘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왜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기적들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 비밀을 푸는 열쇠는 바로 ‘먼저’ 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 협상을 시도하거나 거래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해주시면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먼저 축복해 주시지요.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협상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의 거래는 통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전지전능하신 분과 상업적인 거래(Deal)를 통해서 내 이익을 얻어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자신들이 먼저 순종하는 믿음을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우리를 건져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축복의 삶, 기적의 삶은 내가 먼저 주님께 믿음을 드리고, 자신을 드릴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first)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먼저의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손에 붙잡고 있는 1%의 마지막 양식 그것을 먼저 내게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바로 마지막 1%의 그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내가 내려놓을 수 없는 바로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인 1%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것을 먼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순종의 믿음이 바로 기적을 일으킵니다.

어느 교회에서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마음만 뜨겁지 교인들의 가슴은 여전히 냉냉합니다. 이때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감동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시장에서 광주리 장사를 하던 여인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목사님께 찾아왔습니다. 성전 건축을 위해서 전 재산을 다 바치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녀의 가정생활 형편을 잘 아시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도님! 예수를 믿어도 이렇게 믿으면 안됩니다. 전 재산을 다 바치면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요. 안됩니다. 이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만류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 성도님은 목사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받아주세요.” 목사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 재산을 건축헌금으로 드리고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면서 그녀는 이상하게도 감격에 넘쳐 찬송과 감사가 쏟아져 나옴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길목에 어떤 아이가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면서 사람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가서 기도해 주어라. 가서 기도해 주어라.” 너무나 뚜렷하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기도했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 받은 아이가 즉시로 나았습니다. 할렐루야!

그 뒤로 그 성도님이 기도해 주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났고습니다. 기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녀에게 기도를 받는 자마다 모두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가 한국교회 치유은사의 어머니로 살다 하나님 앞에 간 고 현신애 권사입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순종이 바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잉태하게 한 것입니다. 

‘JOY’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기쁨’ 이란 선교단체인데 그 이름이 의미심장합니다. 영어의 첫 글자를 조합해서 만든 단체입니다. J는 Jesus first! O는 Others second! Y는 You third!입니다. 예수님을 제일 먼저, 이웃을 두 번째로, 자신을 세 번째로 두고 헌신하자는 선교단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첫째는 무엇입니까? 내가 첫째고, 예수님이 가장 마지막은 아닌지요? 내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1%를 먼저 주님의 손에 올려드리는 순종의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기적은 오늘도 임할 줄 믿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바닥나지 않는 축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에는 놀라운 뜻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믿음을 한 번 테스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순종할 때 언제나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렸을 때 여호와 이레의 역사가 임합니다. 밤하늘의 별과같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창대케 하시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복덩이가 되게 하십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관을 벗어버리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 손에 지팡이를 들려주십니다. 그것은 막대기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 홍해를 갈랐습니다. 반석을 치면 물이 솟는 기적이 임합니다. 출애굽을 이끄는 지도자가 됩니다.
 
기도의 여인 한나는 눈물로 얻은 사무엘을 나실인의 서원으로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 결과 가장 영적으로 어둔 밤과 같았던 사사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위대한 지도자가 됩니다. 오늘 사렙다 과부의 생명을 건 순종의 신앙은 바닥이 나지 않는 놀라운 기적이 임합니다.

불란서에 레오날드 우드경(Sir. Leonard Wood)이 어느 날 왕의 초대를 받아 왕궁에 들어갔더니 반가워하며 내일 식사나 같이 하자고 초대를 했습니다. 레오날드 경은 다음날 왕궁에 들어갔더니 왜 왔느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저를 식사에 초대해서 왔습니다.”고 했더니 왕이 말하기를 “어제 식사에 초대할 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서 안 오는 줄 알았소.” 이 때 이런 명언을 말합니다.
“폐하! 왕의 초대에는 대답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A King's invitation is never to be answered, but to be obeyed.)

왕의 명령 앞에 충성된 신하는 Yes, No가 필요 없습니다. 왕이 말하면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태도가 바로 레오날드 우드경의 대답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대답이 필요없습니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대에 응답하는 자는 왕의 잔치 자리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이나 판단 때문에 1%를 내려놓지 못하면 그 삶은 계속되는 가뭄과 기근 속에서 고생하게 됩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 빛납니다. 험난한 항구일수록 등대는 더 빛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사렙다 과부의 현실처럼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나의 소중한 것을 붙잡고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붙잡고 있는 줄은 썩은 줄입니다. 고무줄일 수 있습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언젠가는 끊어집니다. 그러나 내 줄을 먼저 내려놓고 주님이 주신 줄을 붙잡으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만사가 형통한 길로 인도받습니다.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축복이 임합니다. 오늘 1%의 마지막 남은 양식을 먼저 드리는 순종으로 여러분의 지혜가 바닥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이 바닥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재물이 바닥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지금 약하다고, 어렵다고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내게 남겨주신 1%의 희망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1%를 먼저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바로 그 곳에 99%의 바닥이 나지 않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 1%의 순종이 하늘의 보고를 여는 축복의 열쇠가 되어 차고 넘치는 풍성한 기적으로 나타날 줄 믿습니다. 

다시 한번 약한 나로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며 나갑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 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후렴)

내가 건너야 할 강 거기서 내 죄 씻겼네 이제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해 흐르네 
깊은 강에서 주가 나를 일으키셨도다 구원의 노래 부르리 예수 자유 주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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