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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개를 통한 기다림 (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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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를 통한 기다림 (계 3:14~22)


‘골프 황제’라고 불리는 타이거 우즈가 스캔들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맞아 이가 부러졌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골프채로 두들겨 맞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우즈는 지금까지 모범적인 가장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스웨덴의 세계적인 톱 모델을 아내로 맞아 2명의 자녀를 낳고 화목하게 사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뒷면의 삶은 겉과는 전혀 다른 추한 모습이었습니다. 

뉴욕 타임즈의 컬럼니스트는 ‘우리는 그가 타이거인줄 알았었는데 타이거 가면을 쓴 치타였다’라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어느 네티즌은 ‘우즈는 골프할 줄 아는 개’라고 표현했습니다. 지금까지 우즈와 성적인 관계를 맺은 여인이 10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흑인 사회에서는 우즈가 성관계를 맺은 여인들이 모두 백인 여성들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을 받았다고 비판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세상의 가치이고 정신의 수준이구나 하는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우즈는 사람들과 카메라 앞에서는 아내와 아이들과 화목한 모습으로 활짝 웃으며 매우 가정적이고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가정과 가족에게 수치와 모멸감을 주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우즈 부부와 가정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을 진정한 부부이고, 진정한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 부부의 관계는 단절된 상태는 아니지만 진정한 교제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저의 집사람이 남의 이야기 하지 말고 우리 부부와 우리 가정이나 걱정하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만 타이거 우즈 부부는 부부로서의 삶의 내용은 없고 무늬만 부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부부가 한 가정 안에 살면서도 남남처럼 살아가고 서로에게서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없는 비극적인 이중성의 모습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생활에서는 전혀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력을 받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님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다 합니다. 약간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불편할 뿐입니다. 이러한 양심의 불편함 때문에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지 못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거나 더 멀어집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는 아니지만 깊은 관계는 맺지를 못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 20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모습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에게 문을 열어 집안으로 모시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거절하여 쫓아 버리지도 않습니다. 안으로 모시겠다는 것인지 멀리하겠다는 것인지 아주 어정쩡한 태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맺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를 단절해 멀리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마음 중심으로 모시는 것도 아닙니다. 문밖에 세워두는 정도의 관계만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랑 없이 한 지붕 아래서 함께 기거하는 부부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뜨뜻미지근한 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15절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라오디게아 도시 가까운 곳에 유명한 온천지대인 히에라볼리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그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온천수가 7-9 킬로미터를 흘러 라오디게아 도시로 들어오는 동안 뜨거운 온천수가 식어서 미지근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물질 등으로 오염되어 온천수로도 사용할 수도 없고 식수로 사용할 수도 없는 물이 되었습니다. 그 물을 입에 넣으면 토해 버릴 수 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바로 이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천물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 입에서 토해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어떻게 시작된 교회인지를 알면 이 말씀의 의미가 더 깊어집니다. 본래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라는 여인의 집에서 가정 교회로 시작된 교회였습니다. 골로새서 4장 15절을 보면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소수의 사람들이 눔바라는 여인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예배당이 없어 가정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그들은 예배당도 마련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온천과 피복 사업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성도들이 많아지면서 교회도 자연히 재정적으로 풍부해졌습니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으로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기 시작하며 영적인 힘을 잃어갔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힘과 모양만을 자랑하며 서로 높아지는 데만 신경을 썼습니다.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본문 17절의 말씀을 통해 그들의 영적 상태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17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이 육적으로는, 외형적으로는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영적인 세계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으로 얼마나 병든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진단하신 후에 18, 19절에서 처방전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서 가장 강조하시는 말씀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회개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죄와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단 거부감을 갖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을 들으면 수긍하며 받아들이기 보다는 일단은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자존심을 상해합니다. 그러나 회개라는 단어의 의미와 정신을 보면 회개는 부정적인 단어가 아닌 매우 긍정적인 단어입니다. 아픔의 단어가 아닌 치유의 단어입니다. 세례 요한의 첫 번째 설교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도록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담을 수 있는 깨끗한 믿음의 그릇이 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생활 속에 상하고 찢긴 상처들과 온갖 감정과 욕망의 쓰레기들이 가득 쌓여 있으면 그곳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내 삶의 자리를 거룩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책망과 꾸중이 아닌 치유와 회복, 위로를 위한 것입니다. 

집에 손님이 왔을 때 음식을 그릇에 담아 대접하게 됩니다. 그 때 아무리 좋은 그릇이 있다 하더라고 그릇이 더러우면 그 그릇에 음식을 담아 내놓지를 않습니다. 조금 모양이 예쁘지 않더라도 깨끗한 그릇에 음식을 담아 손님을 대접합니다. 하나님은 좋은 재료로 만들어진 그릇을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찾으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그릇에 비유한다면 그들은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그릇입니다. 그러나 온갖 더러운 것으로 얼룩져서 음식을 담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더럽혀지고 얼룩져 있어 음식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금으로, 은으로 만들어졌다는 것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그런 모습을 보시고 그릇의 재료를 자랑하지 말고 주인이 언제든지 쓸 수 있는 깨끗한 그릇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언제든지 사용하실 수 있는 깨끗한 그릇이 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치유와 은혜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감 있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대림절 셋째 주간을 맞이합니다. 인류를 구워하기 위해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맞이 하기 위해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우리들이 취해야 할 첫 번째 자세는 거룩함입니다. 거룩하신 아기 예수님을 내 마음과 가정,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 모실 수 있도록 삶의 자리를 거룩하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삶에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그것을 바르게 세우는 것입니다. 

무너진 부분이 있으면 수리하고 보수해서 바르게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대림절의 기다림 안에는 진정한 회개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 아닙니다. 회개의 목표는 회복입니다. 회개라는 단어에 담겨 있는 중요한 시간 개념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입니다. 과거에 했던 회개가 아닌 미래에 할 회개가 아닌 오늘의 회개가 있을 때 그 곳에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는 현재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매우 진지하게 다루셨습니다. ‘오늘’ 즉 ‘현재’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좌우에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강도가 예수님을 향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해 보라’ 고 비난하며 조롱합니다. 반면에 다른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강도를 행해 ‘우리의 죽음은 우리가 행한 악한 일의 결과지만 이 사람이 당하는 고난과 죽음은 정당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행한 일 가운데 옳지 않은 일이 없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간구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선포하십니다. ‘오늘’이라는 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현재’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느냐에 따라 한 사람은 천국으로 인도되고, 한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미래는 한 순간에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오늘의 모습에 의해 미래가 달라집니다. 오늘을 쉽게 생각하며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거는 history입니다. 미래는 mystery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현재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을 의미 있게 살지 못하면 과거와 미래, 모두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요.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한다고 온 세상이 떠들썩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10년이라는 10의 단위가 바뀌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생애 가운데 수십 번의 성탄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몇 번의 성탄절을 더 보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맞이하는 2009년의 성탄절입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경건하게 맞이하는 성탄절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깨끗하고 거룩한 우리의 영혼과 가정, 그리고 우리 사회와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회개를 통해 우리 영혼을 청소합시다. 회개를 통해 우리 가정을 청소합니다. 회개를 통해 우리 삶의 자리와 교회를 청소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곳은 회개함으로 거룩하게 청소하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를 회개함으로 거룩하게 세우는 대림절 셋째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몇 년 전에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라는 책으로 21세기 패러다임 쉬프트에 큰 영향을 준 스펜서 존슨이 또 하나의 책을 써서 많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은 ‘선물’입니다. 영어로 ‘선물’은 ‘Present’입니다. Present는 현재라는 뜻도 될 수 있고 선물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현재야 말로 가장 큰 선물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을 하나님 안에서 가장 축복된 ‘선물’로 맞이할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2009년도 성탄절이 하나님의 축복된 선물임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 가운데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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