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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서주일] 말씀을 길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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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주일] 말씀을 길로 삼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경청되지 않는 말씀

대설을 지나 동지를 향해 가는 지금, 우리는 대림절의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님을 모실 준비는 잘 하고 계신지요? 오늘은 또 한국교회가 성서주일로 지키는 날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참 아이러니한 운명의 책입니다. 가장 많이 팔렸지만 가장 경청되지 않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되면 신자들은 ‘올해는 기필코 성경을 한 번 읽으리라’ 다짐하지만, 그런 장한 결심은 3월을 넘기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래서인가요? 교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성경은 창세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늘 시작은 거기서부터 하니까요.

교우 가운데 성경을 매일 일과처럼 쓰는 이들이 몇 분 계십니다. 노트에 꼼꼼하게 적는 이도 있고, 컴퓨터로 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자판을 두드리는 행위 그 자체에 빠져 성경을 묵상하고 그 말씀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교역자회의가 있어서 효창교회에 갔더니, 교회 전면에 “일생의 도전 ‘성경 필사’”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베껴 씀’을 뜻하는 ‘필사筆寫’라는 단어가 제게는 ‘죽도록 힘을 쓴다’는 뜻의 ‘필사必死’처럼 보였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다부진 결의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가리켜 ‘캐논’(canon)이라고도 합니다. 이 말은 ‘재는 막대’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성경은 참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 늘 척도로 삼아야 하는 말씀이라는 뜻일 겁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길’을 잃기 일쑤입니다. 사람다움의 길 말입니다. 눈길을 끄는 것들이 많기에 우리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삽니다. 다섯 가지 색이 눈을 멀게 한다는 옛말처럼 우리는 화려한 것들에 정신이 팔려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두리번거리는 또 다른 이유는 두려움입니다. 누가 내게 해꼬지를 하지 않을까, 손해를 입히지 않을까 늘 경계하며 사니 심신이 고달픕니다. 그러다가 마음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립니다. 낯선 길을 갈 때 가끔 멈추어 서서 지도를 들여다보는 여행자들처럼, 우리도 가던 길 멈추고 지도를 살펴야 합니다. 성인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하늘에 비추어 보는’(照之於天)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지도이고 거울입니다.

성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그 이야기는 먼 옛날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과 거기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곧 하늘에 우리 삶을 비추어보는 일입니다. 말씀을 맛보고, 음미하는 동안 우리는 성경 이야기의 일부분이 됩니다. 

우리는 풍랑이 이는 호수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제자가 되기도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에 있는 굶주린 사람이 되기도 하고, 산상수훈이 선포되던 갈릴리의 어느 언덕에 앉아 있던 식민지 백성이 되기도 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스승의 괴로움을 모른 채 잠들었던 무심한 제자들이 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한 부분이 됩니다. 우리가 듣는 이야기가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 율법에 대한 오해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제1성서(구약)가 제2성서(신약)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역동적입니다. 물론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다루고, 사도행전도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사도들의 일화가 많이 나오지만 제1성서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제1성서는 참 역동적입니다. 사람들이 시편을 좋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시편이 우리의 진실한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성찰하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움, 분노, 시기심, 절망감…이런 것들은 흔히 덕스럽지 못한 감정들로 취급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급적이면 이런 감정을 숨기며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억압된 감정은 우리 내면에서 그림자가 되게 마련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자기들의 부정적인 감정조차 숨기거나 미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시편을 깊이 묵상하는 동안 우리는 그 시인의 심정과 하나가 되고, 그런 소용돌이를 거치는 동안 우리 마음이 정화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1성서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마음으로는 조금쯤 차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전제가 워낙 강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래서 본의 아니게 복음을 거스르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사도 바울 덕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한 사람입니다. 그를 괴롭힌 것은 자기 불화였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롬7:15) 바울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율법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할 힘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어려운 사람이나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외면하고 말 때가 많습니다. 이런 무기력증의 원인을 바울은 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7:24)

이런 처절한 고통의 밤이 있었기에 은총의 새벽이 밝아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이 그를 해방시켜주었습니다. 무지근하게 생을 압박하던 뭔가가 떨어져나간 것 같은 느낌, 냄새나고 무거운 누더기 옷을 벗어던진 느낌, 바울이 경험한 것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는 구속의 은총에 감격하여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합니다. 아름다운 변화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의 깊은 통찰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 말을 오해했습니다. 행위는 뒷전에 두어도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삶의 문제로 보지 않고, 정신의 문제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변화된 삶인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필사적인 노력이 제거된 신앙은 삶의 변화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이건 바울이 의도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바울도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 율법의 완성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주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17)

사람들은 이 말에서 ‘약속과 성취’라는 도식을 찾아냅니다. 율법이나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한 것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정말 그런 뜻일까요? 잠시 대답을 보류하고 다음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18)

이 말씀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보충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점 일획’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습니다. 왠지 강박적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태복음 5장 21절 이하에서 우리는 아주 놀라운 선언을 듣습니다. 분노, 음욕과 간음, 이혼과 간음, 맹세, 보복, 원수사랑에 대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율법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동일합니다. “‘~하지 말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 예를 들어볼까요.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27-28)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 주님은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율법의 부정 아닌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읽어내고 계시니 말입니다. 不立文字 혹은 敎外別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는 말이나 글자로 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문자는 살리고 뜻은 죽이는 독서를 합니다. 성서 문자주의자들은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이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한 보화를 찾을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신앙적으로 편협한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들의 독단으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뜻을 더 풍부하게 해석해내고 있습니다. 그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읽어냈기 때문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고스란히 삶으로 번역해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이나 말씀을 완성한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성경은 생명입니까? 길입니까? 진리입니까?

• 말씀은 어떻게 길이 되는가?

유대인들이 전해주는 옛날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가 언제 죽을지 가르쳐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부탁을 거절하셨지만 워낙 아끼는 사람인지라, 그의 최후의 날은 안식일이 될 것이라고 귀띔하셨습니다. 그 날 이후 다윗은 안식일마다 말씀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다 바쳤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 되자 죽음의 천사가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말씀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든 말씀 공부에 매달리고 있는 동안에는 죽음조차 범접할 수 없습니다. 천사는 틈을 노렸지만 다윗은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천사는 마침내 한 가지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는 정원에 있는 나무를 흔들어 살랑거리는 소리를 냈습니다. ‘저 소리의 정체가 뭐지?’ 궁금증을 참지 못한 다윗은 사다리를 세워놓고 나무에 오르다가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충격 때문에 그는 토라를 암송할 수가 없었고 그 순간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야기 속에서 다윗은 조국을 위한 전투에서 번번이 승리를 거둔 군사적 영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말씀을 묵상하는 인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들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현실이 아무리 힘겨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는 한 유대 민족은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Jonathan Sacks, <>, Free Press, 165)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떠돌면서도 가는 곳마다 회당을 세웠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말씀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았기에 그들은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랍비가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이 길이 되고 생명이 된다는 것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사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 의로운 삶

주님은 말씀을 길로 삼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아주 분명하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

여기서 말하는 ‘의’는 복잡한 신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온전히 살아내려는 노력이 바로 의입니다. 그런 의로운 삶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미가가 그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하나님의 말씀을 길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세상에 공의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길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은 남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랑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을 모신 사람답게 조심스럽게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 전통은 예수님을 가리켜 육체를 입고 오신 말씀이라 고백합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의 몸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의 손과 발을, 시간과 정성을 주님께 봉헌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통해 이 세상에 오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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