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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은 9명의 제자 (막 9: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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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9명의 제자 (막 9:16~29)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5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9;16-29)

오늘 본문은 누구에게 대한 이야기일까요? 예수님이 3명의 제자들과 산위에 올라가 기도하는 동안 산 밑에 남아 있는 9제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남은 9명의 제자들은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고쳐달라는 어떤 아버지의 부탁을 받았지만 고쳐주지 못했고, 예수님이 내려와 고쳐주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과거에는 능력을 보였지만 지금은 안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하기 싫은 말이 ‘내가 예전엔 잘 나갔지’입니다. 이 말은 지금의 현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한탄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해서 안 되는 말이‘전에는 나도 능력이 있었어. 전에는 나도 뜨거웠어’입니다.  이 말은 비참한 말입니다. 신자가 절대 해서 안 되는 말이지요. 능력도 뜨거움도 다 흘려보낸 사람에게 지금 무엇이 남아있겠습니까!!  지금 9제자의 모습이 바로 능력을 다 잃어버린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다 잃어버린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기도(祈禱)’가 정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요. 기도가 정답이지요.  그런데 여기 있는 분들 중에서 기도의 필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알면서도 막상 행하지 못합니다. 9제자들도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아서 능력을 다 잃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을까요? 제자들이 왜 기도를 멀리 해서 있던 능력까지 다 잃어버릴까요?  이제 그 이유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① 먼저 ‘잘못된 열등감’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에게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이 옳은 줄을 압니다. 하지만 그 잠재력과 능력을 믿지는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잘못된 열등감 때문입니다. 산 밑의 9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러 올라간 3명의 제자들에게 ‘열등감(劣等感)’을 느꼈을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옳습니다.   그분이 3제자들과만 함께하시는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은 9제자들은 상대적인 박탈감, 왜소한 자아감을 안 느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완벽한 평등이란 없습니다. 또 平等이란 기회의 평등이지 능력의 평등이 아닙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능력이 다 다릅니다. 장점과 단점이 다 다릅니다.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 다 아시죠?  문제는 잘못된 열등감입니다.

‘잘못된 열등감’은 관계가 깨어지면 생깁니다.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고,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은 잘못된 열등감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른 관계와, 잘못된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까?    

바른 관계란 하나님이 나를 ‘義롭다’고 보시는 관계입니다. 또한 내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신다’라는 한 점 의심이 없는 마음입니다.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나요?     정답은 ‘오직 믿음’입니다.    성도여러분, 성경은 ‘믿음 equal 의’라고 말합니다. ‘믿는 자’를 ‘의로운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착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의로움’을 선한 행동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義는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 올바른 믿음입니다.  義는 신뢰관계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의로 여기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상 최초로 ‘의’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브람은 우상을 섬기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가 무슨 선한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도, 다윗도 그들은 착한 행동을 많이 해서 의인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게 하셨다고 믿었고,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많고 적음으로, 착한 행동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차피 죄인입니다. 50보 100보입니다. 다 영원히 죽을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착한 행동이나,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을 그것을 ‘十字架의 義’라고 합니다. 이렇게 義는 행위의 문제가 아닌 믿음의 문제입니다. 부모님과 믿음이 회복된 자녀가 의로운 자녀입니다.  믿음이 깨어진 사람이 의로운 관계가 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믿음의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크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입니까? 열심(熱心)입니다. 우리는 ‘열심’으로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열심’으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의는 ‘熱心의 回復’이 아니라 ‘믿음의 回復’이며,  ‘열심’이란 회복된 믿음 후에 나오는 것입니다. 

 9제자들이 기도하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과  믿음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열등감이 믿음의 관계를 깨어지게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차별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요? 세상에 예수님께서도 이러실 수가 있는가? 라고 불평해야 하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人格의 劣等’과 ‘어느 부분의 열등’을 구분하여야 합니다.  

누구나 열등감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전인적인 인격의 열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 劣等感에서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분적으로 열등한 것이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우등(優等)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또한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 돌아본다면 그 열등감에서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하도록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지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열등감 크게 느낀 인물을 들자면 야곱의 두 아내 중 레아입니다. 그는 동생 라헬 대신에 야곱의 첫 번째 아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남편인 야곱을 속여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나 남편은 계속해서 동생인 레아만을 사랑했습니다. 정말 자존심 상하고 죽을 맛 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기도로 극복하였습니다.  8명의 아들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이름도 모두 성경적으로 지었습니다. 둘째 아들 시므온은 “하나님이 들으신다”, 유다는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입니다. 

 반면 라헬은 예쁘고 아름다웠지만 창세기 30;1절 말씀에서 보듯이 아들 못 낳자 펄펄 뛰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넣어 아들을 낳게 했습니다. 그렇게 난 아들의 이름조차 ‘단’으로 “나의 한을 풀었다”라고 지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세월이 지난 후 야곱과 함께 막벨라굴에 장사된 사람은 레아가 아니라 라헬이 그와 합장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창49:31)    

우리도 누구나 레아같이 열등감이 있고 연약한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밑에 있는 9명의 제자들도 ‘아 내가 잘못된 열등감을 가지고 있구나, 기도가 준비되지 못해 쓰임 못 받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회개하면, 다시 기도하면, 더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열등감을 분노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시기 질투 원망을 가지고서는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시기 질투란 무엇입니까?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원망이야 말로 관계를 파괴시키는 일번입니다. 열등감 때문에 기도가 닫히고, 열등감 때문에 원망에 빠진다면 그런 사람은 망하는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② 두 번째로는 ‘잘못된 안도감’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귀신들을 쫒아낸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9절에서 귀신을 쫒아내지 못하자 예수님은 기도 안하니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현실에서 안주하다가 능력을 다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머리 짤린 삼손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귀신 몇번 쫒아 낸 것을 자기의 영원한 능력으로 오해하고 기도를 쉬었던 것 같습니다.  능력이 계속 저절로 자기 것인 줄 알았겠지요. 

여러분, 능력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은 새로 받기도 하지만, 가진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질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번 부자가 영원한 부자인가요?  지금 가난한 사람이 무조건, 계속 가난한가요?  우리는 잘못된 안도감을 버려야 합니다. 이 거짓된 안도감 때문에 기도를 멈추고서, 가진 능력을 다 잃어버립니다.  

성도여러분, 10년마다 한국의 재벌기업의 순위가 절반이상 바뀐다고 합니다. 한번 재벌이 영원한 재벌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린 아이밖에 없습니다.  일일노동자와 재벌 회장 중 누가 더 열심히 일할까요?  노동자는 하루쉬면 그날 하루는 일당이 없지요. 그러나 회장은 미래의 경제 흐름을 잘못 예측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더 긴장하고 더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흘러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기도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옛날에 T.V. 아이스크림 선전에‘줘도 못 먹나’하는 멘트가 나와 유행한 적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먹으라고 줘도 못 먹으면 안 되겠지요. 기도하면 능력 주시는데 기도 안 해서 능력 못 받으면 ‘줘도 못 먹나’ 말 들어도 할 말 없지요. 그런데 갖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더 문제입니다. 한번 내 것이 영원한 내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안도감이 기도를 멈추게 하고 가진 것조차 잃어버리게 합니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가 언제나 기뻐하고, 언제나 기도하고, 언제나 감사해야 해야 될 것을 말씀합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말처럼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한사람의 기도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본문의 기도를 멈춰버린 9명의 제자들의 모습은 참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시는 예수님, 귀신을 쫒아내시는 한 사람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아름답습니다. 한 사람 예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 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하나님은 ‘무리’를 사용하시는 경우는 거의 보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항상 ‘한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 헌신하는 한 사람, 믿음을 가진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을 하고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 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바로 그 한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하나님에게 말씀드리십시오.    

20세기 프랑스의 3대 작가 중 한사람으로 장지아르라는 작가를 들고 있는데요, 그가 쓴 “나무를 심는 사람”이라는 책이 있는데 120여국에 번역되어 읽히고 있습니다. 그 책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 엘지아르는 프로방스 지방의 양치기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지역의 나무를 벌목하고 마구 자연을 다룸에 따라 지역이 황폐화되어 갔습니다. 엘지아르는 1913년부터 3년간 황폐한 그 지역에 도토리나무 10만개를 심었습니다. 그 중 2만개가 살아났습니다. 1946년 그 지역에 갔을 때 울창한 수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생동감과 활력이 넘치고 만 명의 인구가 그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죽은 황폐한 마을이 활력이 넘치는 산악도시로 변해 있었다는 줄거리의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작품입니다.   

이렇게 심어서 열매 맺는 것이 비단 나무 뿐 이겠습니까? 복음도 기도도 사랑도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짧은 인생 살면서 먹고 사는 일상의 일 외에.. 가치 있는 일 하나에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하나에 10년간만 투자해 보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이루어질까요? 안 이루어질까요?  

1999년 10월에 LA 에서 한 여인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52세 된 홍정복 여사의 장례식이었는데 그는 슈퍼에서 히스패닉 강도에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장례식에는 캘리포니아주 지사를 비롯한 지역 유지들과 많은 흑인들이 참석을 하였습니다. 이 홍 여사는 이민 와서 LA 흑인 빈민가에서 15년 동안 식료품가게를 하면서 불쌍한 흑인과 못사는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낳은 가난한 산모에게는 언제든지 와서 분유를 가져갈 수 있도록 늘 슈퍼마켓을 오픈시켰고...굶주린 아이들과 버려진 노인에게는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도록 한 사람입니다. 사람들 특히 흑인들은 그녀를  Ma Ma, LA Ma Ma,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다인종 도시 LA의 갈등과 미움이 있는 곳에서 희망과 사랑을 심었습니다. 100년 간 한인 기독사회가 이룬 모든 업적보다 홍 여사 1명의 역할이 더 컸다고 모든 사람이 칭송하였습니다.    

우리 한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한 사람 내가 뭘 심는가에 따라 우리 모두의 미래가 결정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나무를 심으면 그 나무가 열매를 맺고,  한 사람이 기도를 심으면 그 기도가 열매를, 한 사람이 복음을 심으면 그 복음이 열매를 맺습니다.  작은 불꽃을 심으면 큰 불길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 밤에 귀신을 쫒아내는 능력을 위해 기도해 보시는 한 사람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잃어버린 능력의 회복을 위해, 아니면 새로운 능력과 은혜를 위해 기도해 보시는 한 사람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잘못된 열등감을 벗어버리십시다. 잘못된 안도감도 치워버리십시다. ‘남이야 어찌 하든지 나는 기도 하겠다’ 고 결심하는 한 사람이 되십시다.  오늘 성경말씀에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제목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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