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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벧후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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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벧후 2:1~3)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의식구조의 다양성을 탓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화는 필요하지만 개인주의는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법칙이자 기준입니다. 성경의 실천이 그리스도인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객관적 계시(성경)에 절대성과 제일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유력한 지도자 중에 한 분으로 손꼽히는 김 아무개 목사는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의 한국 개최를 놓고 소모전을 펼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W.C.C.가 우리 신앙고백과 맞도록 도와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교리와 교단은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G.C.F.(Global Christian Forum)운동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1996년 W.C.C. 모임에서 제안된 G.C.F.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믿는다는 두 가지 전제에 동의하면 기독교로 인정하고 대화의 장을 만들어 가자는 운동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는 크게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첫째,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사상은 어떻게 할 것이며 둘째, 성경에 대한 입장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안되는 것을 끼워서 맞추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위를 의식하지 말고 성경 편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철저한 계시 의존사색만이 요구될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기록된 책은 두 권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전후서입니다. 베드로전서는 핍박 중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성도에게 산 소망을 가지고 믿음에 굳게 설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당시 영지주의 이단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는 유대인 성도들을 경고함으로써 잘못된 길을 걷지 않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바벨론의 소아시아 여러 교회에 보낸 안위와 권면으로 희망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전서를 보낸 교회에 재차 보낸 것으로 교회의 장래를 걱정하며 사설을 좇지 말고 주의 말씀으로 인내하라는 메세지입니다. 

당시의 이단들 가운데는 
① 바리새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만큼 유대교에 깊은 인상을 남겨 놓은 파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참 이스라엘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들의 전통에 대한 열심은 성경을 뒤엎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 율법에 다른 율법을 첨가하는 일까지 했습니다. 이들은 극단적인 분리자라는 비판을 받기에 넉넉했고 내용보다는 의식과 형식의 시녀가 되어 있었습니다. 

② 사두개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역사에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아니했고 기록 또한 없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생활 방식을 편리하게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 로마인을 더 기쁘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③ 에비온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④ 영지주의 선구자 케린투스파도 한 몫을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하므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했습니다. 

⑤ 방종주의 니골라파도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데 한 몫을 했습니다. 

Ⅰ. 거짓 선생들은 믿는 자 중에서 일어난 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1절에 『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이 있으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 『 민간 』(라호스)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켰고 『 이방인 』은 '게노스'를 사용하였습니다(among you will be false teacher). 칼빈은 말하기를 '있으리라'(에손타이)는 단어가 미래사로 쓰여진 이유는 거짓 스승이 늘 있다는 상습적인 의미의 미래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이단 '하이레세이스'라고 하는 말은 스스로 선택한다는 뜻이 있고 나중에 작당(作黨)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통교회에 역행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이단입니다. 멸망케 할 이단이라고 한 표현은 이단이 받는 벌이 중함을 말합니다. 이단은 공공연하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표현대로 가만히 끌어들인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은밀한 가운데 교회에 파고들기 때문에 항상 상당한 주의를 요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21절에 『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스스로 지어낸 말을 그럴듯하게 말하는 자들입니다. 

신명기 18장 20절에 『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4장 14절에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21절에 『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이라고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보다 백성들의 기대에 맞게 거짓 예언을 일삼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예언은 모욕이나 고난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그야말로 좋은 것이 좋은 것입니다. 

예레미야 4장 10절에 『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진실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칼이 생명에 미쳤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6장 14절에 『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4장 13절에 『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13장 10절에 『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믿는 자 중에 거짓 교사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이 멸망케 할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은 결국 멸망당할 것을 가르치는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직접 미혹했지만 신약의 거짓 교사들은 소리 소문 없이 간접적인 방법으로 백성들을 미혹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에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4절에 『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고 했습니다. 
유다서 1장 4절에 『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고 했습니다. 

이단(heresy)들은 다양합니다. 문자 그대로 이단(異端)은 겉으로 보기에 조금 다르거나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입니다. 알고 보면 전혀 다릅니다. 이단 중에는 성경의 어떤 한 부분만을 강조함으로 다른 성경이 무시되어 버리는 교리적인 이단이 있습니다. 또 교리를 변조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사탄의 명을 받아 강력한 영적인 힘을 과시하는 행동적인 이단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하고 심지어는 동정녀 탄생과 부활을 부인하는 데까지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 설교라도 들으면 된다고 하는 자만에서 벗어나야 하고 평이한 성경해석이라도 항상 교리라고 하는 틀에 넣어서 해석해야 합니다. 

Ⅱ 거짓 선생들은 사신 주를 부인한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1절에 『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 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 』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했다'는 말을 직역하면 '사셨던 주를 부인하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골라산타 아우투스 데스포텐 아론우메노이'는 노예시장에서 노예를 사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혈로 멸망 받을 죄에서 구속받은 것을 부인하고 여전히 죄와 짝하여 사는 생활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죄의 종도 아니요 그렇다고 다스리는 상전도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항상 이단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① 에비온파(The Ebionites)의 견해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② 영지주의자(The Gnosticism)의 견해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합니다. 요한1서, 골로새서, 디모데전후서, 유다서는 이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물질개악설(物質皆惡說)을 주장합니다. 물질은 악신이 지배하는 악한 것이기 때문에 인성 그 자체가 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환영설(幻影說)을 주장합니다. 

③ 아리안파(The Arians)의 견해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의 일부를 부인했습니다. 성자 그리스도는 피조물인데 몸은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골 1:15). 그러면서도 성자를 창조자 구주로 인정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同一)하나 그 사역과 본체의 속성과 능력에서 하나님 보다 열등(inferior)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325년의 니케아 회의에서 이단으로 파문당했습니다. 

④ 아폴리나리우스파(The Apollinarians)의 견해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일부를 반대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의 자리에 인간과 달리 신성이 주입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인성의 완전성이 파괴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Platon사상에서 왔는데 그는 Platon사상에 심취한 사람이었습니다. 

⑤ 네스토리우스파(The Nestorians)의 견해입니다. 이들은 신성이 인성에 흡수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신성이 로고스 로서 인성 속에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전지전능, 무소부재등은 천국에 두고 사랑, 지혜, 희생, 긍휼 등만 가지고 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단순한 도덕적 내주자(內住者) 라고 했습니다. 

⑥ 유티키안파(The Eutychians)의 견해입니다. 이들은 신성에 인성이 흡수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하나님이 신성만큼 키워 주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도 본래의 인간의 인성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⑦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의 견해입니다. 
ㄱ) 허위설(The Falsehood) - Reimarus - 부활의 사실은 제자들의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도적질하여 다른 무덤에 묻은 후 부활을 선언했다고 했습니다. 

ㄴ) 기절설(The Swoon theory) - Heinrich Paulus - 예수가 십자가에서 기절한 것을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매장하였는데 무덤 속에서 다시 깨어났다는 설입니다. 

ㄷ) 환상설(The Vision theory)- Strauss - 역사적 부활을 부인하며 죽음은 죽음상태의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모하는 무리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고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그 기대는 예수님을 신격화하는 경배로 이어졌으며 기대와 경배는 차츰 사람들의 환상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ㄹ) 신화설(The Myth theory) - Bultmann -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을 부인하며 현대주의자(Modernism)들과 과학주의(Scientism)나 합리주의(Rationalism)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포함한 모든 부활에 이의(異意)를 제기(提起)합니다. 
매킨토시(Mcintosh)에 의하면 "인간육체의 원소가 분해 되면 다른 유기물체에 흡수되는 과정이 반복되기 때문에 인간(人間)의 몸은 본래의 몸으로 회복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① 육체를 조성한 원소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인간의 육체의 부분 중 공유된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② 부활이란 이전 육체의 단순한 재생이 아니고 천성체에 준하는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입니다. 현재의 원소를 부활체가 갖고 있긴 하지만 현재의 육체와 동일(同一)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영생의 기초입니다.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부활은 교회 설립의 기초입니다. 부활은 신앙의 대상입니다. 

Ⅲ. 거짓 교사들은 지은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3절에 『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 지은 말 』(플라스토이스)은 신약성경에서 유일한 단어입니다. 이 말은 '목적 성취를 위해 조작한다.'는 뜻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미혹하고 있습니다. 
디도서 1장 11절에 『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5절에 『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고 했습니다. 유다서 1장 16절에 『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고 저희 멸망은 잠을 자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의 필연적인 심판과 멸망의 확실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지은 말은 공교로운 말입니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말씀을 전달하는 반면에 거짓 교사들은 합리주의와 인본주의와 이성철학이 이들의 사상체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하고 자신들이 궁리해서 만든 철학이나 신념 등을 사람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방법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부름을 받지도 않았고 실상은 위로부터 받은 메시지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 지은 말 』이라고 하는 것은 계시신학에 반대되는, 사람의 생각에서 유출된 이성신학을 하는 자들의 말입니다. 이들은 합리주의의 강한 지배를 받고 있는가 하면 객관적인 계시인 성경보다 자기들의 주관을 강하게 부각시키므로 현실성이 매우 고조된 인본주의로 치닫게 됩니다. 

저들의 동기에 대해서는 본문이 말하기를 탐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고 그들이 지은 말을 가지고 오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탐심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물질의 탐욕과 육체적인 욕망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품화한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3절에 『 …너희로 이를 삼으니…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3-5절에 『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고 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말해주기를 꺼려합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침묵하고 있는 것을 '아디아폴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고 어떤 때는 이용하고 어떤 때는 무시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에 자유합니다. 성경이 침묵할 이유가 없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겉으로는 교사 같지만 실상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짓된 자들을 추종하는 자들 역시 기도도, 찬송도, 설교도, 희생하는 방법도 성경이 기준이 아니고 자신들의 생각이 기준이기 때문에 늘 불법일 수밖에 없습니다. 
작금에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혼합주의 종교와 이른바 W.C.C.운동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앙생활 속에 여러 가지 부족하고 연약한 것에 대해서는 격려하고 관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도전은 용납하지 아니했습니다. 
디도서 1장 16절에 『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행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계속 부인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생활에서 투영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단은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이단은 우리를 사신 주를 부인합니다. 이단은 하나님의 말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지은 말을 가지고 우리를 미혹합니다. 
평이한 성경이라도 교리적인 배경 없이 사사로이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 『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절에 『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4절에 『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세속 단체와는 구별됩니다. 교회는 세상의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21절에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세상 지성인들의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구원받기로 작정된 십사만 사천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숫자가 각기 할당된 장소의 교회에 모이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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