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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독거노인 안나의 소망 (눅 2: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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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노인 안나의 소망 (눅 2:36~39) 


복에는 두 가지 복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복이고 또 하나는 보이지 않는 복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경제적인 것, 지위, 명예, 건강, 학벌, 아름다움 등은 모두 눈에 보이는 복입니다. 그런데 소망, 사랑, 희망, 믿음,  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입니다. 이 두 가지 복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가하는 문제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생각해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좋은 집, 많은 재물, 아름다움, 명예 등은 기왕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없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덜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소망이나 미래나 사랑이나 믿음은 없어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세상은 너무나 눈에 보이는 것들에 치우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도 말고 또 다른 복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이 미래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즉 미래의 약속을 믿고 오늘 기다리는 삶입니다. 

기다림”은 소망 중 소망입니다. 그래서 이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미래가 있는 사람, 미래에 꿈이 있는 사람, 미래에 어떤 약속이 주어져 있는 사람은 모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노래를 들어보면 다 사랑과 약속과 꿈을 이야기 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기다림은 더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입니다. 명절날 보다 더 행복한 날은 명절날 며칠 전이 더 행복합니다. 결혼 날보다 결혼을 얼마 앞에 두고 기다리는 마음이 더 행복한 마음입니다. 여행가는 날도 행복하지만 며칠 전부터 기다리며 준비하는 마음이 더 행복합니다. 우리들의 삶에는 이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성경에 이 약속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이고 구약성경입니다. 그 말은 옛날 약속이라는 말이고 새 약속이라는 말입니다. 성경 속에는 수많은 약속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약속 중에서 가장 큰 약속은 장차 세상에 예수께서 오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구약성경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독생자 아들을 처녀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인류에게 주어진 약속 중에서 가장 비중 있고 신비하고 전무후무한 영적이고 우주적인 약속입니다. 

메시야의 탄생 예고 

하나님은 이 같은 엄청난 약속을 이사야를 통해서 처음 공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시켜서 장차 메시야가 세상에 탄생하리라고 예고를 하십니다. 그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적 암흑시대였습니다. 세상이 타락하여 영적 안목이 흐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로마의 압제가 계속되어 해방의 기미가 전무한 때였습니다. 미래가 암담했고 현실이 불투명한 시대였습니다. 로마의 힘은 너무 강해서 백성들이 해방 받고 자유해지리라는 기대가 전무한 시대였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고뇌하는 때가 이렇게 미래가 암담할 때입니다. 소망의 끈이 끊어졌을 때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내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래는 불투명하였고 이미 계시가 끊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낙심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이사야가 장차 메시야의 도래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지금 지쳐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그의 오심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 약속이 오직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가 오시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고대를 하였습니다. 오로지 그가 오시면 하고 온갖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행복한 일입니다. 미래에 기다릴 내용이 있고 약속이 있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래서 행복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안나의 고대 

그 시대에서도 더 간절한 마음으로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본문에 나와 있는 안나라는 할머니 입니다. 본문은 이 할머니의 신분을 분명하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셀지파의 딸이었습니다. 아셀은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비누엘의 딸이라고 했습니다. 비누엘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씨름하던 브니엘에서 파생된 이름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안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라는 이름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안나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드보라, 훌다와 같이 훌륭한 여성 예언자였습니다. 이 여인이 과부된 지 84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도 당시 사회전통에 따라 14세를 전후해서 결혼했을 것입니다. 결혼해서 7년 살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지금 105세쯤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성경이 굳이 안나의 나이를 말씀하는 이유는 그 여인이 예수의 오심을 위해서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장기간 기다렸다는 말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 모든 백성들이 메시야가 오시기를 얼마나 기다렸는가를 설명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고 위로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약속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 여인이 84년 동안 수절하며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있으니까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여인도 그 시대를 바라보며 암담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나는 그 시대에 자기의 삶의 테두리를 벗어던지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대 섭리를 생각하고 뜻을 가지고 기도로 일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언뜻 보면 안나는 84년간 과부로 불행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하나님은 때로 그 불운한 삶의 조건들을 활용하여 그 여인에게 큰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통해서 그리고 환경을 만들어 활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이 고대함, 기다림, 사모함의 삶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의 이루심은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고 나타납니다. 성령의 은혜도, 은사도, 천국도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하라, 두드리라,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나는 84년 동안 주어진 약속을 믿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사모하는 동안 드디어 응답이 오게 되었습니다. 38절을 보면 “마침 그때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야 오심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을 때 마침 그 때에 어린 예수께서 결례받기 위해서 성전에 오신 것입니다. 바로 직전에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그도 역시 메시야 오심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던 중 마침내 결례받기 위해 성전에 오신 예수를 만나 그를 품에 안아보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 안나 역시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마침 그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38) 그 말은 결례받기 위해 오신 예수를 그도 만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안나는 사람들에게 탄생하신 예수에 대하여 전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골방에 앉아 기도할 일이 아니고 이제 기다리던 그 분이 오셨음을 나아가 전하고 알려야 했던 것입니다. 뜻을 세우면 응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안나는 마침내 탄생하신 메시야를 품에 안아보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세상에 오신 메시야를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와의 만남 

신앙생활은 영적생활입니다. 신앙인은 내가 믿는 영적 주체이신 주님을 만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기다림도, 사모함도, 열심도, 봉사도 다 좋습니다. 그런데 기다리고 사모했으면 만나야 합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영적생활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때 그로부터 영적 자본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구체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인이면서도 이 영적 주체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 하는 여정에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만나지 못하면 우선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마다 흔들립니다. 때마다 흔들립니다. 근거가 없고 뿌리가 약하면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또 신앙에 힘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생활이기 때문에 위로부터 오는 영적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위로부터 공급이 없으면 마치 기름 없는 기계가 힘겹게 돌아가듯 신앙의 삶이 힘겨워 집니다. 쉽게 지칩니다. 쉽게 싫증을 느낍니다. 

그래서 도중에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고백도 없습니다. 만남이 있어야 뜨겁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만남이 없으니 무슨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철학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존재가 아닙니다. 더구나 개념속의 예수님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역사하시는 인격의 하나님입니다. 당연히 그를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그로부터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이 발생하고 지혜가 주어지며 영이 충족됩니다. 머리로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직접 만나고 알고 체험하여 영을 공급받는 일입니다. 신앙인이 그 신앙의 주체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서 무슨 힘을 공급받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모든 계기는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당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누구보다도 메시야가 오시기를 고대했던 사람들입니다. 매일 율법서와 예언서를 옆에 끼고 매일 읽고 매일 연구했던 사람들입니다. 폼 잡고 다니며 그가 오시면 우리가 먼저 맞으리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정작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는데 그들은 깜깜소식이었습니다. 낌새도 채지 못하였습니다. 모양새가 아주 우습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폼 잡는 생활이 아닙니다. 만나는 생활입니다. 

또 유대인들도 율법공부를 하며 오시리라는 메시야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오셔서 눈앞에서 기적을 행하고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교육하시고 천국을 전파하실 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떡을 얻어먹고 병을 고침 받았으면서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 약속된 예수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 하였습니다. 모르면 그냥 있어야 하는데 유월절 때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결국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참으로 우매하고 불행한 일입니다. 고대했으나 몰랐고 눈앞에 나타났으나 알아보지를 못하였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오신 메시야를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거리가 먼 이방 땅에 살던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이라는 노인이었고 안나라는 84년 과부로 살아가던 여인 등 단 몇 명뿐이었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그 시대의 천민이었고 가장 하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남의 양을 쳐주는 가난했던 사람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들도 서기관들도 모르는데 그 멀리 당시 바벨론 땅에서 오늘의 이라크 땅에서 수개월 약대를 타고 찾아와 오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본문의 시므온도 안나도 그 시대의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독거노인들입니다. 보호의 대상인 노인들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주님과의 만남의 생활입니다. 신앙의 주체이신 주님을 내가 직접 만나야 합니다. 오늘 유대인들은 그때 오신 예수를 메시야로 만나지 못하고 오늘까지도 그 메시야가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교회 안에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때로 시끄럽기도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구체적 만남이 없으니까 기준이 주님 기준이 아니고 내 기준이 앞서서 그렇습니다. 내 기준대로 하자고 강조하니까 충돌하고 불화가 야기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내 기준이 앞서면 갈등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왜 내 기준이 앞서는가 하면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 주님의 기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길의 기준은 주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이 길이기 때문에 나는 그 분의 길과 기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만나지 못하면 주님의 기준을 내 기준에 맞추려 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내 상식이 기준이 되고 신앙의 중심이 되니까 신앙의 삶이 모호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들이 갈등이 많고 분파가 많고 불화가 많은 이유는 모두 내 기준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이 예수를 만나지 못해서 나타나는 한계 때문입니다. 만나지 못하면 내 생각이 기준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을 만나게 되면 나의 모든 삶과 인생과 뜻과 계획의 기준을 예수께 맞추게 됩니다. 그러니까 삶의 우선순위가 내 기준에 맞추지 않고 주님께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주님의 목적에 어긋나면 포기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도 주님의 목적에 부합하면 그때 나는 나를 부정하고 그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맞추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그때 우리는 내 입을 열어 그 주님을 세상에 전하고 알리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알고 만나야 전하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안나라는 여인은 기다리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나가서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 이상 골방에서 기도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오신 것을 알았으면 나가서 전해야 합니다. 얼마나 자신 있게 나가서 전하였겠습니까. 

성도들은 전도하라고 하면 참 괴로울 것입니다. 나가서 전하려고 해도 잘 안됩니다. 전할 사람도 없습니다. 전할 말도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전할 말도 없고 전할 사람도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더구나 용기도 없습니다. 오늘 교회의 중진들 가운데서도 아직도 예수를 만나지 못한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벅찬 부담이 주어지면 곧 바로 불가능하다고 불평이 나오고 물러서고 주저합니다. 용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만나지 못하면 용기가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만나야 그분으로부터 힘을 공급받습니다. 영력을 공급받습니다. 용기를 얻고 모험심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안나라는 할머니는 사람들이 볼 때는 한없이 초라하고 불행한 인생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84년 동안 과부로 살면서 매일 성전에서 금식하며 기도만 하였습니다. 보기에 초라했고 빈궁하였고 불행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누가 불행한가는 외모로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외모는 행복할 것 같이 생긴 사람도 내면적으로 아주 불행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외모는 그럴 듯한데 내면이 지옥인분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생활은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나는 초라하였지만 날마다 주님 오심을 고대하며 금식하며 기도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렇게 84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결례받기 위해 성전에 오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기다린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뜻을 이루게 되고 꿈을 이루게 됩니다. 그날 이 할머니가 얼마나 행복하고 감격하였겠습니까. 장장 84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 독거노인 할머니 안나는 그 감격을 안고 나가 그 메시야에 대해서 전하였다고 했습니다. 전하되 얼마나 자신 있고 행복하게 전했겠습니까. 

이것이 만남이 주는 축복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으로부터 힘을 입습니다. 삶이 행복해 집니다. 신앙의 목적이 분명해 집니다. 그리고 그 분을 전하게 됩니다. 전할 때에는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전하게 됩니다. 그 삶이 주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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