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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절대평가 (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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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평가 (마 25:14~30) 


사람은 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과연 잘 사는 게 어떤 겁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겁니까? 세상에서 출세하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평가를 받는 게 잘 사는 겁니다. 우리는 늘 평가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학교 다닐 때는 시험을 통해 평가받습니다. 학교를 졸업해도 시험이 끝나지 않죠. 취직 시험이나 승진 시험 등이 있습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죠. 한번은 대학교수로 있는 제 친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새로 교회에 나가게 됐다며, 친구가 목사라고 제 앞에서 자랑시키더군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야, 너 힘들겠더라”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매 주일 작은 논문 발표하던데 ... 학교는 학생들이 매년 바뀌지만 교회는 사람들이 안 바뀌니까 계속 새로운 설교를 해야 되잖아.” 자기 식으로 말한 겁니다. 

그래서 “괜찮아. 논문 발표 하는 정도는 아니지. 할 만 해. 그런 염려 말고 교회나 잘 다녀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제가 새삼 깨달았습니다. 매 순간 우리가 하는 일이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다 평가받는 거라고. 그런데 항상 좋은 평가를 받으면 좋겠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평가에 늘 신경이 써지고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내리는 평가는 불공정하고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상황이나 시대가 바뀌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프랑스 파리에 가면 에펠탑이 있습니다. 그 설계자가 누굴까요? 에펠입니다. 설계자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죠. 에펠탑은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를 기념하여 세워진 높이 300m의 탑입니다. 당시 시민들은 파리의 아름다운 경관을 해치는 흉물이라며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철거하느냐 마느냐 논란 끝에 그대로 남게 되었는데, 오늘날은 파리의 상징물로 세계 각처에서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매력의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의 평가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가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정확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통찰력으로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그래서 ‘불꽃같은 눈’이라 표현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평가는 공정하고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평가를 신학 용어로 말하면 ‘심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심판자입니다. 내가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하나님은 내 인생을 평가하십니다. 그 평가가 인생의 성패를 가늠하는 겁니다. 어느덧 12월입니다. 또 한 해가 흘러갑니다. 지난 한 해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과연 어떨까? 심히 염려가 됩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 한 해 한 해 이렇게 흘러가노라면 언젠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닥쳐올 텐데, 그 때 내 인생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과연 어떨까?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아무쪼록 세상의 불완전한 평가로 인해 일희일비(一喜一悲) 하는 게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의 평가를 의식하며 인생을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흔히 ‘달란트 비유’라고 부르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세 가지 비유가 나오죠. 바로 앞 장 2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시고 종말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5장에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겁니다. 종말을 의식하며 성도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모두 종말론적 비유들입니다. 그 세 가지가 뭐죠?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 비유입니다. 그 중에 이 시간 달란트 비유를 함께 살펴봅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파악해야 될 핵심은 하나님의 평가 기준입니다. 

[1] 하나님의 평가 기준 : 최고가 아닌 최선 

대개 세상 사람들의 평가 기준은 이 사람 저 사람을 비교해서 ‘최고’가 누구냐 이런 식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자가 ‘최선’을 다했는지 봅니다. 

어떤 사람(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 재산을 맡깁니다. 예수님 당시에 실제 그런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은 로마의 식민지였는데, 귀족들이 로마의 원로원에 가서 분봉왕(지방 영주에 해당)의 직위를 받아 오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례를 가지고 비유로 말씀하신 겁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멀리 타국에 가는 것은 부활 승천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종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 주인이 세 명의 종들에게 각각 1 달란트, 2 달란트, 5 달란트를 맡깁니다. 달란트는 본래 금속의 무게 단위였는데, 여기서는 화폐 단위입니다. 그 당시 1 달란트는 대략 6천 데나리온에 해당됩니다. 1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까, 1 달란트는 아주 큰 액수입니다. 노동자 한 사람이 거의 20년 동안 꼬박 모아야 만질 수 있는 큰돈입니다. 

그러면, 달란트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단순히 돈만 의미하지 않죠. 이 말에서 영어의 talent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재능’ 혹은 ‘은사’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하나님이 각자의 인생에 허락하신 각종 재화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시간, 물질, 재능, 건강, 지위, 직분 등입니다. 

주인은 이렇게 종들에게 달란트를 각각 맡긴 후 먼 길을 떠납니다. 그 후 그 종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갖고 어떻게 인생을 살았느냐 이겁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장사하여 두 배로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와 같이 했습니다. 주인이 오랜 후에 돌아옵니다. 주인이 돌아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그 때 결산을 하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킵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에게 평가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먼저 20절~21절을 보시죠. “21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주인이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뭐라고 평가했나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평가했습니다. 여기서 ‘주인의 즐거움’은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 궁극적으로는 천국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22절~23절을 보시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도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한 것과 동일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세상의 평가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대개 세상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크기(Size)를 잽니다. 그리고 순위(ranking)을 매깁니다. 만일 이 비유에서 순위를 매긴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5달란트 받은 자 1등, 2 달란트 받은 자 2등, 1달란트 받은 자 꼴찌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2달란트, 5달란트 받은 자가 각각 장사해서 4달란트, 10 달란트로 불렸으니까 격차가 더 벌어졌지만, 동일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최선을 다했느냐? 아니냐? 그것만 따졌습니다. 

1달란트 받았던 자에게 내린 평가를 보면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죠. 그 종은 어떻게 했나요? 땅 속에다 그냥 파묻어 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오자 그대로 내놓았습니다. 그 때 주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26절 보시죠.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 ” 그 종이 왜 책망 받았죠? 적어서? 아닙니다. 1달란트를 맡긴 것은 주인이지 종이 아닙니다. 분량을 가지고 따진 게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상대평가’를 합니다. 그래서 줄을 세우고, 비교하고, 순위를 매깁니다. 반면 하나님은 ‘절대평가’를 하십니다. 사람들끼리 비교하지 않습니다. 순위도 매기지 않습니다. 각 사람을 평가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사람의 경우를 보십시오. 등수를 매기지 않고 각각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충성의 여부일 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최선’입니다. 

사실 가만히 보면, 사람들끼리 등수를 매기는 게 별 게 아닙니다. ‘도토리 키재기’ 혹은 ‘개미 높이뛰기’ 같은 겁니다. 최대, 최다, 최고, 이런 게 하나님 앞에서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최선일 뿐입니다. 이건 누구나 가능합니다. 여기 모인 많은 사람들이 세상 기준으로 평가 받는다면 1등은 단 한 명만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 기준으로 하면 모두다 1등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대로, 주어진 여건대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겁니다. 

어떤 청년이 직장에서 첫 월급을 탔습니다, 처음으로 정식 양식당에 갔습니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습니다. 스테이크를 시켰습니다. 양식을 시키면 물어보는 게 많잖아요. 이것저것 물어서 대답했는데, 마지막 한 가지 질문 때문에 해프닝이 생겼습니다. 웨이터가 묻습니다. “고기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고기를 어느 정도 익혀주면 되냐는 질문이죠. 레어(Rare), 미디엄(Midium) 혹은 웰던(Well done) 등으로 대답해야 되는데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얼떨결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주세요!” 우스갯소리 같지만, 사실은 정답을 말한 겁니다. 미디엄이든 웰던이든 어떻습니까?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처지가 어떻든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은 ‘최선’이란 말과 같은 뜻입니다. 여기서 ‘맡은 자’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청지기’(steward)입니다. 청지기는 주인(owner)이 아니라 관리인(manager)입니다. 비행기 승무원을 영어로 뭐죠? Steward, Stewardess입니다. 이들은 주인이 아니죠. 단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런 평가 기준을 깨닫게 되면 비교당하는 부담에서 해방됩니다. 동시에 건강한 긴장감을 갖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우월감도 열등감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경쟁할 것도 없습니다. 물론 선의의 경쟁이란 것이 있기는 하죠. 좋은 목표를 삼고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오래 전에 “당신의 경쟁 상대는 누구입니까?”라는 공익광고가 있었습니다. 경찰관이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 경쟁 상대는 영국 경찰입니다” 그 다음에 농부가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경쟁 상대는 덴마크 농부입니다.” 우리나라의 수준을 세계 표준(Global Standard)으로 끌어올리자는 홍보물이었습니다. 

선의의 경쟁 좋죠. 그런데 이것도 자칫 잘못하면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비교하고 경쟁하려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예수님과 경쟁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절대 기준입니다.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크리스천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게 최선의 삶이고, 인생을 잘 사는 겁니다. 크기 경쟁이나 순위 경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스데반과 바울을 비교해 부세요. 바울은 오래 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스데반은 많은 일을 하지 못하고 일찍 순교를 당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이 스데반에 비해 월등한 인생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을 비교해 보세요. 요나단은 사울의 장남으로 차기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세우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양보합니다. 전쟁터에서 전사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이 요나단에 비해 월등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각자의 형편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동일한 칭찬을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쓸데없이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의 인생에는 ‘마이 웨이’(My Way)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각자 최선을 다하면 그만입니다. 심지어 적은 것이라도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 앞에서 귀한 겁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 보십시오.(요한복음 6장) 소년의 도시락(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은 초라한 것이었지만, 소년의 최선이었기에 예수님을 기쁨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축사하신 후 나눠주니까 5천 명이 넘는 무리들이 실컷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요즘 장애인 우대 정책을 펴지만, 그래도 장애인들이 차별 당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들을 열등하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잘 보십시오! 헬렌 켈러(3중 장애인 교육가), 크로스비(시각장애인 찬송가 작사자), 송명희 시인(뇌성마비) 등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시는지! 그들은 최선을 다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칭찬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상대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평가로 칭찬받으시기 바랍니다. 

[2] 승진의 원리 : 최선을 다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과 책임 

달란트 비유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승진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한 자에게 축복을 더하시고, 불충한 자에게는 오히려 빼앗고 강등시킵니다. 

본문 28절~29절 보시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1 달란트 받았던 자에게서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축복의 원리입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보죠. 다리를 다쳐서 깁스를 하고 한 달만 있어 보세요. 새 다리가 됩니다. 깁스를 풀어도 한참 동안 물리치료를 하고 자활 훈련을 해야 제대로 걸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운동선수가 계속 다리를 사용하고 단련하면 철각이 됩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더 많은 것을 맡겨 주십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 평범했지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세겜으로 형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없어요. 그냥 집으로 돌아가도 됩니다. 그런데 물어물어 도단까지 찾아갑니다. 그런데 평소 미워하던 형들이 요셉을 노예상인에게 팔아버려요.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합니다. 

원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더니 가정 총무가 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는 것을 물리쳤는데, 오히려 모함을 받아 감옥이 갑니다. 기기서도 원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합니다. 감옥에서 만난 고위 관리의 도움으로 바로 왕을 만나 마침내 애굽 총리가 됩니다. 최선을 다한 자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말고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하나님이 필요하면 더하여 주실 겁니다. 많이 받으면 축복이지만, 동시에 책임이라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약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눅12: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여러분, 사울과 다윗을 비교해 보십시오. 둘 다 비천한 사람들이었는데, 왕이 됩니다. 다윗은 목동 시절이니 왕이 된 후에나 항상 최선을 다했습니다. 반면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는 괜찮았는데, 왕이 된 후에 교만해지고 범죄합니다. 차라리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무조건 큰 게 좋은 게 아닙니다. 감당할 수 있어야 축복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항상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 1924~ ) 이야기입니다. 그가 대통령 자리에서 은퇴한 후 자서전을 썼는데, 그 제목이「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Why not the Best?)입니다. 이것은 그의 평생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이 좌우명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해군 중위 시절 배를 타고 항해를 하던 중 전우들과 체스를 두고 있었습니다. 

함장인 리코버 제독의 지시도 잊어버린 채 체스에 몰두했습니다. 제독이 카터를 크게 나무랐습니다. “귀관은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그 후 카터는 그 말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살았습니다. 그는 대통령을 마친 후에도 계속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권 문제와 자선사업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인은 물론이고 세계인들로부터 한껏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상대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절대평가 앞에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인생을 잘 사는 길입니다. 부디 금년 한 해도, 그리고 우리 인생 전체도 하나님 앞에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렇게 평가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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