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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적인 올바른 십일조 신앙 (말 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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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올바른 십일조 신앙 (말 3:7~12)


어떤 성도가 기도를 하다가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조금 여분의 돈만 있다면 기쁨으로 이 돈을 주께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제게 주어진 돈으로 가까스로 제 가족과 자녀를 양육하고 생활비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제게 조금 여분의 시간만 있다면 저는 기쁨으로 저의 시간을 주님께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주어진 시간으로 가까스로 저의 가정과 직장, 그리고 사업을 위해서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조금이라도 재능만 있다면 저는 기쁨으로 저의 재능을 주님께 드릴 것입니다.  그것으로 주를 위해 봉사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시는 바와 같이 노래도 잘 부르지 못하고, 특별한 기술도 없고, 건강조차 여의치 못합니다."

주님은 이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에게 여유 있는 돈과 시간과 재능을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제 그가 주 앞에 드려 주를 섬기는 것을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이 성도는 주님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할 수 없이 그에게 주셨던 돈과 시간과 재능을 다시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즉각적으로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기도했을까요?

"하나님, 저에게 다시 한 번 조금이라도 여분의 돈만 주어질 수 있다면 저는 기쁨으로 주께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돈으로 가족과 자녀를 양육해야 하고, 생활비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제게 조금의 시간이 다시 주어진다면 기쁨으로 이 시간을 주께 드릴 것입니다."

계속할까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셨습니까?  저는 요즘 나이를 먹어가면서 의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일년을 결산해야 할 그런 시간입니다.  우리의 드림과 섬김, 그리고 한 해 동안 주셨던 시간들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좋은 청지기였는지, 또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결산해야 할 시간입니다.

특별히 오늘 제가 전하고자 하는 말씀은 어떤 분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 마음 때문에 교회를 개척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이 설교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근간에 와서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세밀한 음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지금 목사로서 교인들에게 직무유기를 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고 올바르게 가르치고 선포하고 그들로 하여금 바르게 살아가도록 바른 신앙을 가르치지 못하는 목사,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축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지 못하는 목사는 지금 하나님과 교인들 앞에서 직무유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 선포되는 말씀이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부담이 된다면 거룩한 부담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오늘 선포되는 말씀 앞에 은혜를 받으면 여러분들이 교회와 하나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줄로 믿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37가지 비유 가운데 무려 17가지가 재물에 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우리말 성경에는 재물이라고 되어있습니다만 원문에서는 맘몬, 즉 돈 귀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은 단순한 재물이 아닙니다.  그 속에 인격이 있고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어디에 쓰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알 수 있고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관심이 먹는데 있습니다.  언제나 옷 사고 맵시내는 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옷에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여러분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십일조는 성도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십일조는 물질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드림과 섬김의 출발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십일조는 구약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율법의 규례만이 아닙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귀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멜기세덱을 만나 그의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립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십일조를 드린 사건은 율법이 제정되기 훨씬 오래 전의 일이었습니다.  구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사적에서 십일조가 가르쳐졌는가 하면, 뿐만 아니라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3장에서도 이 십일조의 교훈이 다시 등장합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신앙의 처음과 마지막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루는 죤 웨슬리 목사님이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돈을 잘 벌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도 가르쳤습니다.  그날 부인을 따라 교회에 왔던 남편이 "야, 목사님 설교 잘 한다."라고 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계속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돈을 잘 모아야 합니다.  부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아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말했습니다.  "오늘 목사님 설교 끝내 준다."  목사님이 계속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들을 위하여 쓰지 말고 이웃을 위하여,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풍성히 나누고 드리면서 살아가십시오."  그랬더니 이 남편이 나가면서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 죽썼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돈을 버는 것은 재주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돈을 쓰는 것은 재주 가지고는 안됩니다.  인격이 있어야 합니다.  돈을 버는 것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비슷합니다.  돈을 버는데 특별히 인격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돈을 쓰는 것을 보면 거기에 신앙이 있고 인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올바르게 쓰는 것은 종말이요 심판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을 보면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집니다.  번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하늘 백성과 땅의 백성들이 나누어진다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의 호주머니를 다스리기 전까지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 호주머니에 자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를 벌었느냐 하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후 고레스의 도움으로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하기를 이제 성전 건축만 끝나면 자동적으로, 그리고 요술같이 하늘의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게을렀습니다.  감사생활에 게을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리기서는 1장에서 감사생활이 없는 헛된 모습들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눈먼 것, 병든 것, 찌든 것을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먹기에는 좀 그렇고,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좀 아까운 그런 것들을 하나님 전에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불쾌하심을 좀더 쉽게 설명하려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 전에 드린 그것들을 총독에게 드려 보라고 하십니다.  그가 너희를 반가워하겠으며, 너희를 좋게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셨습니까?  제가 요즘 나이를 먹어가면서 뭐가 많아졌다고 했습니까?  의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이해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좀 더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희 집에 1주일 전에 돼지고기 5근이 선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하다가 그만 제때 먹지를 못했습니다.  마침 어제 저녁에 식구들이랑 먹으려고 했는데, 보니까 고기 색깔이 변하고 맛도 살짝 갔습니다.  먹자니 온 가족이 식중독에 걸리겠고, 버리자니 좀 아깝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가 우리 이 장로님께 포장을 해서 선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을 받은 이 장로님의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 상한 돼지고기를 보고서 반가워하겠습니까?  이 장로님이 저를 좋게 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가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대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이 잘못된 드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힘들여서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 그들이 대단히 자부심을 갖게 하는 그 성전의 문을 닫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더 무서운 말씀은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약속의 촛대, 축복의 촛대, 은혜의 촛대를 옮긴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나고도 무서운 심판입니까?

그런데 말라기를 보면, 이것은 비단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2장에 보면,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학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장막 가운데에서 끊어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3장의 문을 열면, 범죄하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돌아오라는 애절한 하나님의 외침과 부르짖음이 들립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제는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영적인 지도력을 상실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경제 파탄에 빠져있는 전 이스라엘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발 지금 같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7절에도 세 번씩이나 돌아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라.  무릎이 닳도록 엎드려서 기도해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심히 전도해라." 그럴 것 같은데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참으로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본문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마디로 말해서 너희가 십일조 떼어먹었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백성들아, 회개하라' 해 놓고 왜 갑자기 돈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말라기서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은 돈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 인격,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단순히 재물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순위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는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썩은 것, 병든 것, 찌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의 십일조는 온전한 십일조가 아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또 다시 심판하실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지키기는 하지만 온전한 지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봉헌예물을 드리기는 하겠지만 온전한 드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의 삶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을 우선 순위에 두는 출발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해서 하나님을 제일 우선에 두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이 기록된 말라기의 상황은 오늘 우리들의 상황입니다.  말라기의 외침은 오늘 우리들을 향한 외침입니다.  "십일조 떼어먹은 것을 회개해라.  물질을 잘못 쓴 것을 회개해라.  하나님 앞에서 우선적인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을 회개해라"  왜요?  돈주머니 회개가 가장 기초적인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장 쉬운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 회개를 못하면 다른 회개도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그냥 십일조를 떼먹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말씀하십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네 인생에 주인 됨이 누구인가를 알아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 직업, 이 사업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내 생명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우주 삼라만상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것을 잠시 맡아서 선하게 관리해야 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청지기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는 징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십일조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주인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확실한 징표가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내가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본문의 말라기 3장 10절에 보시면, 선지자는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실제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으로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십일조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한 믿음의 테스트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말라기서의 중심되는 메시지는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거부하고 살아왔던 그 백성들에 대해서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생활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일조부터 순종하고 실천하라고 말라기는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십일조가 구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여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그 의무가 더 이상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약 성경인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형편없었습니다.  이것은 보다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율법이 강조하는 의와 믿음, 사랑, 이것을 저버린 그들에게 십일조가 모든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주님은 더 중요한 의와 믿음을 저버린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십일조의 의무를 폐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이 강조하는 의와 믿음, 사랑도 행하고 십일조도 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십일조의 정신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까?
십일조는 무엇입니까?

십일조는 마치 선악과와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선악과가 저주의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잘 연구해 보면, 선악과는 축복의 나무였습니다.  많은 나무들이 있었습니다만 수많은 나무들 가운데 선악과만 말씀을 가진 나무였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리 따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는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곡식의 종자와 같은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가던 도중에 사랑하는 자식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곡식의 종자를 저들에게 먹이지 않았습니다.  날고기를 잡아먹으면서도 종자를 없애지 않았습니다.  왜요?  종자는 대륙에 가서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큼은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축복의 종자였습니다.  은혜의 종자였습니다.  내 생명의 종자였습니다.  이것을 소중히 잘 지키면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따먹고 나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지키면 축복이요 따먹으면 저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십일조는 축복의 종자입니다.  십일조는 은혜의 종자입니다.  이것을 지키면 나에게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8절 하반절에 보면, 십일조와 봉헌물을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십일조는 헌금이 아닙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저한테서 만년필을 빌려갔습니다.  그 만년필로 싸인도 하고, 메모도 하고 난 이후에 만년필을 돌려주면서 어깨에 힘을 딱 줍니다.  만년필을 빌려갔다가 쓰고 다시 내게 돌려줬다고 하는 것은 신실하다, 정직하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선행이 아닙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선행이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일조하고 폼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깨에 힘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년필 하나를 가져오고 "목사님, 잘 썼습니다"하면서 새 만년필을 한 개 끼어서 주면 그것은 선행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봉헌물이 따라 나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주 앞에 드리는 선교헌금, 사랑의 손길, 건축헌금, 차량헌금, 이런 것들이 다 봉헌물들입니다.

이 봉헌물이 주는 신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십일조를 뚝 잘라서 하나님 앞에 드리고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나머지 90%를 가지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면 안되고, 나머지 물질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아무리 정성스럽게 했다고 할지라도 삼천만원짜리 밍크코드 입고 가난한 자 앞에서 폼잡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머지 90%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역사를 위해서 소중하게 진실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때에 십일조와 봉헌물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상달된다.  이것이 봉헌물이 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를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
오늘 본문 10절에서는 온전한 십일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드려야 합니다.  이것 떼고, 저것 떼는 식으로 드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십일조가 아닙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고 노략물을 빼앗아서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나서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자기가 수고한 경비와 부하들에게 지불할 비용들을 다 제하고 난 십일조를 드렸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자기가 얻은 것 전부에서 십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 9절과 10절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공동번역에 보면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천벌 받을 것들아, 너희 백성은 모두 나를 속이고 있다.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주는지 갚아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그러니까 우리가 십일조를 드릴 때, 거기에 이것 저것 떼지 말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주는지를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4장 2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찬송과 가장 비슷한 단어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축복의 원인이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승리와 생존의 원인이 되셨다면 그 하나님을 찬송함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감사함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찬송의 의미는 감사의 의미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달된 제사장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아브라함의 응답이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십일조가 율법으로 제정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배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 속에 헌금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예배 속에 헌금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 헌금은 감사의 표현인 것입니다.  특별히 이것은 규칙적인 감사와 헌신의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사하기는 한데 이따금씩 충동적으로 합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면 하고 아니면 마는 충동적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규칙적인 감사요, 규칙적인 헌신의 표현의 가장 전형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십일조는 최대의 헌신이 아니라 최소의 의무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 십일조를 연구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는 세 가지의 종류였습니다.
첫째는, 회막에서 정시간으로 봉사하고 있었던 소외 레위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십일조를 제1의 십일조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유월절, 오순절과 같은 절기가 되면 사람들이 한 주 두 주 이상씩 성전을 중심으로 공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 그들의 모든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소위 회식의 십일조를 제2의 십일조라고 불렀습니다.
그 다음에는 과부나 나그네, 고아와 같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돈을 모아두었다가 3년에 한 번씩 드렸습니다.  이것을 구제의 십일조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모두 합해서 계산해 보면 그들의 수입 가운데 약 23%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단지 10%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최소한의 의무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십일조를 통해서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의 이중적인 축복을 누렸습니다.  하나는 개인이 누리고 있었던 축복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의 축복이었습니다.  개인의 축복이라는 것은 십일조를 드리면서, 십일조가 늘어가면서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 가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헌신이 더해 가는 축복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십일조가 늘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축복이 내 삶 속에서 증가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삶에서 십일조가 늘어가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저는 내년에 여러분들의 십일조가 더 늘어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옆 사람에게 이렇게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내년에 십일조를 더욱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일조가 느는 것이 축복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십일조는 이런 개인적인 축복을 누리게 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공동체에게도 축복을 제공합니다.  공동체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을 힘있게 전개할 수가 있습니다.

선지자 말라기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십일조를 기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고가 비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3장에 보시면, 십일조를 드려 내 창고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창고가 비어가고 있었습니다.  창고가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말라기는 그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일조의 기피, 또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기피, 그것이 오늘 이 땅을 황무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가 이 땅에 임하고 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십일조에 대한 순종, 이것이 모든 것의 회복이라고 지금 말라기는 그의 메시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일조의 순종이 교회를 회복하고, 우리의 가정을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이 땅에서 회복할 수 있다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목회하고 계시는 L. 픽켙 목사님이 했던 설교 가운데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번은 그 교회 여전도회장님이 목사님을 찾아오더니 목사님께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목사님, 다음 주일날 광고를 해 주세요.  교인들에게 빈 병, 폐품을 전부 모아 가지고 와 달라고 해 주시면 그걸 팔아서 교회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목사님이 설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먼저 잘라서 바치는 것이지 폐품을 팔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데 돈이 모자라서 그래요."
너무나도 간곡하게 이야기하길래 목사님이 "알았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주일날 목사님이 이렇게 광고를 했습니다.
"여러분 집에 있는 빈 병이나 폐품이나 휴지 조각이 있으면 전부 가져오십시오.  그것을 모아 팔아서 우리 여전도회장님 살림살이 좀 보태주려고 합니다.  여전도회장님 용돈 좀 마련해 드리려고 합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여전도회장이 길길이 뛰면서 담임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나를 어떻게 보고서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나를 거지로 아셨나요?  자존심 상해서 교회 못 나오겠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정중하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회장님, 그 빈 병 팔아서 모은 돈으로 회장님이 쓰면 자존심 상하고, 하나님이 쓰면 하나님은 그러면 자존심도 없는 분이신 줄 알았습니까?"

그래도 여전도회장이 화가 안 풀렸습니다.  그날 밤 잠을 자지 못하고 씩씩거리다가 늦은 밤에 잠이 들었는데 천국에 갔더랍니다.  갔더니 온 교인들의 천국집이 보이는데 황금으로 지은 집사님 집, 진주 보석으로 지은 집사님 집들이 가득하게 있는데 자기 집이 없더랍니다.

동네가 끝나는 한쪽 개울가 아랫동네에 기둥은 병 조각 부셔서 세우고, 벽은 휴지조각 뜯어서 갖다 붙인 집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이것이 누구 집인가 하고 가서 봤더니 자기 이름이 큼지막하게 써 있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깼습니다.  그리고 그는 회개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구나!"
그 다음부터는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하나님을 가장 중심자리에 높여서 살아가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어려운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더 결단하고 하나님께 풍성히 드리면 환난 날에 네가 나를 영화롭게 했으니 이제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가장 높이고 내 삶의 중심자리에 모시고 살아가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가장 자리로 몰아내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드려진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이 영혼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이 하나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질 수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개인과 공동체에 주신 특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기쁨과 축복을 아십니까?

아무쪼록 선한 사업에 부한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위하여 넉넉한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 해를 결산하고 새 해를 계획하는 시점, 새 해를 향한 헌신,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성경적인 올바른 십일조의 헌신과 실천에서부터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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