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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명의 신앙 (민 14:1-1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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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의 신앙 (민 14:1-12, 21:4-9)


우리는 지금까지 구원의 신앙이라 할 수 없는 헛된 신앙의 유형을 살피면서 구원신앙의 여러 면을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오늘은 구원의 신앙이 어떻게 실증되어 질 수 있는지 하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구원받은 자라면 그 사실이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뚜렷하게 실증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신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선명하게 실증되는 것인데 오늘은 구원의 신앙이 어떻게 실증되어지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Ⅰ. 사명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그 신앙이 실증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왜 구원받았는지? 왜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여 내셨는지? 하는 것이 점점 뚜렷하여져 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써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하는 것이 더욱 선명하여 갑니다.. 자신의 “존재의 의” 나 “사명”에 대한 자각이 더욱 뚜렷하여 간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신앙은 시간이 감에 따라 사명에 대한 자각이 뚜렷하여 가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초보가 지나면 사명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구원에 대한 체험이나 감격이 있는 것만으로는 실증되지 않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명서 감격해 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모습이 있는 것만으로는 구원의 신앙이라고 할 만한 증거가 미약한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그러한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는 체험을 통해서 구원의 감격도 있었고 찬송도 있었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사건 쓴물이 단물이 되는 사건 하늘에서 양식이 내려오는 일과 같이 숱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40년의 광야생활과 더불어 다 죽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민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민14:22-23)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민14:23)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차례 하나님의 이적적인 역사를 통해서 구원의 손길과 인도하심을 체험하고서 감격해하고 찬양하기도 하였습니다(출15장). 그러나 그러한 이적에 대한 체험으로 인한 감격과 찬양이 있었지만 그러한 체험이나 감격이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신앙의 형태였던 것입니다. 그들 안에 구원의 신앙이 있었다고 할 만한 증거들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구원의 기쁨도 있습니다. 숱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경험들도 있습니다.. 미래의 영광스런 천국의 소망도 있습니다. 그러한 그것이나를 위하여 좋은 것들이기 때문에 따라왔고 쫓아 가지만 내가 왜 구원되어졌는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 좋은 것들도 얼마가지 않아 원망으로 변하여 불신의 자리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유익을 위하여 계시고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니까 따라갑니다. 예수믿고 천당간다니까, 예수 믿고 만사형통한다니까 따라가는 식입니다. 이런 정도의 신앙형태로서는 그의 구원이나 영생을 확실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리 감격이 있고 기쁨과 감사가 있다 할지라도 혹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간증들이 무성할지라도 그것으로는 그가 구원적 신앙을 가졌는지 분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2.구원의 신앙은 사명에 대한 자각으로 실증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적에 대한 체험과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는 감격도 하고 찬양도 하였는데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간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두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민114:3과 민21:5에 있는 그들의 말에서 잘 나타납니다. 우선 출애굽1세대들의 말을 들어보시지요! 그리고 이어서 출애굽2세대들의 말도 들어보시지요!

(민14: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민21:5)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대대로 이렇게 한결같이 걸려 있었던 문제는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는가?”를 알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두루두루 체험하고 그때마다 감격하고 찬양을 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일련의 구원의 손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는지?에 대해서는 배우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좋은 것을 주시기에 감격해 했고 찬양했을 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셨고 어떠한 세계로 인도하시려는 것인지? 그러한 세계에 들어가서 어떠한 사회를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는지?“ 하는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때마다 감격해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들어가려는 세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위기에 처하자 원망을 하였습니다.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는가? 차라리 애굽에서 죽도록 놔두실 일이지 여기까지 데려와서 죽이시려고 하시는 것인가?” 하고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내셔서 맡기신 사명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약 속의 땅 사명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쓸모없는 인생으로 배회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신앙을 구원의 신앙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구원받았다는 감격만 가지고서 주저앉아 있으면서 왜 구원하셨는지? 어떠한 사명을 위해서 구원하셨는지? 하는 자각이 자꾸 생겨지지 않으면 신앙을 버리게 되는 때가 오는 것이요 구원의 신앙임을 확증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신앙은 시간이 감에 따라서 사명에 대한 자각이 뚜렷하여져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생한 후 시간이 가면서 깨달아 지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왜 구원되어 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되어진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게되는 것입니다. 사명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들어가야 할 가나안이 어떠한 세계이며 무엇을 위하여 들어가야 하는가를 깨닫고 그 거룩한 사명을 귀중히 여겨 약간의 어려움도 극복했어야 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이후에 언제까지나 이 사실을 생각지 않고 살면 구의 신앙을 구원의 신앙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내셨는가에 대한 자각이 점점 뚜렷하여 갈 때에 어떠한 위기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는 감격만을 가지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구원해 내셨는가를 자꾸 각성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꾸 각성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구원하신 본의에 합당한 자로 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부르심에 합당한자의 모습을 자꾸 갖추어 가는 모습이 시간선상에서 뚜렷하여 갈 때에 ‘아 저 사람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구나!’하고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Ⅱ.어떤 종류의 사명에 대한 자각이 있게 될까요?

그런데 우리가 사명에 대한 자각을 갖게 된다고 할 때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명이란 사명 받았다고 모든 것 내던지고 운동하고 돌아 다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야만 사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자리에서 자기를 하나님 백성답게 가꾸는 일입니다. 존재적인 사명은 생각지 않고 사역과 관련된 사명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차적으로 우리에게서 일어나게 되는 자각은 자신의 존재의 성격이 어떠해야 하겠는가를 깨닫고 그러한 사람으로 자꾸 가꾸어져 가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태나 품성을 말씀하시고서 곧 이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사명을 언급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렇게 소금과 빛으로써의 맛과 성격을 드러내면 그것으로써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자꾸 무엇을 해야만 사명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일차적으로 어떠한 존재로 가꾸어져 가야겠는가 하는 것에 사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빛과 소금으로써의 존재의 성격을 상실하고서도 무엇을 자꾸 하기만 하면 사명이 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 일과 관련해서 자꾸 활동을 하는 쪽에서의 사명은 이차적이고 비본질적인 사명입니다!
2. 존재의의나 성격에 부합한 모습으로 자신을 가꾸어 가는 것이 일차적이고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Ⅲ. 사명의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역사적 과정속에서(시간이 지나가면서)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자꾸 터득하여(배워)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배려(配慮)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사명에 대한 자각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 역사적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배려를 하셨습니다. 
우선 출애굽으로부터 시내산까지의 광야 여정을 통해서 가시적인 ‘표적’들을 베푸심으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하심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도우시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에 대해서 계시하여 주셨습니다(사건계시).

그리고 시내산에 이르러 1년 동안 사명을 자각케 하시는 말씀을 주셨고 여러 제도 (성막과 제사제도)와 율법을 주셨습니다. 말씀계시와 제도계시를 통해서 사명을 자각케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룩한 나라요, 제사장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나라로써 모습을 가꾸어가야 할 사명이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문화를 이루어 내야 할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자태를 이방 나라에 중시하여 어느 시점에 가서는 이방인들도 그 나라의 찬란함에 반하여 들어오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2.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자세히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베푸신 기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서 알아가지 못하였고 기적만을 추구하는 기적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성막이나 제사제도를 통해서 얼마나 거룩한 나라가 되어야 하는가를 배우지도 않고 제도만을 세워나가고 반복하는 형성주의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질서나 정신을 배우고 터득하지 못하고 율법을 조항으로써 열심히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계율주의로 나아갔습니다. 

3.그 결과는 사명의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배도하였습니다.

일련의 역사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여러 계시들(사건계시와 말씀계시)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려고는 않고 기적자체나 제도만을 추구하고 세우는 쪽으로 나아간 결과로 사명에 대한 자각이 서지를 않았습니다. 사명에 대한 자각이 없게 되자 사명을 감당해야 할 시점에서 닥치는 작은 어려움에도 배도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명의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배도하게 되고 그러한 신앙이라면 구원의 신앙이라고 말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입니다.

Ⅳ. 사명의 신앙으로 나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꾸 더 깨달아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계시”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이나 ‘제도’나 ‘율법’, 등 다양한 장르의 말씀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일하시고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을 늘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 데 어디에서 나를 구원하여 내셨고 왜 나를 구원하여 내셨는지? 어떠한 세계로 이끄시려고 건져내셨는지? 그러므로 나는 어떠한 존재가 되어가야 하는지?하는 사명에 대한 자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 경륜하에서 사용하신 여러 제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일하시는지 내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자꾸 터득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도나 신행들을 자꾸 반복해서 하는데 의의를 두지 말고 그러한 제도나 의식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고 나는 어떠한 존재로 살아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형성주의적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한 제도들이나 신행들이 은혜의 방도로 전혀 쓰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존재파악이 뚜렷하여 가는 쪽으로 사용될 때 은혜의 방도로 쓰이는 것이 됩니다. 

율법을 통해서도 법정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성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터득하여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성격을 터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건들도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경영해 가시는가를 터득하여 가고 그렇다면 자신은 하나님께서 경영해 가시는 그러한 역사속에서 어떠한 성격의 행보를 해야 하겠는지를 자꾸 터득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세계로 자신을 이끄시기 위해서 구원하시고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는가 자꾸 깨달아 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 사명의 신앙으로 나아가게 되고 어떠한 앞에서도 그러한 사명을 위하여 매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취하고 나아가야 할 삶의 성격을 포기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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