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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믿음 (롬 4: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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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 (롬 4:13~25)


우리가 로마서를 계속 묵상을 하면서 강조하고 있고, 또 반복되는 논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은 첫째는 행위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공로나 업적, 어떤 율법을 다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반복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두 번째로, 구원이 전적인 은혜의 사건임을 말씀해 줍니다. 나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위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인 것입니다. 내가 그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될 자격이 있어서 그것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 서서 설교할 목사의 자격이 있어서 여기서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은혜로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2장 8절에 보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감사하면서, 늘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세 번째로, 죄의 용서를 동반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죄가 용서받을 때 가장 큰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재물을 얻는 행복, 자녀를 낳는 행복, 오늘 아침에도 어떤 새가족 부부가 이제 막 병원에 가서 출산 직전이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화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순산할 수 있도록 기도해 드렸는데 자녀를 낳는 기쁨, 행복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행복 중 가장 큰 행복은 죄가 용서받는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목사님! 몰라서 그렇지 돈 많은 것이 제일 큰 행복이에요. 목사님이 그런 돈을 안 가져봐서 그런 거예요.”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스런 자녀들이 있습니다. 또한 많은 재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를 꼭 버려야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버리시겠습니까? 역시 돈을 버릴 것입니다. 돈은 나중에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를 버릴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을 버릴 사람은 없습니다. 돈은 버릴 수 있습니다. 돈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는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림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받은 큰 복 중에 하나가 우리 죄가 용서받는 복, 그 행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얻는 축복에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죄가 용서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늘의 기업을 이어받을 상속자, 후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함께 읽어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여러분! 예전 성경에는 후사라고 나오고 우리 성경에는 상속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업을 이을 자가 상속자입니다. 땅의 상속자는 대게 혈연관계로 주어집니다. 종족보존의 법칙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은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그 장로님의 고민이 ‘이 회사를 누구에게 물려줄까?’입니다. 아들에게 물려주려하니 이 아들이 조금 시원찮습니다. 고민하다가 결국은 그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이 아들은 피가 섞여 있기 때문에 그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든든한 후견인을 세워서 그 아들을 잘 돌봐줄 수 있도록 합니다. 아들은 그 장로님 회사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늘의 상속자가 있습니다. 세상의 상속자는 자기 자식에게 물려줍니다. 그러나 하늘의 상속자는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늘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늘의 상속자가 되었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도, 그리고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오늘 이 땅의 성도들도 믿음으로 하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선언인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예외 없이 믿는 자에게는 하늘의 기업을 얻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유대인에게도 믿음의 조상이고, 우리 이방인 성도에게도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 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도 되고 우리 이방인의 영적인 조상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면 우리도 오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천국의 상속자로 인정받았다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천국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할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 로마서가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브라함이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창세기 15장에 나옵니다. 그러나 율법은 아브라함 이후 400년 후에 모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율법의 시대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바로 율법 이전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이후에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창세기 17장에서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라는 것은 남성의 생식기의 표피를 잘라냄으로 증거를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을 나타내는 의식이고 유대인이라는 상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할례 받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그것을 확정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분들이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세례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세례 받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례식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집사나 권사가 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구원은 직분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목사라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제한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갔더니 이러더랍니다. 많은 사람이 천국 문에 들어가는데 목사님도 천국에 갔고, 신부도 갔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앞자리에 서려 했더니 앞자리에 세워주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일만 하다 왔는데 왜 앞에 안 세워줍니까?” 입장을 좀 빨리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지기가 말합니다. “저기 온 성도들은 다 헌금하면서 열심히 교회봉사를 했는데 당신들 목사하고 신부는 교회에서 사례비 받으면서 봉사하지 않았소? 저 뒤로 가시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목사이기 때문에, 신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반복적으로 강조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우리에게 설파해 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것을 잊어버린다는데 에 문제가 있습니다. ‘공로를 쌓아야 구원받지.’ ‘내가 직분이 높아져야 구원받지.’ ‘내가 무언가 업적을 통해서 구원받지.’ 이런 생각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로주의입니다.

또한 자칫하면 율법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살아야지 구원받지.’ 내가 받은 은혜가 고마워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감격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살아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면 살다보면 우리가 공로주의에 빠져버리고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자기에게만 적용하면 괜찮은데 남에게도 율법을 적용해 버립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되어 버립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못하니 구원 못 받을 거야.’ 여러분! 하나님은 그 사람의 행위나 업적이나 외형이나 직업이나 직분 때문에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날 아침에 벌떡 잠에서 깨어났는데 신문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제 밤에 돈 때문에 걱정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 신문을 보니 내가 큰 재벌 회장의 상속자로 나와 있다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작은 아버지인데 그분이 자식이 없어서 상속자로 누구를 삼아야 할까 고민하다가 조카인 나에게 그 기업을 물려주게 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돈 때문에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하루하루 감사하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찌 보면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천국의 상속자라는 놀라운 이 은혜, 놀라운 선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는 천국의 상속자라는 이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천국을 이어받을 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장차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천국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얻은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너희에게 응답할 것이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가서도 상속자의 축복과 영광을 누리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도 우리 하늘 아버지의 축복과 공급하심과 그 응답하심 가운데서 여러분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이 땅에서 살다가 죽어서 천국 가서 잘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어서 물론 당연히 영원히 구원받고 영생하는 축복을 누리지만 이 땅에서도 하늘 아버지의 공급하심과 보호하심 가운데 정말 감사와 감격과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이렇게 하늘의 상속자로 삼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요? 본문 17절 말씀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주관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창세기 22장에 가면 자기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했을 때 그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갑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믿음으로 충성해서 바치지만 이 죽은 아들이 다시 살 것을 확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의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 그분은 바로 생명의 주관자라는 것입니다.

또 그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없는 것을 어떻게 있는 것 같이 부릅니까? 방에 지금 아무도 없는데 부르면 누가 나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분은 없는 데서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신다.” 그것은 바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창세기 18장 14절에 보니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여러분! 하나님이 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고 해와 달과 온 우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비를 내리시고 이 역사를 뒤바꿔놓으실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함이 없다. 불가능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속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의 좁은 소견으로 하나님을 시시한 분으로, 능력 없는 분으로, 종이호랑이 같은 분으로 그렇게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작은 새장 속에 새를 넣어놓고 날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새장 속에 가둬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축소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전능하신 여호와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또 하나님을 ‘엘 샤다이’이라고 부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그가 그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 18절 말씀을 함께 읽어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을까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하는데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었습니다. 무엇을 바랬을까요? 바로 자녀를 바라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지만 그는 아직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번성한다.”고 약속해 주셨지만 아브라함은 아직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고민하고 있을 때, 갈등하고 있을 때 바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우리가 잘 알다시피 창세기 15장 5절, 6절 말씀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밖으로 이끌고 나가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별을 세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 후손이 저 하늘의 뭇별처럼 그렇게 번성할 것이다.” 창세기 15장 6절에 보니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나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이 이제 하늘의 별처럼 그의 후손이 번성할 것을 하나님이 약속하실 때, 그 약속을 믿었기에 하나님이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 어떤 상황 속에서 믿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 정말 의로 여기심 받을 정도가 되었을까 본문 19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가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99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00세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다.” 남자로서 성기능이 완전히 없어진 것입니다.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생식기능이 없습니다. 또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라고 했습니다. 사라는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할머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수도 끊어지고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인이 아닙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알았습니다. 나도 아이를 낳을 수 없고 우리 부인도 아들을 낳을 수 없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몰랐다면 혹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았습니다.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도대체 자기와 자기 부인은 아기를 낳을 수 없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는 것. 하나님께서 “너의 후손은 너의 종 엘리멜렉이 아니고 네 몸에서 날 자다.” 나는 아이를 못 낳는데 이 사실을 알고도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본문 20절에 보니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나옵니다. 믿음이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참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허물기 위해서 하루에 성을 한 바퀴씩 돕니다. 6일 동안 여호수아를 따라서 돕니다. 그리고 마지막 칠일 째 가서 함성을 지를 때 그 성이 허물어지는데, 인간적으로 보면 성이 좀 허물어지려면 첫째 날 한 바퀴 돌고 오면 성의 금이 좀 가거나, 벽돌이 좀 떨어져야 합니다. 둘째 날 돌고나면 동쪽 벽이 금이 좀 가야 합니다. 셋째 날 돌고나면 북쪽 벽이 금이 가고 벽돌이 여섯 장은 떨어져야 합니다. ‘이제 곧 허물어질 모양이다.’ 그러면 얼마나 믿기가 쉽습니까? 그러나 여섯째 날이 되고 여섯 번을 돌고 와도 성은 아직 견고합니다.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 견고한 성이 도대체 어떻게 허물어진단 말이야.’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칠일 째 믿음을 가지고 성을 일곱 번 돌고 성을 향해 함성을 지를 때 그 성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믿음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구약은 옛 약속, 신약은 새로운 약속입니다. 구약에 주시는 약속은 이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메시아가 와서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이천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구유에서 나시고, 동정녀의 몸을 통해서 성령으로 나심으로 그것이 증거되었습니다. 확증되었습니다. 응답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크게 보면 주님이 다시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계절이 바로 대림절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교회 절기로 대림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대림절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다시 우리 마음속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계절인 것입니다. 대림절은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서 기도하는 계절이 바로 대림절, 혹은 대강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성탄절에 보면 어떻게 합니까? 

요즘 서울에서는 시끄럽다고 잘 안하지만 시골에서는 늘 했는데,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교회 성가대나 구역장님들, 청년들 나와서 찬양단을 조직해서 전 성도의 가정, 한 가정도 안 빼놓고 새벽송 찬양을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잠깐 잠들었다가 새벽 1시쯤 찬양단이 오면 문을 열고 그들을 맞이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맞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등을 들고 나가서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림절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의 약속, 우리는 그 대림절의 주님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깨어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그의 믿음을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에게 구원을 선물하셨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기를 잡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배에서 말씀을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아주 어려운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베드로야 저 깊은데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베드로는 지금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힘들어 죽겠습니다. 이제 그물 정리하고 들어갈 판인데 이 아침에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더구나 고기가 잘 안 잡히는 깊은 데에 그물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니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을 의지해서 깊은 데에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신 말씀을 반드시 실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을 붙드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면서 “내가 너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할 것이고 너의 후손으로 큰 민족이 되게 할 것이다.” 자녀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창세기 13장 16절에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나뉘어졌는데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동서남북을 바라봐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 네 자손은 땅의 티끌같이 될 것이다.” 창세기 15장 4절 이하에 보니 “네 몸에서 날 자가 너의 후사, 상속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별처럼 너의 후손이 번성할 것이다.” 여러분! 이 약속을 아브라함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약속을 믿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노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느 날 노아에게 방주를 건축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무려 100년 동안 노아는 묵묵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는 물에 뜰 수 있는 큰 배입니다. 짐승도 실고 사람도 실을 수 있는 큰 배를 만드는데 100년이 걸렸습니다. 더구나 그것을 바닷가나 강가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만들었습니다. 남들이 보고 다 미친놈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어디 장마가 온다고 배를 지어. 더구나 산 위에다가.’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했을 때 결국 하늘 문이 열리고 폭우가 쏟아져서 온 지구가 다 물에 잠길 때 참으로 그 방주를 통해서 노아의 가족이 구원받고 온 우주에 짐승들이 구원받고, 식물들이 보전될 수가 있었습니다.

정말 믿음이라는 것은 상식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상식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살아갑니다. 이성적으로 봅니다. 합리성을 봅니다. 과학적으로 따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상식을 초월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법칙입니다. 기브온에서 여호수아가 싸울 때 태양을 향해서 명령했더니 태양이 멈춰 섰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이성으로, 과학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 한강 속에 뛰어들면 뜰까요? 가라않을까요? 일단은 가라않겠죠. 제가 한강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못 걸어갑니다. 못 걸어가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간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법입니다.

세상의 상식을 믿음의 법은 초월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비오지 않기를 위해 기도했더니 비가 3년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비오기를 기도했더니 다시 하늘이 비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법칙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물론 세상의 상식과 이성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성과 상식을 초월하는 믿음의 생각, 믿음의 눈을 여러분이 소유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홍해가 갈라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고자 하실 때 그 홍해가 갈라지고 이백만의 이스라엘 백성이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더니 그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믿음,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바라보는 믿음,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 본문 20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을 봅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바로 이 사건, 창세기 15장 5절, 6절에 이 사건을 바울은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확신하는 믿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약속하실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드시고 의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의심은 모든 것을 허무는 모래성과 같은 것입니다. 의심하는 자는 아무것도 주께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었음으로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뉴욕에 예로부터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뉴욕에 유대인들이 어느 구역을 차지하고 빌딩을 구입해 나갈 때 아침마다 보면 한 할머니가 그 아침마다 한 지역을 계속 돌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며 기도합니다. 기자가 가서 “당신!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그녀는 여호수아 1장 3절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온 민족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그래서 그 할머니는 그 아침마다 도시를 걸으면서 빌딩을 붙들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모든 빌딩이 유대인의 빌딩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지역이 점점 유대인의 지역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은 안산 동산교회가 굉장히 큰 교회가 되었는데 김인중 목사님이 개척하실 때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지역이 이제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는데 아파트가 설 때마다 아파트 기둥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파트 입주하는 모든 분들이 우리 교인이 될 줄로 믿습니다.” 믿음입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그 약속을 붙들고 기도할 때 그것이 바로 응답으로 현실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없어도, 지금껏 여러분의 환경이 열악할지라도 이 믿음을 붙들 수가 있다면,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여러분이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우리 영혼이 구원받고 죄가 용서받고 의롭다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을 누리며 성취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아름다운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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