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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왜 예수님은 오셨을까? (막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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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은 오셨을까?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성탄절(Christmas)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기로 탄생하신 생일날입니다.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것을 기념해서 예배를 드리는 날이어서 크리스마스(Christmas)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 그날이 성탄절인데 이 세상에 지금까지 수천억의 사람들이 탄생했다가 죽어갔거늘 왜 이날만 사람들이 흥분하고 기뻐할까요? 그것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로서의 기독론으로 해석을 하면 예수님은 곧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신 神입니다. 그 神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날이 곧 예수님의 생일인 성탄절이기에 온 인류가 함께 기뻐하고 또 기뻐합니다. 그 기쁨을 억누르지 못해 다른 사람들과 선물을 나누어 주며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전달하곤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 위에 계시는 신이신데 왜 이 땅에 오셨을까?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incarnation)이유가 무엇일까? 성탄절을 앞에 두고 이 질문의 답을 추적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분석을 합니다. 역사학자들도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평화를 주시기 위해, 갇힌 자를 풀어주고, 억눌린 자에게 자유함을, 병든 자에게 건강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등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성탄절 때만 오면 제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여기 ‘인자’(the Son of Man)은 메시야적 칭호를 사용하여, 예수님 자신을 객관화시켜 이야기의 모델로 삼으시려는 예수님의 의도적 표현입니다. 그러니 여기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겸손한 예수님의 정체성(identity)은 물론,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거룩한 권위(authority)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자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섬김을 받으려’(to be served)온 것이 아니고 ‘섬기기 위해’(to serve) 오셨다고 직접 밝히신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세상을 섬기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직접 지으신 사람을 섬기려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하나님의 결단이었습니다. ‘너희를 섬기는 자’라는 말은 ‘너희의 종’(your servant)이 되겠다는 결단입니다. ‘섬기는 자’의 원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란 ‘일꾼’, ‘협력자’(helper), ‘봉사자’(servant), ‘시중드는 자’라는 의미 외에 ‘분주히 먼지를 일으키며 다니는 자’란 의미까지 담고 있어서 최선과 최고의 봉사를 아낌없이 쏟아 붓는 일꾼이라는 강한 인상을 주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실 때 어떤 것을 봉사해 주시겠다는 뜻이었을까요? 이 물음을 앞에 놓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누군가 절대적인 능력을 갖고 나를 도와주고 나를 위해 봉사해 준다면 나는 어떤 것을 기대하거나 요청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나를 향한 신앙의 차원에서 몇 가지를 내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왜 내게 오셨을까?
첫째는 나를 격려하시고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꾸짖으실 때는 호되게 꾸짖다가도 이내 격려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불순종의 죄를 지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 것을 명하셨지만 그들은 불순종했습니다. 마귀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범죄한 그들을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십니다. 그러나 에덴동산 밖에서 닥쳐올 거친 노동과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보호하시기 위해 가죽옷을 입히는 자상함을 창3:21에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격려하고 일으켜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아담의 범죄를 보시고는 숨어있는 그에게 찾아오셔서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부르셨습니다. 죽은 지 사흘이 넘어 무덤에서 썩어가던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 부르셨을 때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살아갈 희망이 보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도 발견합니다. 63세가 된 할머니 패니 크로스비는 눈먼 봉사였습니다. 그가 요11:28을 읽는 중에 “마리아야,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는 말씀에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라버니를 잃은 절망과 슬픔을 한방에 날려버린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 음성을 들은 크로스비는 즉시 펜을 들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찬321장

예수님이 너를 부드럽게 부르신다
지금 부르신다 오늘 부르신다
사랑의 밝은 햇빛을 떠나 
너는 왜 숨어다니느냐
주께서 너를 부르고 계신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지금도 부르신다

예수님이 쉼을 주기 위해 오늘도 부르신다.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복을 받게 하려고 오늘 너를 부르신다
주님은 너를 외면치 않으신다

주님은 지금도 너를 기다리신다
더 지체 말고 나아오라
너의 죄와 함께 주께 나아오라

그의 음성을 들어보라
그의 이름을 믿는 자는 기뻐할 것이다
속히 일어나 어서오라
주께서 너를 부드럽게 부르신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격려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소년이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음악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교수들은 그 소년을 보고 “네 손가락이 너무 짧고 굵으니 다른 악기를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코넷(Cornet)도 하고 다른 악기도 시도했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만찬장에서 피아노를 쳤습니다. 그때 한 신사가 찾아와서 “너는 피아노에 소질이 많구나. 열심히 공부해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때 곁에 있던 손님이 “이분은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이란다. 이분의 말이면 믿어도 좋다” 그 순간 소년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긴 듯 했습니다. 그날부터 다시 열심히 노력해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니 그가 곧 잔 파데레우스키(Jan Paderewski)입니다. 

“내가 섬기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병든 자, 가난한 자, 갇힌 자, 억눌린 자, 절망하는자, 버림받은 자, 소외된 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소망과 살길을 제시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부드러운 그 음성으로 우리 곁에서 격려하시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에 우리는 성탄절이 오면 흥분되고 기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내 사정을 살피시고 내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엇이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면 곁에서 살펴보고 필요한 것을 직접 채워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8년 동안이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신음하던 중풍병자에게 찾아가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병상을 털고 일어나 건강하게 사는 것임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곳까지 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자리를 들고 걸어가거라.”(Do you want to get well? …Get up. Pick up your mat and walk). 말씀하실 때 그 병자는 곧 나아서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구태여 베데스다 연못까지 안 오셔도 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그의 곁에까지 가는 것이 그에게 더 큰 힘이 됨을 아셨습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의 권사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예배를 드리는데 맏아들이 너무 슬피 울고 계셨습니다. “불효자는 웁니다”처럼 살아계실 때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을 후회하며 우는 것이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관예배를 마치고 돌아서는 제게 찾아와서 “목사님, 이제 어떻게 살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던 어머님이 안계시니 마음이 너무 허전합니다.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하면서 다시 통곡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곁에서 일일이 나의 모든 것을 챙겨보시면서 기도하는 것과 멀리 피상적으로 알고 기도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곁에서 기도하시는 어머니가 그의 삶에는 큰 버팀목이었고 지지대였고, 보호대였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하늘나라에서만 내려와 보시는 神이 아니라, 우리 곁에 오셔서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실 때 우리에게는 더없는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Jesus)이라는 이름의 의미도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셋째로 바르게 살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왜곡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반듯하게 사는 길로 우리를 친히 인도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나 혼자만의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사랑을 나누며 사는 삶의 길을 우리 앞에서 열어 가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인생의 바른 길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오면 많은 사람들이 받은 복을 이웃과 나누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보고,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합니다. 이웃돕기 성금도 제일 많이 걷히는 절기가 바로 성탄절기입니다. 바르게 사는 길은 이웃과 함께 사는 길입니다. 바르게 사는 길은 이웃과 나누는 삶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그 사랑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지금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해도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양식이 없어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이 없어 거리나 지하철 입구에서 추운 밤을 보내는 노숙자들이 있습니다. 학비가 없어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번 성탄절기에는 우리 은평교회 교우들이 불우한 이웃을 위해 꼭 한 가지씩 선물을 정성껏 주는 절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불우한 이웃에게 한 가지씩 선물을 줍시다. 따뜻한 목도리 하나라도 좋습니다. 양말 한 켤레라도 좋습니다. 따끈한 호빵 한 봉지라도 좋습니다. 불우한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그들의 손에 사랑의 선물을 나누어 줍시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교회주변의 불우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선물을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 그때 오셔서 우리 모두 함께 하셔도 좋습니다. 그것이 인생을 바르게 사는 길입니다.

이번 성탄절은 내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절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왜 내게 찾아오시는지를 깨닫고 준비하고 있다가 그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만나 뵙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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