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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까지 믿음을 지킵시다 (딤후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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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믿음을 지킵시다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눅18장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시기 위해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불의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믿고 의지하고 도와야 할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무시하는 것도 불의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의 피조물을 무시하고 멸시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곳이나 이러한 사람에게서는 아무 선행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의 개념과 기준을 잃어버린 상태가 불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송사를 맡아 재판하는 재판관들에게 특별히 잊지 말고 명심해서 시행해야 될 몇 가지 사실을 당부하셨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특별히 과부를 압제하지 말하는 것입니다(렘 22:3). 그리고 둘째로는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라는 것입니다(사 1:17). 셋째로는 힘없고 연약한 과부를 위해 변호하라는 것입니다(사 1:17). 그러나 불의한 재판관은 이러한 주님의 명령을 버리고 자기를 위한 이기적 기준을 따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는 횡포를 부렸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분명히 법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야 할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당한 법의 보호와 인도를 받지 못하여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를 도와주거나 아니면 도우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처지에서 이 가난한 과부는 자기 자신을 위한 노력을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위하여 과부는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호소를 외면하고 묵살했지만 한 번, 두 번 찾아와서 호소하는 횟수가 많아지자 번거로움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찾아옴을 번거로움을 느끼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 과부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오직 끈질긴 호소로 자신의 문제를 악덕하고 불의한 재판관으로부터 해결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호소, 이는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보살핌의 보호를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압제에서의 해방입니다. 그리고 연약함에서의 인도하심입니다. 또한 대적의 방해에서 형통함의 약속입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보호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밤이나 낮이나 쉬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의무입니다. 우리는 이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가난한 과부와 같이 결코 낙망하지 말고 끈기 있게 응답을 얻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그리고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핍박받는 이웃과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생명을 다하는 열정을 가지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사역을 돕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낙망을 하게 하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 크게 낙망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숨겨 있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내에 대한 훈련을 거듭하시며 어떠한 경우에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을 계속해서 찾아간 과부에게서 우리는 분명히 자기의 목적을 어떻게 해서든지 성취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게 됩니다. 그 의지가 있었기에 그 과부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 수 있었습니다.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 바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비록 그 응답이 더딜지라도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이 일들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기에 주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합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그리스도로서의 인자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고 또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않는 기도의 자세를 견지하는 실천적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 말은 인자의 재림이 지연됨에 따라 많은 주의 제자들이 박해의 시대 속에서 낙망하여 허탄함에 빠지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말 속에는 주의 재림이 늦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신령한 믿음의 길을 포기하게 되리라는 예측이 담겨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 주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마 25:5). 

마가복음13장에 한 제자가 성전의 외형이 웅장하고 거대한 것을 보고 예수님께 그 성전을 바라보신 느낌이 어떠하신가를 물었습니다. 제자의 질문에 접한 주님은 질문의 의도와는 달리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성전은 이미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음모, 탐욕,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강도의 굴혈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은 파괴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예언은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참 신앙이 결여되고 주님께서 관계하지 않는 건물은 이미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주님께 언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며 그 징조는 어떠한가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징조에 대하여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말세에 나타날 종교적 현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게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정치적으로 국가간의 분쟁이 심화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각처에 지진과 기근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말세에 나타날 우주적인 재난을 뜻합니다
이러한 재난의 때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합니다.

(막 13: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최후의 교훈을 주며  로마의 감옥에서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는 노사도의 숙연함을 보여 줍니다. 사도 바울이 석방되어 다시 복음 사역의 일선에 나아가게 되리라는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오히려 임박한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6절). 이러한 입장에 놓인 바울이 복음 사역을 위해 전력투구했던 지난날들을 회고하면서 사랑하는 제자이자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권면을 베풀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기를 힘쓸 것을 명하면서  유언과 같은 간증을 합니다. 자신이 죽을 날이 가까워 왔으며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워 승리한 자신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간증을 통해 디모데에게 소망 가운데 복음 전파의 사역에 최선을 다할 것을  명한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자신이 죽을 위험에 처했으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시어 복음을 이방인에게 널리 전파하게 되었음을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기에  힘쓰라고 명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명령이 자신의 개인적인 명령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명령임을 밝히기 위해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명하신 지상 명령을 바울이 디모데에게 다시 강조한 것입니다. 이러한  명령을 준행함에 있어서 항상 좋은 조건과 환경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핍박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기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일생을 복음 전파에 바쳤고 이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자신과 같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명령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제 죽음을 맞이할 날이 가까워 왔음을 밝히면서 자신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므로 자신을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달려갈 길'(드로몬)은 마라톤 경기에서 정해진 '경주 코오스'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사명'을 비유한 말로서 바울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온 전생애를 상징합니다(행 20:24;갈 2:2).

'마치고'는 바울이 경주에서 승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Guthrie). 

'지켰으니'는 달리기 선수들이 경기 규칙을 지켰다는 의미요(Easton). 군인이 상관에게 충성을 지켰다는 의미, 혹은 올바른 교의를 지켰다는 의미요(Calvin).  청지기로서 악조건 속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의미로(Scott)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실에 대한 확신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후대에 넘겨주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그에게 면류관이 에비 되었다고 합니다.
'면류관'(스테파노스)은 당시 운동 경기의 승리자에게 수여하던 것으로 월계수나무, 상수리나무 등의 잎을 엮어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왕들이 쓰던 '왕관'(디아데마)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혹자는 '왕관'이 그리스도에게 합당한 것이라면  '면류관'은 성도들에게 합당한 것이라고 합니다(Trench). 그러나 면류관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며 다스리는 특권을 얻습니다(계 3:21).

한편 바울은 단순히 '면류관'이라고 하지 않고 '의의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의의 면류관'(디카이오쉬네스 스테파노스)은 믿음으로 의롭게된 자에게 수여되는 '면류관'입니다.  바울은 '의의 면류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언급하지 않으나 다른 성경에서는 '영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계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성경에는 의의 면류관 외에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 '영광의 면류관'(렘 13:18 벧전 5:4),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 9:25), '열두 별의 면류관'(계 12:1), '금면류관'(계 4:4; 14:14), '화려한 면류관'(겔 16:12) 등의 표현이 있는데 이는 모두 충성스런 성도들이 내세에서 받을 상급을 표시한 것이고, 그 반대로 '가시 면류관'(마 27:29 요 19:5), '썩을 면류관'(고전 9:25), '교만한 면류관'(사 28:1) 등의 표현도 있는데 이는 그 반대로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고 교만하여 주를 떠나 불순종한 자들에게 주어질 저주들을 표시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충성스럽게 달려왔음을 자랑하고 내세에서 받을 의의 면류관을 대망하며 기뻐합니다. 한편 그것은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모든 주의 종들에게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 바울이 주장하는 요지입니다. 

면류관은 믿음의 경주를 마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7절). 의의 면류관은 맡겨진 사명을 다하고 믿음의 경주를 마친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달음질하는 선수가 정해진 코스를 주파하고 나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성도들도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일생을 유감없이 마치고, 맡겨 주신 사명을 남김없이 수행해야 의의 면류관을 얻을 자격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복음 전도자의 사명 수행을 운동선수들의 달음질에 비유한 구절이 여럿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고 했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 14)고도 했습니다.

복음 사역을 위한 경기는 원거리 경기이고, 또 장애물도 많은 경기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끝까지 달려가는 사람이 상을 받듯이 그리스도 예수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의 면류관 받기 원하는 자들은 믿음의 경주를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고독과 외로움이 수시로 찾아들고 자주 지치게 되지만 그럴수록 더욱 힘을 내어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히 12:12, 13).

믿음을 지킨 사람이 의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경기를 하는 선수들은 경기 규칙을 지킬 것을 선서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중간에서 정기 코스가 아닌 쉬운 길로 질러간다거나 다른 기구를 타고 간다거나, 또는 쉬어 간다거나 하는 것은 경기의 규칙을 지키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와 같이 복음 전도자의 사명이나 성도의 신앙생활도 선수가 경기의 규칙을 지키며 달리듯이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여기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이요, 더 좁은 의미로는 개인적 신앙입니다.

의의 면류관은 주가 베푸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운 구원이 아니라, 영광의 면류관은 주가 베푸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운 구원이 아니라, 영광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는 환란이나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의의 면류관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집니다. 의의 면류관은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고 주의 재림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의의 면류관은 위대한 신앙의 업적을 남긴 사도나 전도자들에게만 보장된 상급이 아닙니다. 상급은 약속받은 대상자는 전 성도입니다. 최선의 헌신과 봉사를 한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거나 그가 한 일이 표가 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시는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 6:4). 외모를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삼상 16:7).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의 '실적'이 아니라 진실한 삶의 '흔적'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신앙인은 단순히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신앙인이 아니라, 많은 때를 묻혔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하기 위해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많은 상처를 입은 투쟁적인 신앙인입니다. 이러한 자에게는 예수께서 신앙의 결실에 상관없이 의의 면류관을 씌어 주십니다.

'예비 되었으므로'(아포케이타이)는 '따로 남겨두다', '보존하다'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장래에 준비될 것이 아니라 이미 준비되었던 것으로 이 면류관을 받는다는 소망이 바울에게 늘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Lenski). 

'의로우신 재판장'은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약 4:12) 오류를 범치 않는 재판자임을 시사합니다. 혹자는 이것이 조만간에 바울 자신을 재판하여 처형시킬 그릇된 재판자인 네로 황제와의 대조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합니다(Easton). 

'주의 나타나심'은 '주의 재림'을 일컫는 말이며(딤전 6:14). '사모하는'(에가페코시)은 '사랑하다'라는 의미로 재림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질 '의의 면류관'이 자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자 모두에게 주어질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 뿐만 아니라 믿음을 지켜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모든 믿는 자에게 준비된 하늘의 상급인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유언과 같은 것으로, 디모데에게  자신과 같이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복음 전파에 힘쓸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확신에 찬 고백은 최후까지 승리한 자만이  외칠 수 있는 승리의 찬가입니다.
바울은 이제 평소에 그가  원한 바대로 육신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선한 싸움을 다 싸우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와 같이 유언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의의 면류관 받는 자리에 함께 하는 모두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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