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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면 상처의 치유와 구원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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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상처의 치유와 구원 (눅 19:1~10)

 
우리의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치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웰빙이라는 말로 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몸의 치유뿐만이 아니고 마음의 치유, 나아가서는 병의 예방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음의 치유를 드러내놓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정확한 성경의 해석입니다. 어디에도 이것이 마음의 치유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기름을 먹은 종이처럼 치유에 대한 정신이 성경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치유라는 관점에서 봐야 그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는 제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 이유는 이 에피소드를 한 가지 관점에서만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인간의 회심과 구원을 보는 것뿐만이 아니고 인간의 내면의 치유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소외된 인간을 발견합니다. 돈은 많이 벌었을지 모르지만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 한 남자를 발견합니다. 

삭개오가 군중 틈에 끼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만일 삭개오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면 키가 작았을지라도 사람들이 그를 배려해서 자리를 마련해 주었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군중 틈에 끼지 못했다는 것은 키가 작다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고 이것은 따돌림에 의한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왕따를 당한 것입니다. 군중이 삭개오를 따돌린 것뿐만이 아니고 삭개오 자신도 사람들 틈에 끼는 것을 꺼린 것입니다. 그들이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나 여자는 자신의 외모에 의해서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자에게는 키를 요구하고 여자에게는 미모를 요구하는데 삭개오가 키가 작았다는 말은 자기의 외모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을 수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왜 삭개오는 돈에 집착했느냐. 

왜 그가 세리라는 규탄을 받는 직업을 통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느냐. 그렇게라도 해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일 외모로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없다면, 내가 인기로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없다면, 돈으로라도 관심을 끌겠다고 생각한 보상심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삭개오의 판단 미스였습니다. 

돈은 벌었지만 원하는 사랑은 얻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돈에 대해서도 불공평하고 사랑에 대해서도 불공평합니다. 삭개오는 돈은 벌었지만 사랑은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삭개오가 원했던 것은 사랑입니다. 그는 사랑받기를 원했고 사랑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왜 기독교는 치유를 중심적으로 말하지 않고 구원을 중점적으로 말하느냐. 그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삭개오 같은 사람이 사회에 좀 더 잘 적응하고 자기의 콤플렉스를 잘 극복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도록 돕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심리적인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외에도 그런 기술을 가르치는 곳은 많이 있습니다. 좀 더 본질적으로 보면 삭개오가 카운슬링을 받는다고 해서 그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이 사랑의 기술을 배운다고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히틀러 같은 인물이 사랑의 기술이 부족해서 악한 사람이 됐습니까. 사람들이 그를 좀 더 사랑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 됐습니까. 그가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 됐습니까. 그가 카운슬링을 받았으면 변화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게 아닌 것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심리학적 사회학적 접근 방법이 틀린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를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죄라는 것을 배제하고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없는 변화, 예수님이 없는 변신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변화는 치유가 아니고 구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을 통한 변화인 것입니다. 치유가 일어난다면 구원을 통해서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변화, 하나님 없는 치유를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삭개오의 경우에도 수평적인 인간관계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수직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그리고 삭개오의 수평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만일 이 시점에서 삭개오가 사람들을 의식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면 예수님을 만나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남자가 체면이 있지 어떡케 나무에 올라갑니까. 애도 아니고 어른이 예수님 구경하겠다고 나무에 올라간 것은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하는지 의식하지 않고 지금 이 시간에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봤다면 삭개오는 결코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사람들에게 오해도 받고 사람들의 인기를 잃어버리고 사람들 틈에 끼지 못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됩니다. 세상은 그들 틈에 끼기 위해서 우리가 그들과 같아지기를 요구합니다. 그들이 즐기는 것을 나도 즐기고 그들이 하는 것을 나도 하고 그들이 사는 방식대로 내가 살아야만 나를 그들의 하나로 여겨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도 경험하고 직장에서도 경험하고 모든 곳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소외되는 것이고 내가 혼자되는 것이고 친구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친구를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소속될 수 있다면 지배적인 문화를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에요.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나라가 그렇고 어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애들 청소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청소년에게 이러한 압력이 더 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반드시 의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세상에 적응하고 소속되기 위해서 내 양심이 원치 않는 내가 원치 않는 일도 해야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세상이 내게 요구하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양심을 타협하고 심지어 믿음마저도 타협해야 될 때가 있어요. 

미국의 부흥사였던 D. L 무디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초청받아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다음에 그 학생들을 대상으로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했습니다. 그것은 옥스퍼드 대학에 전례가 없었던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 믿겠다고 앞으로 나온 적이 없어요. 

그래서 학생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그래도 D. L 무디가 그들에게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예수님 믿으려면 지금 이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학생이 상의로 얼굴을 가리고 그리고 앞으로 뛰어나왔어요. 나오기는 나와야 될텐데 친구들 눈치가 보이기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뛰어나왔어요. 그랬더니 다른 학생들도 상의로 얼굴을 가리고 앞으로 나오더랍니다. 

때로는 우리가 얼굴을 가리면서도 예수님 앞에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눈치를 보는 저 친구들이 내 영혼의 문제를 도와줄 수 없다면 내가 그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게 눈치를 주는 저 사람들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없다면 나는 그들 눈 밖에 나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구원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에요. 

구원이란 무엇이냐. 실존적으로 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삭개오에게 구원은 예수님이 그의 집을 찾아와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찾아와 주시고 그를 사랑하셨어요. 삭개오는 그게 구원이에요. 거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것입니다. 치유는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치유는 상처를 고친다는 얘긴데 상처는 사랑의 결핍에서 시작됩니다. 사랑의 결핍에서 사람은 상처를 입습니다. 그것이 부모님의 사랑의 결핍 또 이성의 사랑의 결핍, 이 세상은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을 받지 못하는 데에서 상처가 생깁니다. 그것을 치유하는 것은 사람의 사랑가지고 안됩니다. 사람의 사랑은 상대적이고 조건적이고 제한적이고 강하지 못합니다. 부모님의 사랑 가지고도 치유가 안됩니다.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이 필요한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절대적인 사랑, 바다와 같은 사랑, 성경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교리적이라기보다는 경험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미국의 부흥사였던 찰스 피니가 숲에 들어가서 기도했을 때 그가 강한 성령을 체험했는데 마치 사랑의 물결이 그에게 밀려오는 것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또 D. L 무디도 길을 걸어가다가 성령을 받았는데 사랑의 바닷물이 그에게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했습니다. 

부족한 저도 성령 체험을 여러 번 했는데 성령이 역사하실 때는 반드시 평강이 따라오고 기쁨이 임하고 그리고 사랑이 임합니다. 기쁨이 없는 성령은 성령이 아닙니다. 또 평강이 없는 성령은 성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아이든 어른이든 하나님을 경험할 때는 반드시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게 돼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고 정죄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마다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을 극복하고 누군가가 나를 용서하고 나를 위하고 나와 함께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그 경험 자체가 우리에게 치유의 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처라는 것은 결국 관계 속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상처가 치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성령운동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 중에서도 이처럼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고 그것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또 치유 받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삭개오가 치유 받았다는 증거를 어디서 볼 수 있느냐. 
첫째는 용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것뿐만이 아니고 삭개오 자신도 자기에게 섭섭하게 했던 사람들을 용서했어요. 자기를 지금까지 따돌렸던 사람들, 자기를 친구로 대해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삭개오가 용서하지 않았다면 그가 생명보다도 귀중하게 여기는 재산을 남들에게 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남을 용서했기 때문에 자기의 귀중한 것을 그들에게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대통령께서 사재를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취임 전부터 약속했지만 취임 후에 광우병 촛불 시위가 열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원망하고 욕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재산을 환원하겠다는 약속을 지켰지요. 우리가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려고 할 때 그 사람들이 항상 사랑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에요.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야만 그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일평생 살면서 선을 행할 기회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사랑스럽지 않은, 결코 예뻐 보이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 내가 선을 행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덕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랑스러워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리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여기에 치유 받은 사람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증거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내가 남들에게 얼마만큼 사랑을 받았느냐에 비례합니다. 내가 사랑을 많이 받았을수록 사랑을 베풀기가 쉬워지고 내가 사랑을 받지 못했으면 그만큼 남을 사랑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인간의 고민입니다. 나에게 상처와 섭섭한 마음이 있는 상황에서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극히 어렵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남들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해주느냐에 좌우되지 않고 먼저 사랑을 실천합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치유 받았다는 증거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얼마큼 사랑하느냐를 조건으로 삼지 않아요.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먼저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남에게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반대로 합니다. 남이 나를 대접하는 대로 나도 남을 대접하려고 하는데 그러니까 모두 사랑받기는 원하지만 사랑을 주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대접하느냐를 상관하지 않고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대접하기로 결정합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세 번째 증거는 자존감의 회복입니다. 자존심의 회복이 아니고 자존감의 회복입니다. 자존감이라는 것은 나도 귀중한 존재라는 자부심을 말합니다. 삭개오가 치유를 받고 나니까 자존감이 회복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소속감을 갖게 되고 그래서 이제는 나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다는 소원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주여 내가 내 소유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다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이 말은 내가 죗값을 치르겠다는 말이 아니고 나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뭔가 내 몫을 하고 싶다는 얘기에요. 사람이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생기면 국가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어지지요. 그게 애국심십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에요. 국민 중에도 이 나라가 날 위해서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이렇게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뭔가 그 마음속에 소외감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삭개오도 치유받기 이전에는 남들에 대해서 관심 없었어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어요. 그의 유일한 관심은 자기 자신이었어요. 자기 자신이 넘버원이었어요. 돈이 넘버원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의 삶에 찾아오신 다음에 그의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제는 나와 내 돈이 넘버원이 아니고 나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구나. 그래서 뭔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기가 해야 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생각이 건강해 진 것입니다. 그의 삶이 자신감이 생기고 소속감이 생기고 애착이 생긴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치유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걸 보시고 예수님이 오늘 치유가 이 집에 임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 속에 치유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 속에 모든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구원 속에 축복이 담겨져 있고 성령이 담겨져 있고 또 은사가 담겨져 있고 평강이 담겨져 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모든 기업이 담겨져 있습니다. 윈도우 속에 익스플로러가 담겨져 있는 것처럼, 비행기 표 속에 식사비가 포함돼 있는 것처럼. 

우리가 비행기 타고 갈 때 식사비를 따로 내지 않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따로 치유를 받아야 되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받은 구원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다만 그 구원의 충만한 능력을 우리가 경험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이 오늘 이 집에 임하였다’라고 선포하신 것처럼 주님의 충만한 구원의 능력이 여러분의 집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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