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막 1:1~8)

  • 잡초 잡초
  • 550
  • 0

첨부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막 1:1~8)
 

<어질고 순한 마음으로>

수녀 시인으로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이해인 씨가 대장암에 걸려 암투병을 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인터넷 신문을 보니까 이해인 수녀의 솔직한 암투병기가 있기에 소개합니다. 먼저 암환자라는 것이 겉으로는 멀쩡해보여도 겉으로는 괜찮지 않기 때문에 '명랑 투병'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솔직히 토로합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투병하는 이 시간이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이며 '어제 죽어간 어떤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내일'임을 기억할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비록 암과 싸우고 있는 중이지만 요즈음 병상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 네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로, 무엇을 달라고 청원기도를 하기보다는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더 많이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다 보니까 자기보다 더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고 가끔은 교도소와 양로원을 방문해서 위로까지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합니다. 둘째로, 그동안 늘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일들을 기적처럼 놀라워하며 감탄하는 연습을 자주 한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신발을 신는 것도, 떠오르는 태양을 다시 보는 것도,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도, 뒷산이나 바닷가에 나가 산책을 하는 것도 다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것이지요. 셋째로, 자신의 실수나 약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넷째로, 속상하고 화나는 일이 생길 때마다 흥분하기 보다는 "결국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것을 기억하고 어질고 순한 마음을 지니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생사를 오락가락 하며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시인이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력이 한 장 달랑 남은 12월인데 우리의 마음은 쓸쓸합니다. 경제적으로 건강적으로 가정적으로 힘에 겨워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해인 수녀와 같이 너그럽고도 부드럽고 순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고통과 불행에 그냥 삼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오늘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을 맞으면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서론을 읽었습니다. 마가복음은 공관복음서들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나 누가와 달리 예수님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원시 교회의 본래적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복음서라고 볼 수 있지요. 이 중요한 사료인 마가복음은 그 서론을 이렇게 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복음의 시작을 선언하는 것으로써 출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Good news! 그렇습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을 뜻하는 희랍어 'euangelion'은 특히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의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목숨을 걸고 싸운 전쟁에서 이겼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적군의 총칼에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승전의 기쁜 소식은 내가 죽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살았다!"는 기쁨의 소식입니다. 

구약 성경으로 넘어가면 이 기쁜 소식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제와 설움으로부터 건져내시는 구원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사야 52장 7절은 말씀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사야 61장 1절로부터 3절도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신약으로 넘어와서 이 기쁜 소식, 즉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됩니다. 여기서 세 가지 중요한 단어가 차례로 나열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고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제일 먼저 '예수'라는 이름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기 '예수'는 김철수, 박영희와 같이 자연인의 이름을 말합니다. 2세기까지 예수라는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이었는데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예수와' 혹은 '여호수아'라는 이름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면 천사가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예수로 정하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철수나 영희와 같이 평범한 이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이지요. 비록 세상 안에 나셨고 세상을 위해 나셨지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세상으로부터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 다음에 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희랍어는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인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제사장이나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성별할 때 썼던 개념이 메시아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제와 수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아주 특별한 왕이나 선지자, 즉 메시아가 나타나 자기들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는데 바로 예수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메시아라는 고백입니다.

이제 분명해진 것은 갈릴리 나사렛 동네의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예수님께 부여된 기독론적 칭호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영웅호걸이 있지만 다름 아닌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건져내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기쁜 소식, 즉 복음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점을 말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을 때 영어로 'OF', 즉 '〜의'이라는 말은 소유 주격,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복음'으로 볼 수도 있고 소유 목적격,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소유 주격,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복음'의 경우에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가 중심이 됩니다. 반면에 소유 목적격,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메신저'가 중심이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할 때에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와 이 메시지를 선포하신 메신저로서의 예수님 모두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세>

그렇다면 대강절 기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떤 자세로 듣고 전하고 실천해야 마땅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 요한의 모습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에게서 우리는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세 가지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첫째로, 주님의 오심을 대망해야 합니다. 

기쁨과 순종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례 요한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해주셨던 메시아의 도래가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세례 요한이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과정을 말라기 3장 1절과 이사야 40장 3절을 인용함으로써 표현합니다. "보라 내가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메시아의 도래를 믿고 기다리지 않고서는 그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일을 할 수가 없지요. 2천 년 전에 이미 예수님의 초림은 이루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대강절 기간 동안 예수님의 재림(parousia)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4절에 보니까 세례 요한이 광야로 나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설교하고 세례를 베풀었을 때,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를 다 용서해주셨다는 것이지요. 회개라는 말은 희랍어로 'metanoia'인데 '마음을 바꾼다'(to change one's mind) 혹은 '돌아 선다'(to turn around)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자신의 죄를 뉘우침으로써 자신의 마음과 뜻과 행동을 고치는 것입니다. 잘못된 행위로부터 돌아서 올바른 길로 향하는 실천적 변화가 회개이지요.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먼저 회개해야 하며, 이 내적이고 주관적인 회개의 외적이며 객관적인 표시가 세례이며, 이와 같이 우리가 회개한 뒤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확신입니다. 대강절을 겨울철의 사순절이라고 부르면서 유난히 회개를 강조하는 것도 다 이런 의미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대강절이나 사순절이나 영대의 색깔은 모두 다 회개를 뜻하는 보라색입니다. 어쨌거나 '회개'→'세례'→'죄의 용서'는 순서상으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셋째로, 반드시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모아야 합니다. 

6절로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보세요. 세례 요한이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설명합니다.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사막음식인 메뚜기와 돌에서 나는 야생꿀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세례 요한의 풍모가 아닙니다. 그의 확신에 찬 선포입니다. 7절에 있는 말씀처럼 자신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자기 뒤에 오신다는 부동의 확신이 중요하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이것이 세례 요한의 초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가지 점에서 아주 특별합니다. 첫째, 세례 요한보다 훨씬 더 능력이 많으신 분인데 감히 요한 자신이 예수님의 신발끈을 푸는 일조차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주인의 냄새나는 발에 신겨진 신발끈을 푸는 일은 오직 노예만이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비하면 겨우 미말의 노예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겸손의 고백입니다. 

저는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대강절을 기다리는 우리는 예수님 앞에 겸손히 머리를 굽혀 숙여야 합니다. 항상 예수님이 드러나게 하고 우리는 숨고 죽어야 합니다. 예배나 봉사나 일체의 행위에 있어서 예수님이 부각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TV 쇼나 어떤 행사를 할 때 주인공을 소개하는 사회자가 지나치게 멋지게 차려입고 지나치게 현란한 말솜씨를 자랑해서 정작 주빈으로 초청된 주인공은 빛을 잃는 경우가 왕왕 있지요. 세례 요한이나 우리는 모두 다시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사회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이 부각되어 진짜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삶에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합시다.

그 다음에 둘째로, 세례의 차이입니다. 세례 요한은 겨우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게 하는 물세례만 줄 뿐이지만 장차 오실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는 것이지요.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고 의롭게 되는 것, 물세례가 참으로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성령 세례라는 것이지요. 우리로 하여금 각양 좋은 은사를 얻게 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하는 성령 세례는 요한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실 분 예수님이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강절은 예수님이 베푸실 성령 세례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대강절은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며 회개하며 주님께 초점을 집중하는 계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내하며 소망 중에 기다립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저지른 우리의 죄악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회개합시다. 그리고 크신 능력으로 성령 세례를 베풀어 주실 주님께 초점을 모아 봅시다. 

<하나님의 필적>

장영희 선생이 쓴 '하나님의 필적'이라는 수필에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장선생이 어느 날 TV 채널을 돌리다보니까 가정주부들이 우산으로 전경들을 찌르고 있었고 전경들은 방패로 그들의 공격을 피하는 모습이 보였답니다. TV에 등장한 데모하는 주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분노와 울분에 차 있었는데 그 이유가 중요했습니다. 자기 동네에다가 신체장애인 직업 훈련소를 짓기로 한 결정에 반발하는 데모였습니다. 

기자가 시위자들 중의 한 분에게 왜 이렇게 반대하느냐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 장애인들이 이 근처에서 살게 되면 우리 애들이 휠체어 탄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될 거 아닙니까? 자라는 아이들은 아름다운 것만 봐야 아름답게 자랄 수 있는 겁니다." 장애인들은 적어도 신체적으로 보기에 아름답지 못하니 그런 이들이 옆에 있게 되면 아이들의 교육에 좋지 않다는 말이었지요. 

기자는 그 다음에 현재 사는 집이 철거 위기에 놓여 있어 오갈 데 없는 장애인 한 명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컴퓨터 부품을 조립하는 청년이었습니다. "한 달에 얼마를 버세요?" "31만원이요." "그 돈을 어디에 쓰십니까?" "8만원은 어머니 생활비 드리고, 더 드린대도 저 장가갈 때 쓸 적금 부으라고 안 받으세요. 그래서 15만 5천원은 적금 붓고, 그리고 나머지는 글쎄요, 그냥 흐지부지 없어지네요." 

그 자신이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장영희 교수는 이 장애인 청년이 외모는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으나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과 때 묻지 않은 순박한 웃음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예리한 지적을 합니다. 원문 그대로 인용합니다. 

"19세기 미국 사상가이자 시인인 에머슨은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필적이다'(Beauty is God's Handwriting)라고 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일일이 써놓은 필적이라면, 그 무엇이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화려한 색깔로 멋있게 피는 작약꽃도 아름답지만, 바위 틈새에 숨어 피는 작은 들꽃도 아름답다. 

번쩍이는 왕관을 쓴 미스 코리아, 주렁주렁 훈장을 단 장군, 수십 명의 수행원을 거느린 고위직 관리, 모두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시장 바닥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가슴을 드러내 놓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과일 장수 아주머니, 공사장에서 허리가 휘어지도록 벽돌을 나르는 노동자, 쓰레기 더미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일하여 눈 코 입조차 분간할 수 없는 미화원들, 이들 역시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그렇습니다. 이번 대강절 기간 동안은 우리가 아름다움에 대해서 잘못된 시선과 왜곡된 편견을 가졌다면 그것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는 정현종 시인의 표현처럼 일체의 세상이 아름답고 의미 있게 다가오는 그런 계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