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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 위에 세운 나라 (출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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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 위에 세운 나라 (출 19:1~8)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 그들은 르비딤을 떠나서, 시내 광야에 이르러, 광야에다 장막을 쳤다. 이스라엘이 그 곳 산 아래에 장막을 친 다음에,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 가니,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가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모세가 돌아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모으고, 주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모든 말씀을 그들에게 선포하였다. 모든 백성이 다 함께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모세는, 백성이 한 말을 주님께 그대로 말씀드렸다.] 

• 창세기의 인권선언

벌써 대림환의 초가 두 개 밝혀졌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밝아지셨습니까? 대림환의 초는 주님을 모신 세상이 조금씩 밝아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초를 둘러싸고 있는 리쓰(wreath)는 하나님의 원만하고 풍성한 사랑을 뜻합니다. 하나 둘 초에 불이 밝혀지듯이 우리 마음에도 주님의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기를 소망합니다. 12월 10일은 세계인권선언기념일입니다. 

교회는 이 무렵을 인권주일로 지킵니다. ‘인권’이라는 말 앞에는 흔히 ‘천부天賦’라는 단어가 붙습니다.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뜻입니다. 인권은 그러니까 하늘로부터 받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인권’은 영어로 ‘human rights’라고 하는 데, 여러 종류의 인권이 있기 때문에 복수형인 ‘rights’를 씁니다. ‘right’라는 단어는 ‘옳다’(rectitude)는 뜻과 어떤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entitlement) 혹은 ‘권리’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권이란 따라서 ‘옳고 정당한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 혹은 권리’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우리 사회에서 좀 급진적인 사람처럼 인식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통념상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던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소수자 인권).

성경은 세상의 그 어떤 문서보다도 ‘인권’의 가치에 깊이 주목합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바빌론 포로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해 바빌론에 끌려간 사람들은 망국민의 설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시편 137편은 그들이 겪었던 내적 고통을 잘 드러내줍니다.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짓밟아 끌고 온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1-3)

시인은 “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탄식합니다. 그런데 끌려갔던 이들 가운데 있던 제사장들은 시름에 찬 백성들에게 천지 창조 이야기와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창조 이야기는 우주 발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창조의 순서입니다. 첫째와 둘째 날 빛과 창공을 만드신 주님은 셋째 날 물과 뭍을 갈라놓고는 땅에게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종류대로 내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이야기꾼은 넷째 날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빈약한 생물학적 지식을 가지고 보더라도 여기에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셋째 날과 넷째 날이 뒤바뀐 것처럼 보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없이 식물은 자랄 수 없습니다. 이건 상식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이야기꾼의 숨은 뜻이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은 바빌론 사람들이 신으로 숭배하던 대상입니다. 그들이 신으로 숭상하는 것들은 사실 야훼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이 준다고 믿었던 먹을거리도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는 사실을 이야기꾼은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간 창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제정일치 시대의 왕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꾼은 그 단어를 모든 인간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식민지 백성이라고, 가난하다고, 배우지 못했다고, 힘이 없다고,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부모가 없다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제국주의에 대한 거역인 동시에 심오한 인권선언인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창세기의 이런 비전은 출애굽 공동체의 이상과도 연결됩니다.

• 소명의 공유

압제의 땅 애굽을 떠나온 출애굽 공동체는 수르 광야와 신 광야를 지나고, 오아시스 지대인 르비딤을 통과해 시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정말 힘겨운 여정이었습니다. 바로(Pharaoh) 한 사람이 지배하고 나머지는 모두 피지배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불의한 체제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평등의 새 세상을 이루겠다는 그들의 장한 꿈은 고단한 여정 가운데서 퇴색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쉬고 싶고,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에 속합니다. 광야는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적절치 않은 장소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불평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감정은 전염성이 강해서 한 두 사람이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하면 다른 이들도 그 불만에 물들게 됩니다. 

출애굽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을 가리켜 ‘히브리’ 혹은 ‘이브림’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여기저기 떠돌며 살던 사람들, 문명화된 세계의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로서 애굽에서 ‘불결한 사람’으로 분류되던 이들입니다. 히브리는 민족 이름이 아니라 계층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삶의 내력도 다르고, 조상도 다르고, 함께 나눌 기억도 없는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끈은 없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고, 샘이 깊은 물이 마르지 않는 법인데, 출애굽 공동체는 언제라도 해체될 수 있는 불안한 조직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의 욕망은 늘 자기중심적입니다. 더러 다른 이를 배려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자기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차이’가 드러나는 순간 불편한 감정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나눌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애굽에서 겪어야 했던 고역에 대한 기억과, 애굽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겪었던 구원체험이 있었습니다. 히브리들은 어느 순간 자기들 가운데 생겨난 새로운 정체성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히브리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야훼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신뢰였습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끈은 바로 ‘야훼 하나님’이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마침내 시내산 앞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신앙 공동체가 출현하는 순간입니다. 그들의 정체성의 뿌리는 과거에 있지 않습니다. 함께 지향하고 함께 이루어 가야 할 미래에 있습니다.

• 동의를 구하는 하나님 

언약을 맺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를 따로 불러 백성들의 기억을 환기시키라고 말합니다. 애굽에서 벗어날 때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너무나 극적인 사건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거기에 견줄 수는 없겠지만,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아도 참 곡절이 많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우리들 아닙니까. 어떤 때는 삶의 충만함을 느끼다가 다음 순간에는 더할 수 없이 쓸쓸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살아온 날을 돌아보면 보이지 않는 어떤 손길이 우리를 붙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4)

이 말씀은 출애굽 공동체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의 경험입니다. 마침내 언약을 맺기 전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런 약속을 들려주십니다.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5a)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당신의 계명을 부과하고 있지 않습니다. 선택권은 백성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할 것인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주체는 바로 히브리들입니다. 모든 백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할 때 비로소 언약이 성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깨닫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모세나 다른 지도자들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 아닙니다. 엘리트가 아닌 평범한 민중들에게 자기들의 국가 정체에 대해 동의할 것인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왕적 지배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적인 통치자이십니다. ‘이게 좋으니까 너희는 무조건 받아라’ 하는 강제와 억지가 없으십니다. 히브리인들은 자기 결정권 없이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주인이 ‘하라’ 하면 하고, ‘말라’ 하면 마는 것이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역사의 주체로 인정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선택할 기회와 자유를 주십니다. 지배받는 이들의 자발적 동의가 전제되지 않은 지배는 하나님조차 거부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도 같은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철없는 작은 아들이 자기 몫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는 것을 허용합니다. 아들의 탈선이 불 보듯 뻔한 데도 아버지는 아파할 뿐, 아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아들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통해 스스로 배워야 성숙해짐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 세대들을 위해 뭐든지 다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숙제도 대신 해주고, 생각도 대신 해주고, 꿈도 대신 꿔주고, 갈등도 대신 해결해주려 합니다. ‘다 너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사랑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갈등과 고뇌 속에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배워야 할 인생의 교훈을 빼앗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새로운 가치 

백성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다 실천하겠다’고 동의하자 하나님은 그들이 예기치 않았던 역사적 소명을 맡기십니다.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6a)

이것은 평범한 약속이 아닙니다. 나라 전체가, 구성원 하나하나가 거룩한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고대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특권적인 사제 계급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과 가까운 사람으로 인식되었기에 왕들은 그들을 가까이 두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특권층이었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제사장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서는 살렘 왕 멜기세덱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섬긴 제사장이었다고 말합니다(창14:18).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위해 복을 빌어 주었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미디안의 제사장이었습니다(출3:1). 제사장 가문은 왕들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근동지방에 닥쳐온 7년 기근 동안 비축해 두었던 곡식을 풀어 사람들의 땅을 국유화했지만, 제사장들의 토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특권을 주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주신 비전은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되고, 모든 구성원들이 거룩하게 되는 나라의 꿈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제사장 계급이 형성되었지만, 초기의 이스라엘이 꿈꾸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도자건 제사장이건 일반 백성이건 모두가 ‘Torah’ 아래 있습니다. 토라는 형제/자매애에 바탕을 둔 평등 공통체를 이끌어가는 법입니다. 그 토라의 내용은 세 단어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미슈팟mishpat’입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정의(minimal justice)를 일컫는 말입니다. 잘못하면 벌을 받고, 손해를 입히면 보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너지면 사회는 존속되기 어렵습니다. 미슈팟은 사회적인 특권층이나 약자들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공평함입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사법적 정의가 바로 이것입니다.

둘째는 ‘쩨다카tzedakah’입니다. 이것은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라고 새길 수 있습니다. 토라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추수할 때 밭의 한 모퉁이는 남겨두라든지, 안식년이 되면 땅의 소출을 거두지 말고 빚을 탕감해주라는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 잠시 동안 머물다 가는 나그네 혹은 식객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위해 나누어주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입니다. 

셋째는 ‘헤세드hesed’입니다. 이것은 언약에 바탕을 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등지고 사는 백성들에게 진노하시다가도 언약을 기억하시고 사랑을 베푸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인자함’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형제/자매들에게 같은 사랑을 품어야 합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우리 형제/자매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의 세상을 열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자비의 사회화’라고 표현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합니까? 기본적 정의인 미슈팟, 분배적 정의인 쩨다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헤세드, 이 모든 것들이 망가진 것은 아닙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는 세상, 천부의 인권이 존중되는 세상이야말로 발전된 세상, 진보된 세상, 예수님이 꿈꾸셨던 세상이 아닙니까?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우리는 이런 세상의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야 할 길을 찾은 사람은 낙심할 수 없습니다. 이런 꿈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며 살아갑니다. 이런 희망과 보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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