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시 130:1~8)

  • 잡초 잡초
  • 1387
  • 0

첨부 1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시 130:1~8)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주제들과 삶의 내용에 바탕을 둔 
연중예배계획 수립을 위한 달력을 가리켜서 교회력이라고 합니다. 
교회력은 여섯 가지 절기, 즉 강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로 나뉩니다. 

그러니까 교회력으로 치면 강림절은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림절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기로 탄생하시는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강림절은 성탄절 4주전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올해 강림절은 지난 주일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강림절이 되면 성탄절을 준비위해 장식을 하고, 캐롤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강림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이면서
동시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로도 지켜져 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미 오신 예수님과
장차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예수님 사이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1. 왜 주님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게 되었는가?

사람들에겐 다양한 종류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고기를 잡기 위해서 배를 타고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어 버렸다는 망부석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가고 세월이 흘러가도 포기할 수 없는 기다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파수꾼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군대에서 보초근무를 서 본 사람은 알 겁니다. 
새벽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는 파수꾼의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한지 말입니다. 
날씨는 춥고,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왜 그렇게 시간은 안 가는지요?

그 긴긴 밤을 지새우며 발을 동동 구르면서 기다리다가 
드디어 새벽이 밝아올 때, 그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피곤에 지친 파수꾼은 이제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습니다. 
면회 온다는 애인의 소식을 듣고 손꼽아 기다리는 병사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달력 하루씩을 지워가면서 휴가 갈 날, 제대할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또 집에서는 군에 간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간절함이 있습니다. 

봄에 씨앗을 뿌린 농부는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기다립니다.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는 수험생의 기다림도 있습니다. 합격소식
오랜 질병과 싸우면서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결혼날짜 잡아놓고 손꼽아 기다리는 신랑, 신부의 기다림도 있습니다. 
통일을 기다리는 민족적인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다림의 공통점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는 점입니다.
희망이 있으니까 기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를 기다릴 때에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면서 시작된 그들의 고난은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에 의해 번갈아 가면서 압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그들을 다스렸던 왕들 대부분은 불의하고 이기적이었습니다. 
어떤 왕들은 우상숭배자들이며, 
백성들의 안녕과 복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자기의 배만 불렸습니다. 

하지만 모든 왕이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소수이긴 하지만 선하고 의로운 왕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광대한 땅을 다스렸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백성을 사랑했던 다윗과 같은 왕이 있음을 알고
그런 시절이 다시 오기를 간절히 고대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다윗의 후손 가운데 
다윗과 같은 아니 그보다도 더 위대한 지도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7:14, 9:7)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게 되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지금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방나라에서 자유하게 될 것이고, 
화평을 누리게 되며, 풍요한 나라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현실이 고달프고 괴로울 때 
말씀에 약속된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1절) 

지금은 고달픈 현실이요, 깊은 곳에 박혀 있지만 
여기서 간절히 부르짖을 때, 주께서 예언하신 것을 이루실 줄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이처럼 간절한 기다림이었습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시인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표현하고 있습니다.(시130:6)
여러분이 오늘 처해 있는 현실이 고달프고 괴롭습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2. 누가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가?

현실에 대한 거룩한 불만을 가진 자가 주님을 기다립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신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3절)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4절) 
시인은 주님만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라고 노래합니다(5절)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자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재미가 좋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현재가 좋아서 안주하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미래에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혜와 축복은 
현재의 것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우리는 적당한 선에서 현재에 안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차선이 최선을 방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차선책에 만족하다보면,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삶에 대해서는 현재에 만족해야 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한 줄로 알아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은 우리를 타락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삶에 대해서는 결코 현재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의 영적인 생활은 어떻습니까?
신앙생활 지금만큼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도덕적인 수준은 어떻습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 만족한 대답을 얻을 수 없다면 

그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것을 거룩한 불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거룩한 불만이 있어야 앞으로 더 나은 영적 상태를 희망할 수 있습니다. 
현재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거룩한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이 
오히려 메시야를 대망했던 것처럼 
지금 자신의 영적 상태를 위기로 생각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으면 나의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우리는 간절히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면 모든 굽은 것은 곧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질 것입니다. 

현재에 대한 거룩한 불만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과거 중심적이었고, 사두개인들은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인 분이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에게 대해서, 
사람들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과거의 원인을 캐려고 했지만
주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미래를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적으로 비전업무를 추진하고 있는 것도 알고 보면
교회가 이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룩한 불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다 더 나은 상태도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전을 세우는 겁니다.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버리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는 밝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이 오셔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기다려야 하겠는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릴 때에는 
반드시 아침이 온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미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기대와 희망이 없는 사람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눅2:25)였으며,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는 자’
(눅2:37)였는데 결국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시간만 보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보다 적극적인 기다림인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어릴 때 평택에서 자랐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형들과 함께 서울로 유학을 와서 공부를 했답니다. 
어린 나이에 엄마와 떨어져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혼자 엄마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짓는 날도 많았답니다. 
그런데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씩 서울로 올라오셔서 반찬거리도 갖다 주시고 
용돈도 주시고, 어린 아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가 오시는 날이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손꼽아 기다렸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엄마가 준 커다란 돼지 저금통이 있었는데
거기에 동전을 넣어 모아두는 것이 재미였습니다. 
돈을 아껴 쓰고 동전을 모아 저금통에 넣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보면
엄마는 참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군것질을 하고 싶어서 저금통의 입구를 조금 크게 찢어
거꾸로 흔들어서 동전을 빼내게 되었습니다. 
신나게 맛있는 과자를 사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한 번만 했으면 괜찮은데, 
한 번 하고 나니 두 번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재미가 붙어 점점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금통이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엄마가 오시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엄마가 오시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고 
혹시 들키면 혼날까봐 일부러 밤늦게 들어왔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기다렸던 엄마가 이제는 전혀 반갑지 않고
오히려 피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그 날은 들키지 않았지만, 드디어 다음 달에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혼 줄이 난 것이죠. 

저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도 꼭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에게는 주님의 오심을 간절해집니다. 
시인처럼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고 나면, 주님의 오심을 부담스러워집니다. 
심지어 피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되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과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믿음과 희망으로 기다리는 자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사업이 부도를 당하였습니까? 실직을 당하였습니까? 
자녀들의 문제로 말미암아 오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까?
형제간의 불화로 말미암아 명절이 되어도 고향을 찾지 못해 괴롭습니까? 
그럴수록 더욱 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인생의 모든 방황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오실까봐 피해 다니고 있습니까? 
영적인 정결한 신부가 되길 바랍니다. 더 경건한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는 것이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길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