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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하나님 아들이심 (행 9:1~9,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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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하나님 아들이심 (행 9:1~9, 19~22)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 세계로 전파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준비하신 한 사람, 사울의 회심과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고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 남녀를 불문하고 옥에 넘겼었습니다(8:1, 3). 그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여 “그 도를 좇는 사람을” 체포해 오려 했지요(9:1-2).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걸어서 일주일 정도 걸립니다. 

사울은 핍박으로 흩어져 회당에 숨어 든 성도들을 색출해서 체포해 오려고 결심했습니다. 여자도 봐주지 않고 결박해서 잡기로 단단히 각오했지요. 성도의 씨를 말려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지상에서 깡그리 없애버리려고 작정했습니다(26:9). 아주 독종 같은 박해자였습니다.

사울이 집요하고 강렬하게 박해했던 이유는 얄궂게도 하나님을 향한 그의 투철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는 도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의 신앙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상이었지요. 그의 경건성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세력들을 모른 척 참아 넘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가차 없이 처단해야한다는 의무감을 느꼈겠지요. 

그의 행동은 땅 끝까지라도 추격해서 반드시 박멸시키려는 신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동기는 순수했고 그의 열정은 정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을 결핍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었지요.

순수한 동기와 뜨거운 열정은 하나님을 신앙함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면 세속적일 것이고, 열정이 없다면 죄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순수한 동기와 뜨거운 열정만으로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할 수도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반드시 알아야만 할 복음 진리에 결핍이 있다면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지요. 

사울은 모세 이후 최고의 랍비로 칭송 받은 힐렐의 손자 가말리엘에게 배웠습니다. 열심히 성경을 연구했고 깨달은 바대로 성실하게 실천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 없는 사람이었지요(빌 3:6).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 큰 결핍이 있었습니다.

바른 지식 없이 순수한 열정만 가진 사람은 가장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입니다. 역사를 볼 때도 악의 세력은 언제나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이용해왔습니다. 오늘날 이단 세력들 역시 바른 지식이 결핍된 순수한 열정의 소유자들을 이용합니다. 

온갖 사상이 난무하는 혼란한 시대일수록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는 힘이 더욱 필요하지요.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고 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에 자만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늘 말씀 앞에서 잘못됨은 없는지 살피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움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써야겠습니다(딤후 2:15).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습니다(3). 정오의 태양보다 더 밝게 비추는 빛이었지요(26:13). 사울이 땅에 엎드러졌는데 하늘로서 소리가 있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4)?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였습니다(5). 

회심의 시작은 주께서 먼저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사울이 주님을 찾기 전에, 엉뚱한 짓을 하고 있을 그 때에 그분께서 먼저 찾아오셨지요.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기까지는 아무리 성경을 많이 연구한 사울도 반드시 알아야 할 복음 진리를 스스로 깨우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회심은 오직 주의 은혜입니다.

그동안 사울에게 있어서 예수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며 신성을 모독하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그 사람이 신적 영광중에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한마디 음성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고수했던 그의 유대주의 신학을 송두리째 무너뜨렸습니다. 

율법에 흠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의 의가 산산이 조각나는 순간이었지요.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딱하고 어리석은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순수한 동기와 열정을 조금도 자랑할 수 없는 비참한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는 엄청난 충격의 순간이었지요.

주께서는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하시며 그를 인도하셨습니다(6). 회심 후에는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앞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 지 섬세하게 지도해 주셨지요. 하지만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습니다(7). 

빛은 보았으되 빛 되신 주님은 보지 못했고, 소리는 들었으되 주님의 음성은 듣지 못했지요(22:9). 같은 조건 속에 있어도 동일하게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께서는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전파하는 자로 사울을 불러 쓰시기 원하셨기 때문에 그에게만 특별히 은혜를 베푸신 것이지요.

동일한 조건만 갖추면 동일한 은혜를 받으리라는 생각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옛날의 부흥을 돌아보면서 그러한 조건만 인위적으로 갖추기만 하면 부흥하리라는 기대는 어리석습니다. 부흥 프로그램만 따라하면 부흥되리라는 기대는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일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도 사람 자체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이미 “어머니의 태로 부터” 이 은혜를 받기 위해 “택정”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갈 1:15; 롬 1:1). 사람이 보기에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은혜를 받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훨씬 이전부터 작용했습니다. 사울의 삶의 조건들도 이방인의 사도로서 적합하도록 준비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준비시켜서 사용하십니다.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쓰시기 위해 궁중과 광야에서 80년을 준비시키셨지요. 다윗을 마음에 합한 왕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목동 생활과 사울에게 쫓기는 10년의 세월 동안 준비시키셨습니다. 사울은 회심 후에도 14년 동안 더 준비됩니다(갈 2:1).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아보는 방법 중의 한 가지는 그 일을 위해서 상황이 준비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았다면 일을 시작하기보다 준비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쓰임 받는 것도 은혜이긴 하지만 자칫하면 은혜를 감당하지 못해서 사울 왕처럼 됩니다. 준비된 상태에서 쓰임 받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했지요(8-9). 위풍당당하기만 하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철저하게 깨어졌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재해석해야 했습니다.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과 죽으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완전히 수정해야만 했지요. 그가 목격한 예수님의 신성을 중심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했던 핵심적인 지식의 결핍을 채워 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아나니아의 도움을 받아 충격에서 깨어난 삼일 후부터 사울은 즉시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합니다(20). 즉, ‘사람’으로만 알고 있는 예수님이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사실만을 붙들었던 그의 사상과 메시아는 사람이라는 유대교적인 생각에 혁명적인 전환이 일어난 것이지요. 핍박하던 열정으로 이제는 힘을 다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22). 멸절시키려 했던 그 사상을 오히려 한 단계 발전시켜서 강력하게 전파했지요.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공모할지라도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23).

잘못된 습관과 행동을 고쳐서 사람을 변하게 하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이미 굳어진 사고방식을 고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굳어진 생각이 바뀌고 이에 따라 행동도 바뀝니다. 주께서는 교회의 핍박자인 사울을 이방 세계를 위한 교회의 전파자로 바꾸시기 원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 먼저 사울의 생각에 전환이 일어나도록 하셨지요. 그리고 그 은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도록 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후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형성됩니다. 유대인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십자가를 해석합니다.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하지요(골 1:18).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 곧, 그분의 신성을 깨닫는 일이 왜 이처럼 중요할까요? 만일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분을 향한 최상의 대접은 최고의 모범으로 여기는 일입니다. 그분을 인격을 배우고자 하고 그분의 삶을 닮고자 하겠지요. 

그래서 ‘작은 예수’가 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신성’을 깨닫는 순간에 사고의 대격변이 일어납니다. 신성은 모범으로 삼아서 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성을 깨닫게 되면, 그분은 나의 가장 좋은 친구라는 생각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명과 내 소유의 주인이시며 내 삶의 주이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 소원을 만족시켜 주시는 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복종해야 할 왕이심을 생각하게 되지요.

오늘날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의 동기가 순수하고 열정이 뜨거움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모범으로 삶고 닮고자 하는 성향은 강하지만, 그분의 신성에 복종하고자 하는 자세는 상대적으로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삶을 위한 예수를 생각하는데 만 머물러 있어서, 예수를 위해 내 삶을 부인하지 못하지요. 한국 교회의 변화되지 못한 세속적 가치관과 부패한 도덕성은 어쩌면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 부족한 때문이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묵상하며 깨달음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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