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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건강한 교회 (행 2: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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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교회 (행 2:37~47)


조선왕조 가운데 세종대왕은 우리에게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가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백성들로 하여금 잠재되어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했다는데 있습니다. 그 결과 한글 창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세종대왕의 업적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말하고자 합니다. 태종(이방원)은 적자승계 원칙을 생명처럼 고수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남(양녕대군)이 끝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셋째 아들(충녕대군)이 계승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 왕조 네 번째 임금인 세종대왕입니다. 
태종은 왕위를 세종에게 넘긴 직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상(主上)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는데 몸이 비중(肥重)하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서 노닐어 몸의 균형을 유지해야한다."고 했습니다. 

부왕 태종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세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좋아하지 아니했습니다. 조선조 왕들이 주로 사냥과 격구를 했는데 이것조차도 좋아하지 아니했습니다. 
사실 세종은 고기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오죽하면 태종이 유언으로 "주상(主上)은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權度)를 좇아 상제(喪制)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종은 태종의 상(喪)에 6개월 동안 고기를 먹지 아니했습니다. 

세종은 운동을 하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운동하는 그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말 타기나 격구 같은 운동의 이론에 있어서는 아주 밝았습니다. 격구를 무예시험의 한 종목으로 채택할 정도였지만 직접 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쯤 되면 세종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의 몸은 뚱뚱하고 형편없었습니다. 세종의 일상은 불행했습니다. 

세종이 말하기를 "내가 젊어서부터 다리가 아팠고 10여년에 이르러 조금 나았는데 또 등에는 부종(浮腫)이 있어 아픈 지가 오래되었다. 아플 때는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하고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 지난 봄 강무를 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어두워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고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세종의 일상은 각종 성인병으로 인한 고통의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세종은 수시로 온천을 찾아야 했고 또 "근로(勤勞)를 삼가라."는 신하들의 충고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54세로 군왕의 생은 마감되었습니다. 
만약 세종이 운동을 했더라면, 세종의 업적은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병약한 아들 문종과 손자 단종으로 이어지는 왕조의 불행도 어쩌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건강의 비결은 음식섭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섭취한 음식물의 영양소가 몸에 균형을 이루도록 운동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운동(일, work)하는 교회입니다. 

Ⅰ.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본문 2장 37절에 『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라고 했습니다. 
주와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폭정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통치자로 주와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대망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사렛 출신 예수는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한 나머지 그를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바로 그들이 대망한 주와 그리스도 즉, 메시야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36절에 『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하면서 탄식했습니다. 이것은 탄식과 함께 토하는 필사적인 질문이상의 요구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가두었던 간수들은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인들이 도망한 줄 알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바울과 실라가 크게 소리 지르며 『 우리가 여기 있다 』고 할 때 간수가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6장 30절에 『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회개할 때도 이와 같았습니다. 

사도행전 22장 10절에 『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라고 했습니다. 
영적 부흥운동은 "주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는 데서부터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적 부흥은 종교개혁의 명제였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① 성경의 재발견 ② 은혜의 재발견 ③ 만인제사장직의 재발견이 바로 영적 부흥운동의 과제였습니다. 
세속적인 심령의 파괴와 성령 충만의 건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돌이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눅 24:30-35).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것은 타락한 세속적 심령입니다. 엠마오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엠마오가 불의한 죄악의 영역이라면 예루살렘은 진리와 의의 영역입니다. 엠마오가 사탄이 지배하는 사망의 세계라면 예루살렘은 주님이 통치하는 성별의 세계입니다. 엠마오가 인본주의라면 예루살렘은 신본주의입니다. 
엠마오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세속적 술이라면 예루살렘은 성령에 취하는 새 술입니다. 엠마오가 낡은 부대라면 예루살렘은 새 부대입니다. 엠마오가 낡은 옷이라면 예루살렘은 새 옷입니다. 

선택은 둘 중의 하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둘 중의 하나를 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라고 했습니다.

1) 회개입니다. 
본문 2장 38절에 『 …너희가 회개하여… 』라고 했습니다. 
회개는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에 『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31절에 『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8절에 『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5절에 『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7절에 『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자신이 방향을 전환하는 행위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본문 2장 38절에 『 …너희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고 했습니다. 
여기에 『 세례 』는 원칙적으로 회개와 함께 임하는 성령세례 곧 불세례를 말합니다. 성령세례, 불세례로 죄사함을 받은 증거로 물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회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다는 확증의 표입니다. 

3)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본문 2장 38절에 『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요 14:17). 또는 진리의 성령입니다(요 15:26). 성령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영입니다(요 16:13).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증거는 ① 예수가 나의 구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②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③ 교회가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갈 5:22-23). 성령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습니다(엡 5:9).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殿)입니다(고전 3:16). 
이러한 일체의 현상들이 성령을 모신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 8:6; 8:9; 8:16). 

Ⅱ. 신령한 공동체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1)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교회입니다. 
본문 2장 42절에 『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라고 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은 사도들의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는 ① 케뤼그마가 있었습니다. 복음의 본질, 곧 예수의 탄생, 죽으심, 부활, 승천, 영광의 보좌, 좌정, 재림이 있었습니다(행 2:22-35). ② 디다케가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오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는가를 해석해 주는 것입니다. 

③ 파라클레시스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행 2:40). ④ 호밀리아가 있었습니다. 패역한 세대, 곧 목이 곧은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행 2:40). 
사도들의 설교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활(死活)입니다. 곧 복음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제였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몸 된 교회를 배우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2) 교제하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 『 …서로 교제하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 '서로 교제하며'의 뜻은 교제(fellowship, 고후 6:11; 갈 2:9), 협력(association, 고전 10:16; 빌 2:1), 헌금(contribution, 고후 9:13; 롬 15:26)등으로 번역했습니다. 
초대 교부들은 교회를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라고 불렀습니다. 성도의 교제를 횡적인 관계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교제는 이상적인 종적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교제는 철저히 종적 관계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3) 떡을 떼는 교회입니다. 
본문 2장 42절 중에 『 …떡을 떼며…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찬과 애찬을 동시에 말한 것입니다. 
본문 2장 46절에 보면 떡을 떼는 것과 음식을 먹는 것이 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떡을 떼는 것은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했던 성찬을 의미합니다(눅 22:19). 

4)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교회입니다. 
본문 2장 42절 중에 『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 기도하기를 』이란 말은 복수로서 많은 제목과 많은 내용의 기도들을 의미합니다. 『 전혀 힘썼다 』는 말은 기도에 집중하고 힘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의 특색 중에 하나는 기도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는 교회였습니다. 

5)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회입니다. 
본문 2장 43절에 『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라고 했습니다. 여기 『 두려움 』은 경외와 경건의 의미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저들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신전(Coramdeo)의식의 내면화가 행동화된 신전인격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두려움은 afraid가 아니라 respect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두려움을 모르는 교만이 하늘에 사무치는 시대입니다. 

Ⅲ.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는 운동 입니다. 

본문 2장 46-47절에 『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1) 애찬을 나누기 위해 모여야 합니다. 
2) 성찬을 같이 하기 위해 모여야 합니다. 
3) 찬송을 하기 위해 모여야 합니다. 
4)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모여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는 성전과 성전 바깥 뜰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예배와 찬송을 드렸습니다. 
이들은 충분히 유대인들과의 충돌과 불화를 의식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모였으니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공격적인 신앙이었습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른 형식적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이 충만한 자발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이들은 모일 때마다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주도하는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오히려 온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당시 총독이었던 폴리니우스(Polinius)가 트라얀(Trajan)황제에게 보낸 서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총독이 박해로 인해 몰래 모이는 기독교 공동체를 엄밀히 조사한 후에 황제에게 그들은 율법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당시의 성도들의 차원 높은 신전인격의 삶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종교,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 안에서 귀감이 되고 칭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건강한 교회는 구원받는 자의 수가 증가해야 합니다. 『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 주께서 』라고 했습니다. 
교회 부흥은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란 말도 반복을 나타내는 말로 구원의 주체가 예수라는 말입니다. 
여기 『 더하게 하시니라 』는 말은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 더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교회부흥의 도구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 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운동하는 교회입니다. 먹기만 하고 먹은 것을 가지고 운동하지 않으면 병들어 죽게 됩니다. 받은 은혜와 받은 말씀을 먹고 열심을 다해 운동합시다. 

그래서 Kid for Christ를 어린이신앙운동으로, Student for Christ를 학생신앙운동으로, Christ Endeavor를 기독청년면려회로, Woman for Christ를 여전도회신앙운동으로, Pastor for Christ를 전국교역자신앙운동이라는 이니셜(Initial)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운동하는 신령한 단체입니다. 교회는 일하는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17절에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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