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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주의 위로를 기다릴 때 (사 30: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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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주의 위로를 기다릴 때 (사 30:18~19)


때로 우리들에게 닥쳐오는 시련과 고통들은 "삶이 왜 이렇게 불평등한가?"라고 하나님 앞에 따져보고 싶은 그런 충동들이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어느 누구의 영혼이라도 사람의 영혼은 바다와 같아서 그 표면에는 끊임없이 파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심층부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온유와 평화가 언제나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고통과 시련을 바라보면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내 심층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접속을 하십시오.  그러면 이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하라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것입니다.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라도 자식이 달라고 하면 좋은 것으로 주는데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께서 더 좋은 것으로 안 주시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미련한 자식이 달라고 하면 떡도 주고 다 주는데 왜 하나님이 안 주겠느냐?  그러므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저지르고 있는 제일 무서운 죄악 중에 첫 번째 죄악은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탁한 사람은 5분간 바보가 되고 끝날 수 있지만 부탁하지 않는 사람은 평생동안 바보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존심이니 내 자만심이니 이런 것들은 다 내어버리고 5분간 바보가 되어서 진실하게 부탁하는 사람은 일평생 행복하고 일평생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5분간의 자존심으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일평생 부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평생을 후회하면서 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대개 부탁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남에게 부탁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5분간의 자존심을 깨지 못하고 지키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평생 바보가 되지 말고 그저 언제나 부탁을 하십시오.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이름을 붙들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구하는 자에게만 미래가 열립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니까 아무 사람에게나 미래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구하는 자에게 미래가 열립니다.  기억하십시오.  끝없이 구하고 있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끝없이 구하고 있는 사람은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나 뒤죽박죽 울퉁불퉁 엉망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현실을 보면 암담합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때문에 판단력도 흐려집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그 미래를 오늘에 앞당겨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먼 곳을 바라보면서 그 미래를 앞당겨 오늘 솜씨를 풀어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야 됩니다.  

그래야 이 곤고한 삶을 이겨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안에 일어나는 분노를 잠재울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나도 어쩌지를 못하는 분노가 한바탕 지나가고 난 이후에 그 다음부터는 끊임없이 자기를 공격합니다.  그렇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원망하고, 자신의 초라함을 자책합니다.  그래서 분노의 마지막은 자기 파멸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면서 화를 낼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화가 습관화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별 것 아닌데도 습관화되어 가지고 화를 냅니다.  자꾸만 거칠어집니다.  습관적인 분노에서 해방 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능력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격에는 저항할 수 있지만 칭찬과 사랑에는 모두가 무저항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절망과 아픔을 안고 가슴앓이를 하면서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저 사람은 아니겠지..."  하지만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지렁이 같은 너 인생들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참으로 내가 너를 인도하리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여기에 왔습니다.  종교적인 장난을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여기에 오면 도덕군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서 있는 저도 도덕 군자가 아닙니다.  여러분 보다 훨씬 더 흠이 많고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다만 저는 시간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자 몸부림을 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십시오.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력으로 대강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대강절이라는 것은 대림절이라고도 하는데 주님의 탄생을 미리 기대하면서 자신을 가다듬는 것으로 성탄절을 전으로 해서 네 주일을 포함한 절기를 말합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기다림의 사상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8장에 보면 노아 시대에 온 세상을 뒤덮은 홍수가 그치고 물이 점점 줄어들기를 기다린다고 했을 때에 처음으로 이 용어가 사용되어 집니다.  그런가 하면, 사울 임금이 절박한 상황에 처해져 있을 때에 하나님의 종 사무엘을 간절히 기다렸다고 했을 때에 이 용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대표적으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 용어가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초기 교회 성도들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태도가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초기에도 대부분의 신앙인들의 자세는 기다림이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그들은 그렇게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심지어는 먼 하늘에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주님이 오시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생명은 예수님을 향한 경건한 기다림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립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면서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에서 기다림의 신앙은 우리가 가장 대망하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앙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465회 정도 기록되어져 있다고 성경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는 예언의 내용이 300회 이상이나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은 기다림에 대한 책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신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끈질기게 기다리는 것이 그의 신앙이요, 초대교회의 신앙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서신의 요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 성도들이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 성도들에게 갚아주시는 그 보상은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고 분명한 것이고 황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은 잠시 당하는 고난이며, 따라서 머지 않은 때에 오실 우리 주님과 함께 누리게 될 그 황홀한 승리를 기다리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사도 요한의 신학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나라의 영광이 너무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그 영광의 구원을 우리가 영접하고 오늘 묵묵히 기다리면 반드시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기다림 신앙의 출발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그렇습니다.  우리 여호와는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기에 지쳐버린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돌리는 역사의 맷돌은 비록 천천히 돌아가지만 정확하게 돌아가서 진리는 승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승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확실한 심판을 믿습니다.  확실한 구원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와 방법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날을 기다려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구원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이 아닙니다.  문제의 원인은 분명히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다려 주심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긍휼이요 은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손길은 가장 정확한 때에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도착되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 이 순간에 역사가 멈추어지고 우리 인간들의 모든 불의를 다 들어내신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이 순간에 우리의 호흡이 멎고 우리의 임종이 닥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끝났습니까?
바로 이 순간에 역사의 종말이 임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 그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다고 하면 여러분의 영성이나 인격이나 여러분의 삶의 신앙의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갖추어져 있습니까?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양식은 준비해 놓으셨습니까?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께서 참고 인내하고 기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한 그루 나무처럼 앙상하게 서 있을 때에 농부는 눈물을 지으며 주인에게 강청을 합니다.  한 해만 더 참아 주십시오.  내가 거름주고 가꾸어 보겠습니다.  이제는 열매를 맺을 날이 있겠지요.  하나님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것이 진실한 신앙인들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 주님이 원하시는 자리에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 우리 교회로부터 촛대를 옮기지 마시고 성령을 거두지 마시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좀 더 진실해 보겠습니다.  교회를 좀 더 사랑해 보겠습니다.  이 교회가 주님의 신부인데 벌거벗은 모습으로 신부를 주님께 세울 수는 없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초라한 이 모습으로 신부된 교회를 돌려드릴 수 없사오니 주여, 참아주십시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진실한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저 자신이 엎드려 우리 교회를 주님 앞에 세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옵니다.  "주님, 주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준 그 영광스러운 신부된 교회를 우리가 이루어 보고 싶습니다.  이 마지막 종말의 때에 성령께서 이루어 가시는 그 복된 교회의 모습을 우리가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도 미약합니다.  

벌거벗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철없기 짝이 없습니다.  하오니 좀 더 진실하게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좀 더 아버지의 은혜를 갈망하며 그 권능으로 교회를 세워가겠습니다.  우리 교회를 위하여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이것이 이 교회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기도의 제목이 아니겠습니까?

저 자신이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거는 기대가 있음에 뻔히 알면서도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목회자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에, "기다려 주십시오.  좀 더 기도해 보겠습니다.  좀 더 교회를 사랑해 보겠습니다.  좀 더 매달려 보겠습니다.  좀 더 땀흘려 보겠습니다.  주여,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진실한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하나님의 기다려 주심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참고 기다려 주심에 긍휼이 있고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중요한 이유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본문 18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몰라서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게 능력이 없어서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향하여 좀 더 기다려 주시는 것이 나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기에 기다려주십니다.  그것이 내게 더 유익한 길이 되는 것이고 나를 용서하는 길이 되는 것이기에 기다려 주십니다.  그것이 나를 향한 아버지의 긍휼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다려 주십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또한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시편 37편 7절에 보면,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그렇습니다.  잠잠히 기다리라.  불평하지 말고 기다리라.  원망하지 말고 기다리라.  초조해 하지 말고 기다리라.  순종하며 기다리라.  인내하며 기다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시련이 올 때 불평이나 낙심 대신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의 손길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 시험 다음에 주실 더 큰 복을 기대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 캄캄한 터널이 끝나는 시점에서 내게 펼쳐주실 밝고 환한 길을 보여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지 못합니다.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빼앗겨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훈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불평하다가 망했습니다.  원망하다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가는 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로 인도하시든지 믿음으로 참고 인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광야로 인도하시면 광야로 가십시오.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나를 아골골짜기에로 인도하시면 아골골짜기로 가십시오.  거기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왜?" 라고 항변하지 마십시오.  원망하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바른 신앙은 어떤 상황에서도 순종하면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후회합니다.  자신만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손들까지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셨으면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면 주십니다.  그런데 기다리다가 안되니까 자기 꾀를 내는 겁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젊은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이스마엘은 기다리지 못해서 낳은 불신앙의 아들입니다.  결국 기다리지 못한 아브라함의 그 한 번의 실수가 얼마나 커다란 불행이 되는 것입니까?  지금까지도 중동에서 쏘아 올려지고 있는 저 포화들, 저 불길들은 바로 아브라함이 기다리지 못한 불행에서부터 시작된 역사였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7년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원망하지 아니하고 14년을 기다렸습니다.  과부 안나는 84년을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다리다가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우리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조급하고 기다리기를 싫어합니다.  뭐든지 빨리 빨리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좀 더 빠른 인터넷을 원합니다.  식사도 뜸들이는 식사가 싫습니다.  그래서 패스트푸드를 즐깁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조급해서는 안됩니다.  기다림의 법칙을 배우셔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탄절의 의미는 기다리는 데에 있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기다리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신약에서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재림하실 예수,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종말론적인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 끌려가고, 로마의 침략을 당하면서 2천년동안 나라가 없는 모진 세월 속에서도 그들은 기다림의 신앙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거기에 참된 신앙의 맛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절한 고통에서도 "메시야는 반드시 오십니다"를 노래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보다 조금 늦게 오실 뿐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주제곡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도들이 만날 때마다 "마라나타! 예수님이 오십니다"를 이야기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타락한 시대에는 종말의 환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성이 맑은 시대는 언제나 종말의 환상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이 땅의 삶이 모든 것입니다.  썩을 것들을 붙들고 함께 썩어 가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성이 맑은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초점과 인생의 목표를 두고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어리석은 사람들, 정상일보 직전에서 돌아선 발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응답되기 일보직전에 덮어버린 기도의 제목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꿈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꿈을 가지고 언덕을 올라갑니다.  그러나 목표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아서 돌아섭니다.  그러나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나갔더라면 거기가 정상인 것을...  기도해 봅니다.  응답이 없습니다.  덮어버립니다.  그러나 한 번만 더 매달렸더라면 응답될 기도의 제목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프리카의 어떤 마을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이 마을에서 기우제를 드리기만 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리는 겁니다.  열흘이고 한 달이고 1년이고 2년이고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리면 반드시 비가 오더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인생의 신비가 있습니다.  한번 출발했으면 도착할 때까지 달려가는 겁니다.  한번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꿈을 꾸었으면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때까지 믿고 나가는 겁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500여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

그런데 그 말씀을 믿고 끝까지 기다린 사람은 120명의 성도 밖에 없었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렸던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했습니다.  각 사람의 머리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권능을 체험하게 됩니다.  바람 같은 역사를 보았습니다.  모두가 다른 방언을 된 것입니다.  세계를 바꾸는 위대한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다락방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방문을 걷어차고 일어났습니다.  세상으로 흩어져서 땅을 정복하는 위대한 인물들이 된 것입니다.

영국의 훌륭한 세실이라는 글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번은 세실이라는 사람이 자기 딸아이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습니다.  많은 물건을 샀는데 아이가 다리 아파 하니까 공원에 데리고 나와서 앉혀놓고는 이야기합니다.
"아가야,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  아빠가 인형 사고, 물건 사고, 맛있는 것 사 가지고 올 테니까 꼼짝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야 된다."

그런데 아빠는 이것 저것 물건을 다 사 가지고 차를 몰고 집으로 와 버렸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니까 아기 엄마가 묻습니다.  "메리는?"  깜짝 놀란 아버지는 사왔던 모든 물건들을 방에 던져놓고 차를 몰아서 공원으로 달려갑니다.  해는 서산에 지고 어둑어둑 해지는데 아이가 오돌오돌 떨고 있습니다.
왈칵 끌어안으며 "아가야, 왜 여기 앉아있니.  집에 돌아오지 않고."
"아빠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아빠는 오셨잖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지금 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어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나 혼자 추위에 부들부들 떨고 있다고 생각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십시오.  한번 약속하신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반드시 만나주실 것입니다.  약속하신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기다리다가 예수를 만난 한 노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이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참된 신앙의 본질을 가르쳐 주는 소중한 본문이 됩니다.  이스라엘에는 아기가 태어난지 8일이 되면 사내아이는 할례를 행하고 산모는 40일만에 성전에 올라가서 정결예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대게는 양을 잡아서 정결예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가난한 집의 사람은 비둘기 한 쌍을 들고 올라가서 정결예식을 행합니다.

예수님과 마리아도 비둘기 한 쌍을 들고 올라가서 정결예식을 행하는데 한 노인이 오더니 아이를 덥석 품에 안고 기도하는 겁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주의 구원이란 예수라는 말을 풀이해서 쓴 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이란 뜻입니다.  "예수를 제게 보여주셨으니, 메시야를 제게 보여주셨으니 제가 이제 평안히 눈을 감겠나이다.  오늘 죽어도 이제는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시므온이라고 하는 노인입니다.

시므온이 자기 백성을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했습니다.  타락하고 어두워져 가는 역사를 가슴에 끌어안고 몸부림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메시야를 속히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내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십시오.  어두워져 가는 이 땅에 빛으로 찾아와 주십시오.  썩어 문드러져 가는 이 세상 속에 찾아오셔서 이 백성을 살려주십시오."
그때 성령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네가 눈을 감기 전에 메시야를 보게 될 것이다."
얼마나 감격스런 순간이었을까요?

그러나 시간은 흘러 흘러 그의 머리는 백발이 되어져 갔습니다.  이제는 오늘 눈을 감을지 하나님이 내일 부를지 모르는 절박한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여느 때처럼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시작했는데 성령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종아, 눈을 뜨거라.  저 아이가 메시야이니라."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그가 얼마나 펑펑 울었을까요?  아이를 품에 안고 울면서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약속하시더니 메시야를 제게 보내주시는군요.  예수를 제게 보여주시는군요.  구세주 그리스도를 보내주시는군요.  이제는 평안히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습니다.  오늘 죽어도 소원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노인이 예수님을 품에 안았다고 해서 회춘하여 이제 출세길이 열리겠습니까?  아니면 이 노인이 예수님을 품에 안았다고 해서 세상의 부귀영화권세를 누리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만난 행복으로 감격해 합니다.  여기에 행복의 절정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  메시야를 만났다.  내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임재하여 주셔서 나를 만나고 계신다.  하나님의 권능이 내게 임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예수를 믿는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만난 행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오기 때문에 선물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이 성탄절기를 통하여 예수 만나기를 그렇게도 우리는 갈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한 분 만으로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예수 한 분 만으로 우리는 벗어도 좋고, 예수 때문에 울 수 있고, 예수 때문에 웃을 수 있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행복, 예수 안에 있는 그 행복을 아십니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예수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 안에 부가 있고, 예수 안에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기쁨이 있고, 예수 안에 참된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 인생의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을 다 가져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 권세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예수가 없는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요 망한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늘 고독하기 짝이 없습니다.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반드시 응답될 것입니다.

강철왕 카네기의 사무실 한 가운데는 낡고 커다란 그림 하나가 평생동안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아니었고 골동품적인 가치가 있는 그림도 아니었습니다.  커다란 나룻배 하나와 배를 젖는 노가 썰물 때에 밀려서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무척이나 절망스럽고 처절하기까지 보이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 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반드시 밀물의 때는 온다!"

소년시절의 카네기는 세일즈맨으로 이집 저집 방문하면서 물건을 팔고 있었습니다.  한 낡은 집에 들어갔을 때에 그림이 한 폭 걸려있는데 바로 그 그림이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요구했습니다.
"할아버지, 이 그림 저 주시면 안되나요."
"안 된다.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그림이란다."
"할아버지, 제가 돈을 많이 벌어서 사면 이 그림 저한테 파실래요."
"안 된다.  내가 아끼는 그림이기 때문에 안 된다."
"어떡하면 좋아요."
"내가 죽거들랑 네가 가지려무나."
"그럼 약속하세요."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가 그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 약속처럼 그 그림을 얻어 옵니다.  그리고 자기 사무실에 둔 것입니다.  "반드시 밀물의 때는 찾아온다!"  이것이 카네기의 생활신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의 믿음 생활이,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사업이, 여러분의 삶이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는 나룻배 한 척처럼 처절한 삶으로 이 시간에 와 계신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믿으십시오.  반드시 밀물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밀물이 여러분의 삶을 뒤덮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은혜의 강물이 폭포수처럼 여러분에게 밀려오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약속의 주님이 여러분을 만나주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의 그 나룻배는 다시 바다 위에 떠올라 저 푸른 창공을 헤엄치게 될 것입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인생에도 밀물의 때는 반드시 찾아오고야 말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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