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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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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눅 15:11~24)


21세기 최고의 영성가는 헨리 나우웬(Henry J. M. Nouwen)입니다. 영적으로 탈진상태에 빠져 몹시 힘이 들었을 때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이란 작품을 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돌아와 무릎을 꿇은 아들의 등에 아버지가 손을 얹고 영접하는 내용입니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나우웬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력하게 사로잡혔다고 회고하였습니다. 그는 그림을 통해 탕자가 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아버지 품에 머리를 기대어 안식을 얻는 탕자를 보면서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아버지 품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또 자신이 맏아들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탕자의 형인 맏아들이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명을 어긴 일이 없다던 맏아들처럼 모범적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림 앞에서 나우웬은 자신의 다른 면을 보았습니다. 자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질투심, 분노, 성급함, 완고함, 무뚝뚝함,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불평이 많은 사람인지, 얼마나 적개심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작은 아들처럼 집을 뛰쳐나간 일은 없지만 그에 못지 않은 탕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맏아들의 모습은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준 유대인의 모습일 뿐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우웬은 그림을 통해 받은 영감으로 '탕자의 귀환' 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버리고 품군 의식을 가지고 캐나다의 라쉬르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 정신박약 장애인들을 돌보는 사역에 남은 바 생애를 헌신하였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무시하고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인 소유에만 관심을 가지는 의식이 탕자적 사고방식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소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과 관계보다 하나님을 통해 오는 소유 즉 축복에만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통해 주어지는 소유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다함께 복음성가 '탕자처럼' 을 찬양합니다. "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애타게 기다리는 부드런 주님의 음성이 내 맘을 녹이셨네 오 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주소서 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이 몸을 바치리라." 탕자는 아버지와의 관계보다 소유를 중시한 결과,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먹지 못하는 처참한 지경에 떨어지게 됩니다. 본문 18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분깃' 이라는 소유로부터 '품군' 이라는 관계로 전환되고 있는 탕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라는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더 낮아지게

히틀러(A. Hitler) 당시 나치(Nazi) 군대는 막강하였습니다. 주변의 국가들을 점령하여 나갔습니다. 그리고 유럽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죽였습니다. 나치 군대는 국가를 점령하면 명령합니다. "유대인들은 노란 별을 가슴에 달아야 한다. 만일 노란 별을 달지 않다가 발견되면 즉시 사형이다." 나치는 수많은 유대인을 찾아내어 학살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을 죽이지 않고 보호한 국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덴마크입니다. 국왕 크리스티안 10세(Christian X)는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생명의 고귀함을 알고 전국에 공포하였습니다. "덴마크의 국민들은 가슴에 노란 별을 모두 달아라" 나치로 하여금 유대인과 덴마크인을 구별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덴마크 국민은 히틀러가 미워하는 유대인으로 낮아져 그들과 같이 행동하였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탕자는 자신이 당한 고난을 통해 더 낮아졌습니다. 아버지를 향해 분깃을 달라며 버릇없이 굴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어려움을 당함으로 낮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히 낮아지는 자를 가까이 하십니다. 이전의 탕자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로 살아가는 의무를 속박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자유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극히 겸비하여진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아들로 대우받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품군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아들로 대우받지 못해도 아버지를 바라보며 관계를 가질 수 있다면 집에서 살고 싶다는 소원을 가진 것입니다. 아버지께 돌아오기 전에 탕자에게 일어났던 놀라운 의식의 변화입니다. 낮아지려는 마음의 변화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낮아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잘못했어도 잘못을 모른다면 구제불능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합니다. 초라한 모습을 보며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왜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는가" 자문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문명은 탕자 문명입니다. 지금보다 더 낮아져야 합니다. 겸손으로 더 낮아져야 합니다. 교만을 버리고 더 낮아져야 합니다. 깨달음이 없다면 멸망하는 짐승만 못하다고 성경은 교훈합니다. 주어진 기회를 통해 더 낮아질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더 뉘우치게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Susannah Wesley)에게 고집이 세고 거친 딸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녀가 딸 앞에 검정 숯 한 다발을 두고 말합니다. "숯을 한번 안아보렴" 딸이 싫다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수산나가 다시 말합니다. "이 숯은 뜨겁지 않다. 불에 델 염려가 없으니 걱정말고 안아보아라" 딸이 말합니다. "숯을 안으면 손과 옷이 더러워지잖아요?" 그때 수산나는 딸을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 행동도 마찬가지다. 

너의 잘못된 행동이 너에게 화상을 입히지는 않겠지만 네 영혼을 더럽게 만든단다." 잘못된 생활을 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이 좀먹어 들어가게 된다는 교훈을 준 것입니다. 수산나의 말을 들은 딸은 진심으로 뉘우치며 못된 고집과 행실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탕자는 극적인 유턴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하고 싶은 대로 달렸지만 아무도 말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막다른 골목에서 진정으로 뉘우칩니다. '스스로 돌이켜' 라는 의미는 탕자가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분깃을 요구할 때도 자신을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자신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얼마나 자신이 큰 죄인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잘못을 인식하고 잘못된 자기를 바라보는 뉘우침이 일어난 것입니다. 

회개의 첫 걸음은 자신을 알고 뉘우치는데 있습니다. 뉘우침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 되었는지 모르던 사람이 잘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의 요소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개(悔改)의 회(悔)는 뉘우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이 가르쳐 주는 대로, 성령이 역사하는 대로 뉘우치게 될 때 진정으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동안 살아온 모습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당했는지 뉘우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길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길이 됨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로 더 돌아서게

하나님을 잘 믿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대학에 가더니 신앙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부모는 아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였습니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입대한 아들이 전투에 임하게 됩니다. 최전방에 배치된 아들은 큰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상태가 악화되어 생명까지 위독해졌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더 나은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청년은 죽음을 앞두고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군목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살려만 주시면 하나님 위해 살겠노라 결단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 후 그는 평생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필라델피아에 템플(Temple) 대학을 세우고, 템플 침례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종합병원을 세 개나 세웠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기독교 교육으로 유명한 러셀 콘웰(Russel Conwell)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잘못을 뉘우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을 전환하여 아버지 집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주인 노릇을 포기하고 품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 중심을 포기하고 아버지 중심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방향 전환만이 진정한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주여' 는 하나님이 주인이고 나는 종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말로만 '주여! 주여!' 하고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노라고 다짐하는 방향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돌아가야 합니다.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 완전히 하나님께 돌아서야 합니다. 

회개한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품군의 하나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잊지 아니했습니다. 아무런 권리도 없이, 이름도 빛도 없이 그저 아버지 집에 돌아 온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집에서의 생활은 감사와 찬송, 충성과 감격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전에는 불평과 교만과 자기주장에 사로잡힌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순종하는 품군이 된 것입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으며 잔치하는 기대에 가득 찬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잘난 척하며 불평만 일삼는 맏아들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위선과 자기자랑, 자기공로와 교만으로 나오는 자는 아버지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로지 순종하는 품군이 되어야 합니다. 탕자처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고용된 품군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의 주장과 권리, 자랑과 자유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칩니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라며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충성해야만 합니다. 부디 지금보다 더 낮아짐으로, 더 뉘우침으로 하나님께 돌아서는 품군이 되어 아버지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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