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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중하십시오 (마 10: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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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하십시오 (마 10:40~42)


(마 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 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초등학교 출신인 다나카가 동경대 출신이 많은 대장성 장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앨리트 관료 집단의 본산인 대장성에서는 노골적인 불만이 표출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나카는 1분도 안되는 취임사 한마디로 우려와 불만을 일거에 해소했습니다. "여러분은 천하가 알아주는 수재들이고 나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대장성 일에 대해서는 깜깜합니다. 

그러니 대장성 일은 여러분이 하십시오. 나는 책임만 지겠습니다." 대장성 직원 모두가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해주자 일순간 그들의 마음문이 활막 열렸습니다. 모두 다나카를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나카의 리더십이 인정을 받아 일본 수상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존중하는 마음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학생이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부모님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존중하지 않습니다. 직장안에서도 상사를 부하직원이 존중하지 않고 부하직원을 상사가 존중하지 않으며 동료간에도 피차 존중심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국가와 사회 지도자를 존중하는 모습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입니다. 사회의 그런 행태는 교회안에까지 스며들어와 교인들이 목회자에 대한 존경심에도 흠집을 내고 있습니다. 그런 자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도 나쁜 영향을 주어 영적으로 병들게 되고 은혜를 받지 못하게 만듭니다. 축복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존중은 하나님께 복을 받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우리안에 있는 존중하는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존중에는 큰 보상이 따릅니다. 우리 영혼이 풍성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좋은 복을 누리게 도와줍니다. 요이1:8에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열심히 일하고도 상을 잃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중에는 존중의 법칙을 모름으로 상을 잃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스라엘에 르호보암이라는 젊은 왕이 있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백성들이 찾아와 말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 솔로몬왕은 너무 많은 일을 추진했습니다. 우리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 너무 고달프게 했습니다. 당신이 짐을 가볍게 해주시면 우리는 즐거이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왕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백성을 돌려보냈습니다. 나이가 많은 신하들을 불러 상의했더니 "왕이시여 백성들의 필요를 잘 배려하여 섬기십시오. 

그리고 좋은 말로 대답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하고 조언했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노인들을 존중하지 않고 젊은 친구들의 말을 따라 "내 새끼 손가락이 내아버지 허리보다 굵다. 나는 내 아버지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지우리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때렸지만 나는 전갈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고 포학하게 말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열 두지파중 열지파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르호보암은 존중할 자를 존중하지 않음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날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고을에서는 큰 기적을 행하셨던 예수님이 나사렛에서는 소수의 병자만 고치실 뿐 큰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막6:5에 보면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무 권능도 행하시지 않았다'고 하지 않고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라고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나사렛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을까요? 바로 앞의 3,4절에 답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나사렛은 예수님이 자라난 고향마을입니다. 나사렛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들과 직업에 비추어 예수님을 바라보며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존중하는 마음이 없는 그들앞에서는 예수님도 권능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손해입니까? 예수님입니까? 고향사람들입니까?  다른 동네 사람들은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렛의 병자들은 대부분 치유받지 못했습니다. 축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존중하지 않는 이들앞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도 변함없습니다. 

존중을 뜻하는 그리이스말은 티미입니다. 티미라는 말은 '중요시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이스사람들에게 티미라고 말하면 '금처럼 귀중하고 중요한 것'을 떠올립니다. 존중의 반대말은 경멸입니다. 그리스어로 '아티미아'인데 '흔하거나 평범하거나 천하게 취급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이사야 29:1)"  참된 존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흘러 나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귀하고 중하신 분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흔한 동네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들도 병낫기를 원했으나 그때문에 신유의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속으로 예수님을 경멸했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니 예수님을 판단만 하였습니다. 존중하는 마음대신  조롱하고 멸시하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고 했습니다. 어떻게든지 책잡으려고 엿보고 다녔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자세가 복을 차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가버나움에서 만난 백부장은 예수님을 몹시 존중했습니다. 심각한 중풍병에 걸린 죽어가는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마."라고 말하자 백부장은 "주여, 내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마8:8)'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았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는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자기 딸을 귀신에게서 구해달라고 계속 졸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녀로 먼저 배울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덕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몹시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존중하는 마음을 접지 않고 나아가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예수님은 여인이 끝까지 당신을 존중하는지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존중심을 접지 않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녀의 믿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존중하는 믿음의 보상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치유받기 원하세요?  여러분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하세요?  상을 받기를 원하세요?  그렇다면 먼저 예수님을 존중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존중심없이 노골적인 경멸의 태도로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풍성한 존중심으로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존중심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중에 보상을 받은 이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그러나 풍성한 존중심으로 끝까지 예수님께 나아간 이들은 모두 기도응답, 치유, 능력 경험 등 좋은 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존중의 법칙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엘리의 집안사람들은 하나님을 아주 멸시하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우습게 여겼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가로챘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고 하나님께 받은 직분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녀들을 더 중시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데도 엄하게 꾸짖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아 집안이 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어리지만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마음을 다하여 성전에서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존중히 여겨서 사람들도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사무엘은 아주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마음이 어디서 왔을까요? 그의 어머니의 영향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는 한나입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 스트레쓰가 심했습니다. 게다가 시앗인 브닌나는 아이를 잘 낳는 것입니다. 브닌나는 자주 한나의 약점인 불임을 가지고 놀려 격분케 하였습니다. 한나가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 울며 괴로운 마음을 토하며 오래 기도했습니다. 그때 엘리가 한나를 술이 취하여 주정하는줄 알고 다가와 술을 끊으라고 책망했습니다. '무슨 선지자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줄도 모르고 술취한 것으로 오해하느냐?'고 화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한나는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존중심을 품고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기도응답으로 임신하고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그런 한나의 존중심을 사무엘이 본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축복도 그대로 상속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접한다는 말은 존중하는 것입니다. 영접이라는 단어를 빼고 존중이라는 단어를 넣으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하나님은 존중하는 방법은 아들이신 예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께로 내려오는 권위체게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보내셨고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위 질서에서 다음은 선지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대변인 역할을 했습니다. 선지자를 존중하는 자들은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엡4:11에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식으로 바꾼다면 '사도를 존중하는 자는 사도의 상을 받을 것이요, 선지자를 존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전도자를 존중하는 자는 전도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목사를 존중하는 자는 목사의 상을 받을 것이다.'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는 수많은 이단의 공격에 직면해 있습니다. 사단의 조종을 받는 이단의 무리를 우리가 어떻게 분별하면 좋을까요? 많은 사람이 설교를 들으며 교리를 가지고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가장 명확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교인들중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니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접촉하다가는 대부분 현혹됩니다. 너무나 간교하여 본색을 숨기고 교묘하게 접근하여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깊이 들어가 확연하게 드러낼때는 영적으로 다른 영에 사로잡혀 어쩔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쉽게 분별할 방법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이단의 공통적인 특성은 교회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비난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거나 목회자를 비난하는 일을 서슴치 않으면 틀림없는 이단입니다. 교회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성숙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교회의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따라서 사단은 교회를 공격합니다. 교회를 흠집내고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를 따르게하려고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를 깨뜨리는 자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자를 절대 가볍게 대하지 않으십니다. 교회를 중시하는 자에게 좋은 상을 주실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에게 붙여주시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자들에게 큰 상을 주실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선지자를 존중하는데서 의인을 존중하는 것으로 넘어갔다가 마지막으로 작은 자를 존중하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권위체계에 있어 우리 위에 있는 사람들, 우리 수준의 사람들, 그리고 우리의 보호아래 있는 사람 즉 우리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까지도 존중해야 한다는 말슴입니다. 우리가 우리 위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면 그에 따른 천국의 상이 준비됩니다. 우리가 동역자들을 존중할 때 또 다른 상급이 예비됩니다. 우리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해도 그에 합당한 상을 받게 됩니다. 

존 비비어 목사님이 미국 남동부의 한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의 감옥안의 있는 교회의 목사님이 같은 날 말씀 전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교도소는 주일 오전 8시에 예배가 있고 교회는 11시에 예배가 시작되기에 목사님은 수락했습니다. 주일 아침이 되어 교도소에 가보니 백여명의 재소자가 참석해서 온 마음으로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소자들이 지극한 존중의 자세로 목사님을 대했습니다. 

타지에서 온 사역자가 자신들을 찾아와 말씀을 전한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존중하는 마음이 넘쳤습니다. 어디에서도 범죄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날 아침 기름부으심이 강하게 임했습니다. 1시간 반동안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구원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성령충만해졌습니다. 병이 낫는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전임사역자로 부름받은 이도 생겼습니다. 모두가 너무 기뻐하며 감격했습니다. 

함께 간 목사님과 비비어 목사님은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이제 그 목사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얼마나 놀라운 예배가 될 것인지 기대에 차 있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분위가 잔뜩 굳어 있고 무언가에 짓눌려 설교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분위기가 살아나지도 않고 심령이 달아오르지도 않았으며 숨이 막히는 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교인들은 몸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들어본 얘기다. 외부 강사 설교도 많이 들어봤다. 당신이라고 뭐 다른 내용이 있겠나?"  엄청난 결과의 차이는 존중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 좋은 상을 받고 싶으십니까?  기도 응답이 풍성한 삶을 살고 싶으세요?  주의 권능으로 치유받고 싶으세요? 주님의 능력으로 존귀해지고 싶으세요?  예배 시간마다 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고 성령충만함을 맛보며 살고 싶으세요?  그러시다면 존중하세요.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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