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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판단력과 하나님 (민 13:30~33, 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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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판단력과 하나님 (민 13:30~33, 14:6~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굴이 흐르는 땅이니라.”(민14:8) 

우리에게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지식을 가져야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고 세상가운데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의 바탕에서 세상을 앞서가려면 새롭고 풍성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합니다.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식과 정보에 의한 합리적 판단을 바로 할 수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이 판단력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지혜이며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판단력의 지혜와 능력을 갖추는 데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판단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모세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12명의 정탐꾼들을 뽑아 그들이 들어가야 할 가나안으로 탐지하고 오도록 했습니다. 
40일 동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꾼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은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입니다.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한 요새처럼 되어 있고 매우 큽니다. 
그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거인들인 네피림 후손인 아낙자손들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비교해 볼 때에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기에 우리는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와 평가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며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고 분명한 판단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열 명의 보고와 평가를 들은 이스라엘 회중의 반응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우성치며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애굽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왜 우리를 이 땅으로 끌고 와서 죽게 하는가? 왜 우리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사로잡히게 하는가?” 이렇게 탄식하고 절망하면서 그들의 지도자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선동했습니다.   
  
이들의 반응은 나름대로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 없는 타당성과 이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원망과 불평은 합리적이며 이해할 만한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정탐꾼의 판단력은, 결국은 큰 문제를 만들었고 그들에게 불행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회중의 불평과 원망은 무익한 소동이었고, 가나안 약속을 성취하는데 낙오자들이 되게 했습니다. 10명의 정탐꾼과 회중들, 이들의 결과는 실패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의 판단은 객관적으로 정확하고 합리적임에도 잘못되었습니다. 왜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평가와 판단의 자리에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고려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판단력이 해가되는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큰 지식과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지식과 정보에 의한 뛰어난 판단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판단력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판단력의 위에 하나님이 계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 판단력 위에 하나님의 영역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 합리적 판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불평과 원망을 뛰어넘을 수 있고 새로운 창조적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판단의 자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판단력을 관리하시는 것이 되어야 판단력을 만들어낸 그 지식과 정보가 유익한 것이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십시오. 그들도 10명의 정탐꾼들과 같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가나안 원주민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기대하며 광야의 어려운 여정을 극복하고 가나안을 바라다보는 곳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판단대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10명의 정탐꾼들처럼 절망 속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하고 불평할 수뿐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회중들처럼 땅을 치고 울부짖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판단력위에 하나님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가졌습니다. 
그들의 판단은 믿음에 의해 통제되고 관리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다른 근거에서 가나안 정북의 가능성을 찾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14:8) 
  
그들의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판단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그들의 판단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의해서 통제되고 관리 되었습니다.
  
12년간 혈루증으로 앓아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당시 여인의 하혈은 불결하고 수치스러운 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병에서 고침을 받을까하여 유명한 의사들을 찾아가 여인으로서의 수치를 드러내는 괴로움을 격어야 했습니다. 오랜 투병생활로 재산도 모두 허비했습니다. 용하다는 모든 의사들이 여인의 질병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12년간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병을 고친다는 것은 상식적 지식으로나 정보적으로, 또는 통계적으로 볼 때에 불가능하다는 것이 합리적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적인 판단위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믿음이 그 여인의 판단력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내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을 것’(마5:28)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여인은 그 믿음을 행동화 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에워싼 무리 가운데 끼여 예수님의 뒤에서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그 때에 여인은 혈루증의 병에서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판단하는 곳에 꼭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판단하는 곳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기도하며 성경말씀을 명상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통제를 받는 판단이 되어야 그 판단이 유익한 것이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현실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판단에 머무르지 않고, 그 현실과 조건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싸움에서 능히 이기리라면서 할 수 있다는 확신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해주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믿는 그들에게는 가나안 땅이 자기들의 땅이 될 아름다운 땅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가나안 원주민들을 자기들의 먹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문제는 가나안의 현실이나 환경에 대한 분명한 평가와 판단 그 이상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가 어떤 것이냐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정확한 판단력 위에다 하나님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현실의 불리한 판단위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들에게 승리자요 새 창조역사의 성취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의 소유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의 영광의 자리에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높은 지식과 빠르고 풍성한 정보입니까? 그것을 가지고서 현실을 꿰뚫어 보는 분석력과 판단력을 갖추면서 살아갑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모든 것입니까? 판단하는 그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까? 살아가기 위한 지혜와 능력인 판단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까? 
  
왜 부정적이 되었습니까? 현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에는 뛰어나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데 앞장서지 못하다면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우리의 판단력위에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이 계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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