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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언약의 일꾼되는 증거 (고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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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의 일꾼되는 증거 (고후 3:1~6)
  

신앙 생활을 하면서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네비게이토 성경 공부에 들어가면 「5확신, 8지침」을 공부하는데 확신이란 중요하다. 확신 없는 신앙 생활을 하기에 작은 일에도 넘어지고 걱정, 근심 앞에서 실족한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구원의 확신, 기도 응답의 확신, 신앙 승리의 확신 등에 머물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사람들과 대면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간에도 거듭나지 못하고 육으로 사는 자들이 있었는데 바울은 사도도 아니고 일꾼도 아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도전하는 이들로 인하여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자신을 하나님이 세우신 천국 일꾼이요, 신실한 전도자임을 증거할 수 있을까? 

대부분 이 세상의 기관이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직임에 대해 분명한 증거를 요구하는 방법으로 추천서를 첨부하게 한다.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 DTS 훈련을 받으러 하와이로 가는데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고 서류를 가져온다. 취직할 때도 그 사람을 보증할 수 있는 추천서를 요구한다. 추천서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요구된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의 일꾼됨에 대해서 세상의 방법인 추천서를 지니는 방법으로 자기의 사도됨을 변호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추천서를 준비하거나 추천서를 받으러 다닐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면 바울은 자신이 새 언약의 일꾼됨에 대해서 어떻게 증거하였는가?

1. 성도들이 바울의 일꿈됨을 증거한다. (고후3:2)

고후3: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바울에게 있어서 바울의 일꾼됨을 증거하는 것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었다. 도덕적, 영적으로 무너진 항구 도시, 가장 타락한 우상 숭배와 매춘이 성행하는 도시에서 바울의 전도와 수고로 인해 죄에서 구원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이 사람들 보다 더 확실한 추천서가 있을까? 바울의 사역의 열매로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이야말로 바울이 최고의 일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일꾼됨의 확신을 가진 것은 추천서란 서류보다 전도의 열매로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에 두었다. 또 그 확신이 자기 자신만의 생각, 자기 자신만의 독단이 아닌 것을 언급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 우리의 추천서란 것을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 많은 사람이 바울의 전도로 인해 예수를 믿게 된 것,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동의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도 전도의 열매가 된 성도들을 보며 바울의 사도됨과 일꾼됨을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아니었다면 어찌 죄악의 도시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바울이 수고하고 근심하고 땀 흘리지 않았다면 어찌 성도들이 죄에서 떠나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18개월간 목회했던 고린도 도시의 뭇사람들이 바울 때문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 바울은 성도를 귀히 여긴다. 빌4:1에서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하였다. 그 사랑하는 성도가 바로 추천서를 대신해서 바울이 하나님의 참된 일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확신의 증거들이다. 

오늘 우리는 나 때문에 변화되고 나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의 직임을 받은 자라고 하면서 그 직임에 충성된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은 집사 증서나 장로 증서가 아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나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나의 일꾼됨을 보증하는 최고의 추천서다. 이제 종이나 서류에 의한 확신을 갖기보다 나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을 달라고 구해야 한다. 나 때문에 감동되어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어야 진정한 일꾼이다.

2. 만족함이 나의 일꾼됨을 증거한다. (고후3:5)

고후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바울은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고후3:4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무슨 확신인가? 바로 자신의 내면 속에 가득 차 있는 만족에 대한 확신이다. 바울의 만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람들의 박수 갈채인가? 명예의 올라감 때문인가? 아니면 스스로 도취되어 스스로 만들어낸 편견의 만족인가? 오늘 고후3:5의 말씀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이는 사람에게서 찾는 만족, 자기 자신에서 연유하는 만족이 아니다. 바울의 만족은, 아니 바울과 디모데로 이루어진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만족이다. 하나님이 만족하게 하셨다. 

고후5:6上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바울은 분명코 하나님이 자신에게 공급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새 언약의 일꾼의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만족이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만족이란 것은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다. 지금하고 있는 일에 대해 최고의 감정을 누린다는 것을 뜻한다. “전도자가 되기를 잘했다. 목회자가 되어, 교회의 직분자가 되어 새 언약의 일꾼 되기를 백 번, 천 번 잘했다.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길을 가는 것이 정말 잘한 일이다. 좋다. 행복하다.”라는 만족함이 있는데 어찌 내가 일꾼이 아니란 말인가?

고전15:10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게 하였다. 더 많이 수고하고 더 많이 애를 쓰고 때론 사망에 떨어지고 굶고 춥고 배의 위협, 강도의 위협 등 많은 어려움과 곤고를 겪었지만 바울은 슬프지 않다. 자신이 사울에서 바울이 된 것이 다 거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니 어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서 열심히 식겠는가?

딤전1:12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바울은 감사할 뿐이지 사역에 대해 불평한 여지가 없다. 아! 행복한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분토처럼 버리고 하나님의 직임을 감당하는 만족함에 거한다. 그 만족함이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일굼임을 확신시켜 주며 흔들릴 수 없는 일꾼됨의 증거다. 

교회의 직임을 받고 일하고 있다는 것이 무거운 짐인가? 아니면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도 만족함이 있는가?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하고 자랑스럽고 증거하고 싶은 만족함이 있는가? 금년에 나의 삶이 일꾼다웠는지, 직분 받은 사람다웠는지, 부서에 세워진 사람다웠는지 점검하라. 그 기준은 만족함이다. 만족함이 없다면 다시 일어서라.

3. 거룩한 성령이 나의 일꾼됨을 증거한다. (고후3:6)

고후3: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우리의 일꾼됨은 율법의 의무나 명령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신나게 일하는 것은 법적인 장치나 규정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이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다. 무조건 권사가 된 지 5년, 무조건 집사가 된 지 몇 년, 권사 1인은 15명 중에서, 장로 1인은 30명의 입교인이 있어야 직임을 받는다는 감리교 교리가 있다. 이는 순전히 법적인 요건으로 일꾼이 된 것이다. 그렇게만 세워지면 교회가 힘이 있고 교회 생활이 건강하게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을 살려내는 직임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을까? 

바울은 일찍이 증거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은 조문이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됨이라고 하였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기에 살리는 성령으로 내가 일꾼이 되었다. 우리는 나의 일꾼됨을 돌아보면서 이 증거를 신뢰하고 확신을 갖고 섬겨야 한다. 율법 조문에 의해 일꾼됨을 증거함 받는다면 사역은 짐이 되기 쉽다. 규칙이나 법, 명령에 의한 것은 외형적으로 사람을 움직이게 된다. 가령,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주는 율법은 한계가 있어서 문자를 충족시키는 선에서 일을 하기가 쉽다. 즉, 형식적이고 보이는 것에만 움직여지기 쉬운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선교회 회장이나 CM장(속장)들은 부흥회에 나와야 한다고 하면 체면 치레로 나온다. 일꾼들의 가슴에 불붙는 열정이 주어지지 않고 지켜야 할 규칙과 피할 수 없는 명령으로 하거나 하지 말라는 오더가 주어진다면 하기는 하되 그 사역은 짐이 되기 쉽고 항상 피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이 어찌 죽이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오직 성령으로 인해 일꾼이 되어 일한다면 사역은 가볍고 즐거움이 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꾼이 되었다는 것은 성도들의 마음 속에 성령이 오셔서 마음을 움직이시고 사랑의 마음, 감사의 마음, 은혜로 아는 마음, 드리는 마음을 먼저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게 하시고 명령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섬김의 봉사자로 일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억지로가 아니고 성령에 이끌리는 순종이 있기에 기쁨도 있고 의욕도 있고 창의성도 있고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은 살리는 것이요, 주어진 일을 멋지게, 아름답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의 일하는 것을 보라. 의무로 짐을 짊어지고 있는가? 사랑으로 짊어지고 있는가? 금년 추수감사, 이 감사가 의무로 된 이들은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오직 성령으로 힘을 얻고 사랑으로 섬긴 이들은 마음이 기쁘고 더 드리고 싶은 마음이 된다. 성령의 법에 이끌려 사랑으로 짊어지자. 우리 아이들이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심부름을 한다. 조건은 수고비 5,000원이다. 그러니 일을 해 내는데 목적이 있다. 

해 치우는데 목적이 있고 수고비에 관심이 있다. 이것이 율법의 ‘하라’는 조문과 같은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힘에 의해 심부름을 한다. 조건도, 수고비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해치우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잘 해드리는데 관심이 있다. 바로 이것이 영으로 하는 일과도 같은 것이다. 사랑으로 할 때 얼마나 더 잘하고 기쁘게 재미있게 하겠는가? 

나의 참 일꾼됨을 증거하는 것은 오직 성경이나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일이 즐겁고 사랑스럽고 신나고 자랑스러운가? 이 세 가지 증거를 가지고 자신의 하나님의 일꾼됨을 확신한다. 우리도 확신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확신해야 한다. 교회의 힘, 교회의 건강, 교회의 강한 역사는 내가 가진 확신 위에서 세워진다. “내가 무슨 하나님의 일꾼인가?”라며 그 자체를 부정하고 부끄러워 여기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 안에는 복음의 일꾼됨이 자랑스럽고 일꾼이 되었다는 확신에 선 사람들이 가득해야 한다. “나는 교사다. 사도다. 전도자다. 중보기도자다. 도우미다.” 등 그것이 내 혈관 속에 흐르는 프라이드가 되어 행복한 일꾼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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