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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순종 (마 2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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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순종 (마 21:28~32)


저도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만, 요즘 안경을 쓰는 사람이 점점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안경을 쓰는 것을 큰 결례로 여겼습니다. 조선 시대 헌종(憲宗) 임금 때였습니다. 어느 날 임금의 외숙이 안질에 걸려 안경을 낀 채로 임금 곁을 지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헌종은 그가 자신을 멸시했다고 생각하여 화가 났습니다. 그는 <외숙의 목이라고 칼이 들어가지 않을까?....>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임금의 외숙은 며칠 동안 고민하던 끝에 자결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지만, 당시에는 윗사람 앞에서 안경을 벗는 것이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느 사회에나 권위 체계가 있습니다. 이 체계가 무너지면 사회는 무질서해질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에서 가장 권위있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들에게 매우 불쾌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예수라는 선생이 성전을 뒤집어엎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돈 바꿔주는 사람들과 비둘기 등의 짐승을 파는 사람들의 상을 뒤집어버리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고, 그 권위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감히 성전에 와서 제 멋대로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한 그들은 예수님께 따지러 왔습니다. 21장 23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였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님은 대답 대신에 질문으로 대응하셨습니다. 그들이 권위를 가지고 문제를 삼았으므로 예수님도 권위에 대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다시 말해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권위는 하나님이 준 권위인가, 아니면 요한이 자기 마음대로 준 것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질문을 받은 대제사장들은 딜렘마에 빠졌습니다. 만약 요한이 세례를 베푼 것이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의한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대제사장들이 요한을 무시했으므로 <너희는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물으실 것이고, <요한이 자기 마음대로 세례를 준 것>이라고 대답하면 백성들이 요한을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눈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고민 끝에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요한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권위를 설명해 보았자 그들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권위의 문제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례를 베푸는 요한의 권위와 성전 관리를 맡은 대제사장들의 권위 중 어느 것이 더 큰 권위입니까?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므로, 성전을 관리하는 권한은 그 무엇보다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이유는 성전은 이미 제 구실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강도의 소굴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푼 세례는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사람들마다 와서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 앞에 엎드려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미 제구실을 못하는 성전을 관리하는 대제사장들의 권위 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세례를 베푸는 요한의 권위가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권위는 어느 정도일까요? 한 마디로 예수님은 이들이 상상도 못할 위대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 분은 대제사장들이 관리하고 섬기는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은 요한을 보내 세례를 베풀게 하신 분입니다. 또 그 분은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 보다 더 위대하신 분은 없습니다. 

그 분 앞에 대제사장들과 요한 모두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요한은 말하기를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 즉 예수님의 종노릇을 할 자격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제사장들이 와서 예수님을 야단치듯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이는 마치 문을 여는 집 주인에게 도둑이 <누군데 문을 여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이 안하무인격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바로 그 비유입니다. 그 비유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포도 농사를 짓는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가겠습니다>라고 시원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일하러 가지는 않았습니다. 실망한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똑같이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둘째 아들은 <싫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이게 비유의 내용입니다.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둘 중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대답합니다. <둘째 아들이니이다> 

그 때 예수님은 신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31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최고로 여겨 교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위에 계신 하나님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요한을 핍박했습니다. 오히려 세리와 창녀 같은 천한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대제사장들 보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권위를 가진 분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순종입니다. 학생은 선생님의 권위 앞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부하 직원은 더 큰 권위를 가진 직장 상사의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은 아버지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은 입으로만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행동으로 순종했습니다. 본래 순종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하기 때문에 두 아들 중에서 순종을 잘 한 사람은 당연히 작은 아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 등은 큰아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늘 하나님 앞에 <예>라고 대답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성전도 강도의 소굴처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세례 요한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 등은 작은 아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의 과거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의 말을 듣고 뉘우쳐 회개했고, 그 후에는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를 대제사장들 보다 더 낫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 봅시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순종합니까? 큰아들처럼 말로만 순종하십니까? 아니면 작은 아들처럼 행동으로 순종하십니까? 이 시간 우리 모두 하나님께 다시 한번 순종을 다짐하길 원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순종이 예배보다 더 낫습니다.

또 순종은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노아는 순종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노아가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6장 22절을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순종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또 순종은 복을 가져다 줍니다. 창세기 26장 2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애굽으로 가지말고, 가나안 땅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삭이 어떻게 했나요? 이삭은 순종했고, 그 해 농사를 지어 백 배나 얻었고,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철저히 순종하십시오. 그래서 구원을 받고, 복을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이제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왜 순종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왜 순종하십니까? 상대방이 높기 때문입니까? 세상의 대부분의 순종은 이런 경우입니다. 직장에서 상사가 높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군대에서는 계급 때문에 순종합니다. 돈 많은 사람의 말에 따르는 경우가 많은 이유도 그렇습니다. 상대방이 높아서, 힘이 세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할까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엔 순종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 원 참 더러워서...언제까지 저 꼴을 보겠나, 이번에도 승진 안 되면 다 때려 치워야지. 설마 산 입에 거미줄치겠어?> 라고 합니다. 그것도 그냥 말하지 않습니다. 발길로 의자라도 걷어차면서 말합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 없으세요? 이런 순종은 순종하는 사람도 불행하고, 그 윗사람도 불행합니다. 이것은 순종이 아니라, 굴종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굴종이 많이 발생하면 할수록 그 사회는 비극적인 사회입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순종은 어떤 것일까요?저희 가족은 여섯 명입니다. 저희 부부와 네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 중 셋이 집을 떠나 있습니다. 아들은 대전에, 큰딸은 포항에 있고, 작은 딸은 기숙사에 있다가 주말에 옵니다.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입니다. 그러나 정말 크게 마음이 쓰이는 이들은 따로 있습니다. 다름 아닌 부모님입니다. 부모님께 마음이 더 많이 쓰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이들은 한창 건강하고 자신들의 일을 다 할 수 있는 나이이지만, 부모님은 연로하셨고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적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서울에 가면 형광등 교체도 제 몫입니다. 얼마 전에는 믿음의 따님들이 김해와 광주에서 와서 거실 바닥을 새 것으로 깔아드렸다고 좋아하셨습니다. 그 분들은 점점 약해집니다. 그럴수록 마음이 더 쓰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면 더 마음 편하게, 기쁘게 해 드릴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부모님께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분들이 높기 때문입니까? 힘이 있기 때문입니까? 부자이기 때문입니까? 후환이 두려워서입니까? 아닙니다. 단 하나의 이유는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모님을 대하면서 <사랑의 순종>을 배웁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부모님을 사랑하기 전에 부모님이 저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버님은 저를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치료 불가능한 병을 앓을 때 <하나님, 차라리 저를 데려가시고 이 아이를 고쳐주세요>라고 눈물로 밤새 기도한 분입니다. 제 인생은 그 분들의 투박한 손과 주름살과 눈물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제가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지만, 그 훨씬 이전에 그 분들은 제가 그 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먼저 저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들은 제게 절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권위는 신분의 권위도, 재물의 권위도 아닙니다. 그 분들이 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권위는 <사랑의 권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위는 사랑의 권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집에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그가 재산을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했을 것입니다. <얘야, 재산을 받아 집을 떠나면 안 된다. 그러면 네 인생이 잘못될 거다. 여기 내 곁에서 더 머물러라. 딴 생각하지 말고 포도원에나 가서 일해라> 아들은 이러한 아버지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그 후 비참하게 된 그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품꾼이 아니라 아들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 후엔 그 아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는 아버지의 말씀이 없어도 포도원에 나갔을 것입니다. 열심히 일했을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굴종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사랑의 순종>을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제가 오늘 포도밭에 나온 것은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은 아버지가 저를 사랑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는 저 같은 형편없는 녀석을 품꾼으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들로 받아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먹어버린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당신께 사랑의 순종을 바치는 이유는 당신이 아버지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거나, 돈이 많기 때문이거나,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사랑이 먼저 저를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릅니다. 이제 제 무엇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겠습니까? 생명을 다해 아버지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는 처음엔 불순종했지만, 후에는 뉘우치고 순종한 본문의 둘째 아들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사랑의 순종을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 탄생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33년을 사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 분이 먼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분은 우리에게 <사랑의 순종>을 요구할 자격이 있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십시오. 사랑하기 때문에 봉사하십시오.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전도하십시오. 다음 주일에 VIP 전도대상자를 모셔 오는 것도 체면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셔 오십시오.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사랑의 순종뿐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했던 것은 그 분을 사랑하는 대신에 우리 자신의 욕망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이제 올해도 한 달 남았습니다. <주님, 이제 다 비우고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길 원합니다. 

이해인 님의 <마지막 기도>라는 시를 읽어드립니다. 

이제 / 남은 것은 / 아무것도 없다
두고 갈 것도 없고 / 가져갈 것도 없는 / 가벼운 충만함이여
헛되고 헛된 욕심이 / 나를 다시 휘감기 전 / 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지
땅 밑으로 흐르는 / 한 방울의 물이기보다 / 하늘에 숨어사는 / 한 송이의 흰 구름이고 싶은 / 마지막 소망도 접어두리

숨이 멎어 가는 / 마지막 고통 속에서도 / 눈을 감으면 / 희미한 빛 속에 길이 열리고 / 등불을 든 나의 사랑은 / 흰옷을 입고 마중 나오리라
어떻게 웃을까 / 고통 속에도 설레이는 / 나의 마지막 기도를 / 그이는 들으실까 

잠시 후에 우리는 <주님 말씀하시면>이란 찬양을 부를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라면 멈춰 서기도 하고, 나아가기도 하고, 무엇이든 하면서, 그 사랑의 기쁨 속에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성탄은 순종으로 이루어진 축제입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 준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순종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오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배부른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순종은 놀라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순종의 사람으로 살길 원합니다. 아울러 순종하는 사람이 받는 은혜와 복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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