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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부당한 가인의 제사 (창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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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당한 가인의 제사 (창 4:1~8)


창세기 4:1-8
(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누가 가장 잘못했다는 생각이 듭니까? 물론 아벨은 아닙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가인과 하나님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가장 잘못한 것은 가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전혀 잘못이 없습니까? 하나님은 형제 살인 사건의 원인제공자 아닙니까? 4절과 5절에서 분명히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이 때문에 가인이 아벨을 질투하게 되었고 결국 살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불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으셨다면 가인이 동생을 죽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공평한 일이 가인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똑같은 노력을 한 것 같은데 나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거나 나보다 앞서서 나가는 친구들을 보면 내 노력은 열납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사업은 잘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의 사업은 이상하도록 쉽게 잘 풀려 가는 것은 볼 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별로 노력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좋은 데 시집가거나 또 좋은 부모 만나서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또한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잘도 열납 하시는데 자기 인생만 열납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부당하게 취급받는 것 같아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래전에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일생을 그의 음악과 함께 담아낸 명작이었습니다.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당대에 모차르트와 겨루었던 살리에르라는 궁정 음악가의 시선을 통해서입니다. 살리에르는 가난했지만 대단한 노력가였습니다. 그는 성실성과 노력, 인내 끝에 궁정 지휘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살리에르가 질투했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모차르트였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모차르트의 음악성을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는 음악성을 타고 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살리에르의 눈으로 볼 때 모차르트는 별로 연습도 하지 않고 놀기만 좋아하고 난잡한 생활을 즐기는 그런 저질스런 존재였습니다. 살리에르는 열심히 노력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는 자기에게는 그런 탁월한 음악성을 주지 않고, 저렇게 난봉꾼 같은 모차르트에게는 위대한 음악성을 하나님이 준 것에 불만이었습니다. 결국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를 죽음에 이르도록 만듦으로써 신에 항거하고 자기 스스로 정의를 실현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그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나는 이 세상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자이다.”고 외치며 끝을 맺습니다.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가인이 아벨을 죽이려고 할 때의 심정과 비슷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께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에게 기회를 주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나를 대우해주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5절의 가인의 모습처럼 심히 분해하고 안색이 붉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 가장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아마 목회자들일 것 같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를 하는 목회자들입니다. 한국교회 절반이 넘게 미자립 상태입니다. 지난 번 감리교단 통계를 보니 연 예산 5천만 원 미만인 교회가 약 56% 정도로 집계되었습니다. 10년 넘게 사역을 해도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목회자들이 기도가 부족합니까? 열심이 부족합니까? 아니면 설교를 못합니까? 아니면 학벌이나 지식이 부족합니까? 

아마 그들은 대형교회 목회자들이나 최소한 주변의 중소형 교회 목회자보다 못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지금처럼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는 좀더 나은 시대에 목회를 했더라면, 좀더 목이 좋은 곳에서 교회를 했더라면, 좀더 나은 후원을 받고 출발했던 라면 하는 상상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 자기가 부족해서 그렇지 하며 자조적인 마음도 들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자기 신앙이 하나님께 열납 받지 못한 것 같아 화가 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작은 교회 목회자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이것은 목회자들의 경우만이 아니라 요즘 젊은 청년들의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8,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빈둥빈둥 놀면서도 잘도 취직을 했는데 요즘은 아무리 노력하고 좋은 학점을 따도 취직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시는 분들도 하나님께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기도 응답이 주어지지 않거나 어려움이 닥칠 때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옆 사람은 별 문제없이 잘살고 있는 것 같아 더 화가 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충성도, 열심도 다 때려 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가인처럼 하나님께 화가 나 있습니다.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 

어떤 식으로든 가인의 형제살해에는 하나님이 연루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불공평한 하나님이나 폭군처럼 비쳐지는 곤란한 일이 발생합니다. 이 때문에 성경학자들은 어떻게든 하나님을 변호해주려 노력합니다. 그래서 나온 해석이 하나님은 선하신데 가인이 잘못했다는 식의 해석들입니다. 첫째 설명은 3절과 4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가인의 제사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아벨의 제사는 희생의 피를 흘리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제사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냥 나갈 수 없고 반드시 속죄의 피가 필요한데 아벨은 제대로 된 방법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인의 제사는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는데 이것은 자기 공로를 자랑하는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희생의 피 없이 하나님 앞에 서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제사 중에는 곡식 가루로 드리는 소제의 제사가 있고, 곡식의 첫 열매를 드리는 의식도 있습니다. 제사 방법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런 해석의 강력한 증거는 신약에서 또한 뒷받침을 받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그러나 이 구절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는 제사의 방법이 가인보다 더 나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에 의로운 제사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만약 제사 방법이 잘못되었다면 가인이 안색이 붉어졌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 제사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쳐주면 될 것이지 “선을 행하라, 죄를 다스려라.”는 모호한 말씀을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7절의 “선을 행하라, 죄를 다스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아벨은 선하고 가인은 악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실제 4절에서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셨다 하셨고, 5절에서 “가인과 그 제물”을 열납하지 않았다는 구절에 주목하면 하나님은 제물뿐만 아니라 그 인격을 보시고 그 제사를 열납하셨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즉 아벨이 선해서 그 인격과 함께 제물을 받으셨고, 가인은 그 인격이 악해서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신약에서도 아벨을 “의인 아벨”(마23:35)이라 부르기에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해석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이유에 대해서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명확히 밝히지 않은 것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열납하고 안하고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 정확한 답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마음이고 하나님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나타나셔서도 자신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습니다. 6절에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절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시며 세 번의 ‘어찌’를 사용하여 가인을 책망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이런 장면에 매우 익숙합니다. 특히 창세기에서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야곱과 에서가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그들이 무슨 선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뱃속에서부터 야곱을 약속의 조상으로 세웠습니다. 창세기 25장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선과 악을 알기도 전에,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전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휴머니즘이 발달한 현대인들은 이 구절들이 아주 불만족스럽게 보입니다. 그래서 합리적인 해석을 하려 하지만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토를 달지 않고 담담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큰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은,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에 순종하였습니다. 성경이 진리입니다. 여러분도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 라고 말씀하셨듯이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시겠습니까? 내가 금그릇이 아니고 은그릇일지라도, 내가 다섯 달란트가 아니고 한 달란트 인생일지라도 순종하시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종은 단순히 말씀 한마디 따른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운명과 인생에 대한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인생을 합당하게 빚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당신의 쓰임에 맞게 빚으셨습니다. 제가 이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여러분은 이방 여인으로서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나아왔던 수로보니게 여인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 하시며 모욕하였을 때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 하나님의 주권에 반항하기보다는 인정하고 오히려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였을 때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이 낫는 은혜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운명을 감사함으로 받고 거기서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변화는 바로 순종으로부터 일어납니다.

거부당한 가인의 제사

제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이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 생각하듯이 무리하고 폭군적인 주권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나누기 전에 먼저 오늘 4장 말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주인공은 가인입니까? 아니면 아벨입니까? 가인입니다. 왜 그렇지요? 가인이 대사를 많이 하니까! 영화의 주인공은 선한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 아니고 많이 등장하고 많이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말씀의 교훈은 가인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인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가인의 속성이 살아 있습니다. 불평하고 미워하고 살인의 충동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먼저 가인과 아벨의 이름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가인은 ‘얻다’라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허무, 증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으로 보아도 가인은 무언가 주어졌고 반면에 아벨은 박탈당한 인생을 보여줍니다. 부모가 어떻게 두 아들에게 이런 차별적인 이름을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름만 보면 마치 아벨은 콩쥐와 같은 인생이고 가인은 팥쥐와 같은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가인에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1절에서 보는 것과 같이 가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가인은 태어날 때 구원의 희망, 인류의 희망으로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또한 장자입니다. 성경이나 고대 근동에서 장자는 다른 아들보다 두 배의 재산을 소유합니다(신21:17). 모든 축복권과 가족의 어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대를 잇는 특권적 위치입니다. 반면에 차자는 태어날 때부터 불공평합니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장자인 형에게 빼앗기면서 태어납니다. 그는 가정의 약자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위는 장자의 차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상할 정도로 장자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장자인 가인보다 동생인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도 사실은 이스마엘이 먼저이지만 언약은 이삭에게 넘어갔습니다. 이삭의 두 아들 중 에서가 장자이지만 장자권은 차자인 야곱에게 넘어갔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있었지만 가장 축복받은 것은 열한 번째인 요셉입니다. 

요셉의 쌍둥이 아들 중 차자인 에브라임이 므낫세보다 더 큰 축복을 받습니다. 그때 야곱은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창48:19)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은 여덟 번째 막내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도 항상 큰 아들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자로 나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아들은 둘째 아들이었고, 큰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는 자로 나옵니다.

주님은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특권은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내가 장자이니까 축복은 당연히 나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리이지 우리의 권리가 아닙니다.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자기 제물을 열납하시고 그 위에 멋진 구름기둥이 떠오르는 것을 연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5절에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안색이 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실망 때문입니다. “내 제사를 받지 않으셔?” 아마 가인은 하나님을 천국에서 출장 나온 공무원 정도 취급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가인은 화를 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안색이 변하여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이지요. 내 인생이 이렇게 멋지게 풀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오래 동안 기도했는데 응답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그만큼 정성을 드렸는데 내 인생에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때 하나님을 향하여 심히 분해하고 안색이 변합니다.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그러할 때 가져야 할 마음이 무익한 종의 자세입니다. 어떤 종이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양을 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수고했으니 편히 쉬어라 합니까? 아니지요. 주인이 밥을 먹을 동안 옆에 서서 시중을 들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남은 밥이나 먹으로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들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고백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10) 우리가 특권을 주장하는 순간 가인처럼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지 그 대가를 취하지 마십시오.

노자 도덕경(10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지축지(生之畜之)하되 생이불유(生而不有)하고 위이불시(爲而不恃)하고 장이부재(長而不宰)한다” 즉, “낳고 기른다, 그러나 낳고도 소유하지 않고,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장성하게 하되 주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이 자녀 교육에 애달아하는 부모를 교훈하는 식으로 대한항공 중국여행 시리즈 TV 광고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에 적용이 됩니다. 내가 많이 헌신 했으니까 내가 누려야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부유하니까 나는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인간이니까 마땅히 자연을 지배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나라는 부유하니까 못사는 나라는 업신여겨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남한이 부유하고 힘도 세니까 힘없고 굶주린 북한은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장자야 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장자는 뻐기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이고 책임을 지는 사람이 장자입니다. 눈꼴사납게 뻐기면 통일을 이룰 수도 없고, 하나님은 어떻게 그 촛대를 옮기실 지도 모릅니다.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자에게는 인생을 불만스럽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죄를 다스릴지니라(7)

하나님은 이런 가인을 향하여 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가 문에 엎드리고 있다는 것은 마치 사자가 먹이감을 노리고 엎드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이 죄를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악과 앞에서 책임적인 존재로 설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이제 가인은 마음속의 분노와 질투의 유혹 앞에 이를 다스려야 하는 책임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죄니 이런 것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가인은 마치 그 아버지 아담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는 선택 앞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 선택에 따라서 그 운명은 결정이 될 것입니다. 만약 가인이 돌이켜서 아벨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면 그는 가족과 함께 평화와 축복의 시간을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 죄를 다스리지 못함으로 인하여 유리방황하며 자기도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가운데 살아야만 했습니다.

가인뿐만 아니라 우리도 한 순간 한 순간 선택해야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우리가 선을 택하며 나아갈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선택하면 그 앞에는 비참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죄를 다스리라는 것은 명령이기도 하지만 약속이기도 합니다. ‘다스릴지니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팀쉘’인데 이는 명령어가 아닙니다. 미완료 형태의 동사입니다. 그래서 ‘다스리게 될 것이다.’는 미래형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다스릴 수 있다’는 가능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제임스 딘 주연)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요 모티브 중에 하나가 바로 이 ‘팀쉘’이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 중 하나인 아버지 아담 트래스크가 마지막 죽어가는 장면에서 마지막 대사가 이렇습니다.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느낀다. 또한 나는 인간이 매우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별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인간은 우주 안에서 매우 사랑스럽고 독특한 것이다. 인간은 항상 공격을 받으나 결코 파괴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너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은 병약함에 지친 모습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으나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다시 시도했다.......‘팀쉘’..... (마침내) 눈이 감기며 그는 잠들었다.”

<에덴의 동쪽>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대대로 걸친 원죄와의 싸움입니다. 그들은 에덴을 건설하고 싶었지만 살인자 어머니와 아버지의 편애, 형제 간의 질투 때문에 고통을 겪고 실패를 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희망을 갖습니다. 죄를 다스리는 인간의 의지로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의지로 죄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이 예수님을 의지하여 우리는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이처럼 죄의 욕망 앞에 넘어지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죄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가 폭군의 그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모습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그 어떤 명령에도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는 축복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드시고 기르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세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모든 권리의식, 욕망들을 비우고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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