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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밤 4경에 (마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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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4경에 (마 14:22~33)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해질 무렵에 출발했으나 밤중이 넘도록 바다 가운데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과 들판과 마을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낭만이 깃든 곳입니다. 물빛이 아름답고 많은 종류의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어서 어부들에게는 중요한 생업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 야고보 등 제자들의 중심 그룹은 모두 그 바다 주변 마을 사람들로서 바다 사정에 익숙했습니다. 그렇지만 갑자기 몰아닥친 바람과 풍랑 앞에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세상의 단면입니다. 본서의 기자는 그 최악의 상황을 맞은 그 시간을 ‘밤 4경’이라고 하였습니다.

1. 말세적 상황을 나타냅니다.

24절에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고 하였습니다. 25절에는 그때가 ‘밤 4경’이라고 하였습니다. 밤 4경이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극적인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1) 어두움이 극심한 때입니다.

유대인들은 해질 때부터 해 뜰 때까지를 기준으로 밤과 낮을 구분하였습니다. 시간적으로는 대략 오후6시에서 아침 6시까지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한 경점(更點)을 세 시간으로 하기 때문에 밤 4경은 새벽 3시에서 6시까지입니다. 해가 넘어간 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경과되었고 곧 여명이 밝아올 시간이 가까왔기 때문에 어두움이 가장 두껍게 깔린 시간입니다.

성경은 밤과 어두움을 죄와 마귀의 상징으로 표현합니다(엡 6:12).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세상의 역사는 빛과 어두움의 대결로 이어져 왔습니다. 대낮과 같이 강렬한 빛이 있을 때는 어두움은 발을 붙일 수 없지만, 밤중이 되고 어두움이 지배할 때는 빛이 사그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곧 마귀가 권세를 부리는 말세적 현상을 나타냅니다(눅 22:53).

2) 고난이 극심한 때입니다.

복음서에는 갈릴리 바다에 배를 타고 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같은 장소에서 조난을 당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과 같이 가던 배에도 풍랑이 일어 제자들이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마 8:25). 바다 위에 배 타고 항해하는 사람일 경우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과 파도의 위험을 안고 있지만 어두움과 파도가 겹쳤을 때는 그 고통이 더욱 배가되는 것입니다. 말세가 가까울수록 세상에는 예측할 수 없는 재난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크게 고통받는 날이 이르게 됩니다(딤후 3:1). 천재지변과 같은 자연재난 뿐 아니라 질병이나 사고도 더욱 빈번하면서 죽음의 확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밤 4경의 갈릴리 바다는 예측할 수 없는 인간세계의 불안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3)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오는 때입니다.

누가복음 21:25에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어두움과 고통의 혼란한 시대가 되면 사람들은 진리의 개념이나 올바른 가치기준을 잃고 혼미하게 됩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많은 사람이 어두움 속에 혼란해 할 때 악한 사람은 더욱 악행을 하게 되고 선한 사람은 지혜를 발휘하여 더욱 밝고 건전한 삶을 실천한다고 하였습니다(단 12:10). 말세가 되면 사람들은 사리의 옳고 그름에 따라서 행동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육신의 소욕과 세상적인 편리함에 따라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도인의 빛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롬 13:12-14).

2. 인간의 한계가 드러난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모인 무리들을 보내는 동안 제자들에게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했습니다(22-23절). 제자들은 밤 4경이 될 때까지 파도와 싸우면서 지칠 대로 지쳐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 것입니다.

1) 지식의 한계입니다. 

‘아는 것은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래적으로 타고난 동물적인 지식이거나, 살아가는 동안 보고 듣고 배우면서 알게 되는 획득적 지식이든지 지식은 그것을 활용하기에 따라서 많은 유익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보다 뛰어난 지식을 가졌을 때 자랑하고 교만해 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지식은 불완전한 것이어서 결정적인 순간에 그 허점을 드러내곤 합니다. 갈릴리 바다의 제자들도 그 바다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부는 시간과 파도의 성향에 따라서 대처하는 요령도 터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는 그 지식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학문적인 지식이나 자기의 철학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경험의 한계입니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처음 당하는 사람과 이미 여러 차례 경험을 했던 사람은 대응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래서 나이와 연륜은 속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그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물고기를 잡아 본 경험이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녔던 경험이 풍부합니다. 그렇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한 풍랑 앞에서는 그들의 경험도 기술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세 앞에 인간의 경험이나 예측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지난날의 성공에 도취되어 있거나 과거의 관록만 내세우며 급변하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면 실패를 하고 맙니다. 인간의 무능과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사람은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3) 정신력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연약성은 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지성이나 감성 또는 의지적 결단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보통 때는 심지(心志)가 굳고 정신력이 강한 것 같다가도 위기를 당하거나 충격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면 쉽게 무너지고 주저앉게 됩니다. 제자들도 밤늦게까지 풍랑에 시달리는 동안 육체적인 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혼미상태에 빠졌습니다. 

26절에 보면 제자들을 구하기 위하여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유령인줄 알고 무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생명의 주님을 귀신으로 잘못 판단했다면, 천사로 가장하고 나오는 마귀를 주님으로 오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간 믿음이 좋다는 사람도 때때로 판단을 그르치면 엄청난 불행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활동이 개시되는 시간입니다.

밤 4경은 밤중에서 새벽으로 전환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어두움의 세력은 꺾이고 빛의 지배가 시작됩니다. 이때 예수님의 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 계시면서 고통당하는 제자들의 상황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시간에 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왕 오실 바에야 밤 2경이나 3경에 오셨으면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하룻밤이 거의 다 지나가는 그 시간에 제자들에게로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시는 동안 바다 위에서 고통당하는 제자들의 사정을 모르셨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지전능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상황을 실시간대로 다 체크하시면서 오히려 그가 원하는 시간까지 기다렸습니다. 오늘도 밤낮없이 구하는 성도가 기도의 응답이 늦어질 때 조급해 하기보다 주님의 시간에 맞추는 인내력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2) 주님의 방법으로 행동하십니다.

25절에 “밤 4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물 위로 걸어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원하시기만 하면 초자연적인 방법을 동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바다를 지으신 창조주이며 전능하신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방법과 주님의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이사야 55:9에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른 데도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방법으로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9:26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기독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신 자기 백성을 그의 손안에 붙잡고 보호하십니다(사 43:4). 보통 때는 모르고 지나는 것처럼 여겨져도 성도가 특별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잠시도 놓치지 않으시고 눈동자처럼 각별히 살피십니다(시 17:8).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광야여행을 주도했던 모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회고하면서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 도다”고 하였습니다(신 33:26). 

하나님께서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며 구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처녀의 몸을 빌려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일입니다.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낸 것이나, 물결을 밟고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처럼 그의 신비로운 방법이 오늘도 주님의 교회와 자기 백성에게 행사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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