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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흔적 (갈 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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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흔적 (갈 6:11~17) 
 
 
❚상처의 의미

여러분 몸에 혹시 상처 자국이 있습니까? 누구든지 살면서 크든 작든 몸에 상처 자국 하나도 안 난 분은 없겠지요. 저는 몸에 큰 상처 자국은 없지만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수술 자국이나 상처 자국이 제법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허벅지에 흉한 상처 자국이 하나 있습니다. 웬 흉터냐고 하니까 어렸을 때 개에게 물린 자리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어릴 때 개에게 물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개를 예뻐하거든요. 그래서 지나가는 개에게 괜히 아는 척 했더니 이 개가 으르렁거리는 거예요. 아마 저를 만나기 전에 주인한테 발로 차였던지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본데 제가 괜히 아는 척 하니까 화가 난 거예요. 아차 싶어 냅다 뒤로 내빼는데 이 개가 쫓아와 다리를 물었습니다. 여러분, 조심하세요. 

개가 으르렁거릴 때 뒤로 도망가면 만만한 줄 알고 쫓아와서 뭅니다. 그럴 때는 도망 안 가고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으면 안뭅니다. 아무튼 저는 다행히 살짝 물려서 상처가 안 남았는데 제가 아는 그 분은 개에게 크게 물려서 어른이 된 지금도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이런 자국을 개에게 물린 ‘자리’라고 합니다. 부끄러운 자리요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리지요.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 젊은 여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젊고 예쁜 그 집사님은 늘 긴팔을 입고 다녔습니다. 심지어 35도가 넘어가는 한 여름에도 긴팔을 입고 다녀서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어느 날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려서 크게 덴 것입니다. 워낙 크게 데어서 여러 차례 수술도 했지만 팔에는 아직도 길게 덴 자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남들처럼 한 여름에 반팔도 그 흔한 나시도 입지 못하고 심지어 수영장이나 공중목욕탕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답니다.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이렇게 상처는 흉하고 남에게 보이기 싫은 부끄러운 자리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부끄러운 흉터를 큰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바로 상이용사로 전쟁 때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은 분입니다. 이제 칠십도 훨씬 넘은 이 분은 언제나 사람들을 만나면 자랑스레 옷을 벗고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를 보여주곤 합니다. “이 상처가 그 때 포탄에 맞은 자리”라고 말입니다. 

그 상처가 부끄럽기는커녕 이렇게 자랑스러운 까닭은 오직 하나, 바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입은 상처기 때문입니다. 내 성질 때문에 싸우다 입은 상처라면 어찌 자랑스럽겠습니까? 오히려 부끄러워 숨기려 하겠지요. 하지만 똑같은 흉한 상처라도 나라 위해 싸우다 생긴 것이니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의미가 중요합니다. 이 ‘의미’에 따라서 그 흉터는, 그 흉한 상처는 부끄러운 것일 수도, 반대로 아주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

사도 바울도 이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상처 자국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 17절에 나오는 “예수의 흔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끝맺는 시점에 이런 말을 하고 있는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율법주의자들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반드시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하며 특별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바울 서신을 읽다보면 당시 교회들마다 이런 율법주의자나 할례파들이 많아서 순수한 복음을 위협하는 일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여러분, 제가 한 번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구원을 받습니까? 무엇을 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믿음이지요. 오직 믿음뿐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행위나 공로로도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믿음으로만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주의자들은 믿음 플러스 알파, 뭔가 다른 것이 더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지키고 특별히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단이지요.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율법주의자, 할례파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이지 무슨 율법이나 할례나 다른 방법이 있겠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오직 믿음’입니다. 그런데 신약에는 갈라디아서 말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책이 또 하나 있는데 뭔지 아십니까? 바로 로마서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바로 오직 믿음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갈라디아서를 ‘작은 로마서’라고도 부릅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이 율법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마지막 6장 결론 부분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 보세요.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렇습니다. 바울이 볼 때 이런 율법주의자나 할례파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13절 뒷부분을 보세요.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뭔가 눈에 보이는 공로를 쌓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눈에도 안 보이고 너무 애매하지 않냐? 그러니까 율법처럼 눈에 보이는 뭔가를 지켜서 공로를 쌓아야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겠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이지요. 특히 할례파는 육체에 무언가 눈에 보이는 자국을 내서, 그 할례라는 자국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 눈에 보이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저 사람 믿음이 어떤지 알 수 없잖아요?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말처럼 겉으로 보이는 모습들을 통해 그의 신앙을 평가하곤 합니다. 기도를 유창하게 잘하면 믿음 좋다고 합니다. 

교회에 잘 출석하고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믿음 좋다고 합니다. 전도를 잘하는 사람도 믿음 좋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 귀하고 좋은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만약 정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문제가 아니지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사람들이 내 기도를 어떻게 들을까? 기도를 듣고 뭐라고 할까만 관심이 있어서 기도를 멋진 말로 잘 꾸미고 유창한 말로만 하려 든다면 그는 겉모습에만 관심이 있는 ‘육체를 자랑하는 자’인 것입니다. 

교회 출석도, 봉사도 내가 예수 믿는 감격에 겨워 기쁨으로 한다면 정말 좋은 것이지만 누가 볼까봐,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평가할까 싶어 열심히 한다면 ‘육체를 자랑하는 자’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전도도 정말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귀한 일이지만 사람들의 평가 때문이라면 문제가 됩니다.

교회마다 간혹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항존직 선거하기 전에는 열심히 봉사도 하고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까지 열심히 참석하고, 아무튼 남들 눈에 띄는 일이라면 앞장서서 하다가 정작 장로 되고 안수집사 권사 된 후에는 딱 끊는 분들 말입니다. 이런 경우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 분이 정말 기뻐서 그렇게 했던 것인지, 아니면 점수 따려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인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절대, 결코 남들 눈에 보이기 위해, 겉으로 나타내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가 봉사하고 전도하고 섬기는 이유는 오직 하나, 예수님이 좋아서입니다.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구원 받은 것이 너무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동기가 아니라 다른 동기에서 한다면 우리는 ‘육체를 자랑하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랑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육체를 자랑하는 자’인 갈라디아 교회의 율법주의자와 할례파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14절 다 같이 읽읍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에 자랑할 것이 딱 하나였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너희는 육체를 자랑하고 율법 잘 지키는 것을 자랑하고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할지 몰라도 나는 세상에 딱 하나,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육체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뭔가 꿀려서, 내세울 게 없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는 육체적으로, 세상적으로 따지자면 누구보다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자랑스런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5~6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조건을, 이 모든 육체적 자랑거리를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 즉 똥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7~8절). 왜? 오직 하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장 고상하고 귀한 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자신이 비록 육체적,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건만 나의 자랑은 오직 하나, 오직 십자가만 내 자랑거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15절에 할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는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십자가 밑에서 새사람 되었느냐 아니냐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이 바로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7절에서 바울이 바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 ‘흔적’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스티그마’입니다. 정말 중요한 말이기 때문에 따라합시다. 이 ‘스티그마’라는 말은 본디 소나 양에게 찍는 낙인(烙印)을 뜻합니다. 서부영화 같은 데서 보셨지요? 불에 벌겋게 달군 쇠로 소나 양의 등에 낙인을 찍습니다. 우리 가문이나 회사 낙인을 그렇게 찍으면 절대 지울 수 없기 때문에 누가 훔쳐가도 금세 찾을 수 있습니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소유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짐승 외에 사람에게 이 스티그마, 낙인을 찍는 경우는 단 한 가지, 죄수나 전쟁포로, 노예 따위에게 불에 달군 낙인을 찍습니다. 죄수는 평생 죄수라는 낙인을 몸에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노예나 포로는 평생 나는 노예입니다, 나는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하는 낙인을 몸에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스티그마, 낙인이 자랑스러울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죠. 정반대로 그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자국입니다. 지우고 싶어서 그토록 애를 써도, 돌로 문지르고 모래로 비벼 피가 나도록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너무나 부끄러운 낙인입니다. 그 스티그마를 평생 몸에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큰 고통이요 저주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하는 것입니까?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나는 이 스티그마를, 이 낙인을 몸에 지닌 사람이다” 아주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설교 첫머리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흔적이, 이 상처 자리가 내 죄 때문에 난 것이라거나 내가 싸우다 난 것이라면 그것은 부끄러운 흔적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 흔적은 다릅니다. 이 흔적은 바로 ‘예수의 흔적’인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난 흔적, 예수를 위해 살다가 남은 상처기 때문에 부끄럽기는커녕 너무나 자랑스럽고 떳떳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의 흔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가, 복음을 전하다가 남은 상처들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렇게 예수를 위해 감옥에 갇히고, 매를 수없이 맞고, 굶주리고 헐벗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도 했으니 그 몸에 상처가 얼마나 많이 남았을까요? 매 맞은 상처, 볼기에 태장을 맞은 상처, 돌에 맞아 터지고 깨진 상처, 감옥에 갇혀 손과 발에 차꼬가 채워졌던 상처 등등 그의 온몸에는 그야말로 상처투성이였을 것입니다. 이 상처가 바로 ‘예수의 흔적’입니다. 예수를 위해 받은 고난의 흔적인 것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상처는 부끄러운 것입니다. 흉터는 숨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상처에도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똑같은 상처와 흉터라도 그것이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생겼느냐에 따라 그것이 부끄러울 수도 있고 자랑스러울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마치 십자가가 일반적으로는 극악무도한 죄인을 사형하는 사형틀이기에 너무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이지만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을 때부터 더 이상 십자가는 부끄러운 도구가 아닌 구원을 이룬 자랑거리가 된 것처럼 사도 바울의 이 온몸에 남은 상처도 의미가 남다르기에, 바로 예수를 위해, 복음을 위해 살다가 남은 흉터이기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 인생 최대의 자랑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주의자나 할례파들에게 “너희도 더 이상 육체를 자랑하지 말고, 육체의 좋은 모양을 자랑하지 말고 나처럼 예수를 위해 기꺼이 좋은 모양도 포기하고, 편안한 삶도, 사람들의 좋은 평가도 포기하고 나처럼 사는 예수의 사람이 되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고백입니까?

오늘날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만 그만큼 예수 편하게 믿으려는 사람들도 너무 많습니다. 절대 힘들게 어렵게 믿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절대 손해 안 보고 믿으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 믿어 무슨 유익을 얻어 보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업하려면, 장사하려면 예수 믿어야 되더라, 대통령이 장로고, 시장이 안수집사고, 사장이 교인이니 나도 믿어야겠더라, 이런 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제대로 예수 믿고 그 분을 위해 치열하게 살려면 우리는 반드시 갈등도 많이 하고, 손해도 보고, 왕따도 당하고, 힘든 일도 생깁니다. 그러다보면 우리에게는 상처가 남습니다. 흉터도 남습니다. 예수 제대로 믿다 손해 본 흔적입니다. 따돌림 당하고 힘들게 산 흔적입니다. 때로는 사도 바울처럼 진짜 몸에 상처가 남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위한 흔적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의 흔적, 예수 위해 살다, 그 복음을 위해 살다가 남은 흔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부끄러운 자리가 아니라 세상 그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흔적이요 자리인 것입니다. 그 흔적들은 우리가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이 “얘야, 그 흉한 상처는 무엇이냐?”고 물으실 때 “예, 이것은 바로 예수의 흔적입니다. 제가 주님의 소유라는 낙인입니다. 제가 예수님처럼 십자가 지고 가다가 난 자국, 주님처럼 손발에 못 자국, 허리에 창 자국 난 자리입니다. 

제가 바로 당신을 위해 치열하게 살다가 남은 상처, 당신을 위해 받은 박해와 상처, 아픔과 손해입니다.” 하고 자랑스럽게 보여드릴 수 있는 영광의 상처인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주님은 우리를 꼭 안아 주시면서 “얘야, 너야말로 나의 가장 충성스러운 종이요 사랑하는 자녀다.”라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몸에는, 그리고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는 어떤 예수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까?

옛날 미국 서부개척시대에는 양 도둑이 많아 사회의 큰 문제꺼리였습니다. 이를 근절하고자 정부는 붙잡힌 양 도둑 이마에 ‘양 도둑’(Sheep Thief)이란 뜻으로 S와 T 두 글자를 낙인찍기로 했습니다. 시뻘겋게 불에 달군 낙인을 이마에 찍는 고통도 크지만 ‘양 도둑'이라는 ST 두 글자를 평생 이마에 달고 살아야 하는 고통은 더욱 컸던 것입니다. 

어느 날 두 명의 양 도둑이 붙잡혀서 법에 따라 이마에 ST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런데 두 명 중 한 사람은 인생을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차가운 멸시의 눈으로 쳐다보니 “이왕 버린 몸”이라 생각하고 죄만 계속 짓다가 폐인이 되었고 얼마 안지나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이마에 찍힌 불명예를 지울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지은 잘못을 용서받겠다는 심정으로 자기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하였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우며 성실히 살았습니다. 세월이 지나자 마을 사람들은 점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될 즈음에는 이마에 낙인을 찍는 법도 폐지되어 사람들은 ST의 의미를 잊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너무나 친절한 이 할아버지의 이마에 찍힌 ST라는 글자가 무엇인지 몰라 궁금했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ST의 의미를 연구했습니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S자는 '성자'(Saint)의 약자인 ST이다. 할아버지께는 워낙 훌륭하셔서 정부에서 그의 이마에 성인(ST)이라는 글자를 이마에 새기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에 평생 마귀가 새겨준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고 살다가 갑니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평생 지울 수 없는 무서운 낙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어 그 지울 수 없는 죄인의 낙인 대신 하나님의 자녀요 영원한 주님의 소유라는 낙인을 찍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낙인은 있으되 너무 편하고 고상하게 손해 안 보고 예수 믿느라 몸은 너무나 깨끗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주를 위해 살다가 온 몸에 예수의 흔적이 남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높이 평가하시고 어떤 사람을 자랑스럽게 여기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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