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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영혼이 은총 입어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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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은총 입어 (눅 19:1~10)


서론

박완서 씨가 쓴『자전거 도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래 전‘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출판한 적이 있는 이야기를 어느 출판사가 어린 독자들을 겨냥해 새로 편집한 책인데 한번 읽게 되면 손에서 놓지 않게 했던 책입니다. 작가는 그 책에서 시종 인간 삶에는 ‘몸이 잘 사는 삶’이 있고 ‘마음이 잘 사는 삶’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수남이라는 시골에서 올라와 전기 도매상에서 일은 하는 한 소년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서 많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선택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에서 작가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몸이 잘 사는 삶을 추구하고,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자세가 결국에는 인간 삶을 황폐화시키고 있음을 잔잔한 필치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몸이 잘 사는삶’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잘 사는 삶’, ‘영혼이 잘 사는 삶’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비록 몸은 비록 고달파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영혼(마음)이 잘 사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몸이 잘 사는 삶’보다는 ‘영혼이 잘 사는 삶’을 욕심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세상 욕심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자신을 집요하게 끊임없이 따라오며 괴롭히게 됩니다. 영혼보다는 일신의 안락을 추구할 때, 많은 경우 사람의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차게 되거나 강퍅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여러 가지 장애가 생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장애를 이기고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예수님은 오래 전부터 그를 알고 계셨고 그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 순간 준비되었던 하나님의 축복이 이 사람과 가정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접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는 철저하게 ‘몸이 잘 사는 삶’을 추구해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세리장이었고 키가 아주 작았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의 개인적인 배경에 대해 자세한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최악의 조건에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방향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돈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권좌에 오르면 자신의 모든 약점은 커버될 것이며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 그 것 한 가지만 열심히 추구하면서 달려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추구했던 모든 꿈을 성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행복하지 않았고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몸이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영혼도 잘 사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그에게 은혜의 빛줄기가 비춰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영원을 추구하는 마음을 주셨고, 영원에 대한 갈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런 갈급함 가운데 그를 세우시고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 어느 날 그에게 갑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의 빛줄기가 비추어 오게 되었습니다. 온 마음으로 사모하고 기다렸던 나사렛 예수님이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을 방문하신다는 소문이 들려 왔던 것입니다. 그 소문을 듣고 난 후 그는 정말 온 가슴으로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이 삭개오의 스토리를 유일하게 전하고 있는 누가는 누가복음의 중심 주제와 관련하여 이것을 독특한 구조 속에 위치시키면서 말씀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오신 예수님은 이제 유대 사회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처럼, 잃어버린 드라크마처럼 잃어버린 상태로 서 있던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18장에 나타나는 부자 관원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관원은 유대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관원이었고,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던 인물이었지만 그는 영혼이 잘 사는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고, 자신의 명성을 자랑하는 철저히 몸이 잘 사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신앙까지도 자신의 자랑거리로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물질에 사로잡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19장이 시작하면서 그와 비슷한 삶을 살던 또 한 사람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앞선 관원과는 달리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서고 있고 뽕나무 위에도 올라갈 만큼 사모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음을 보게 됩니다.

여리고는 요단 동편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첫 번째로 지나가야 하는 관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세관이 있었고 세리들이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삭개오는 바로 그 세관의 세리장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직업이 세리이기 때문에 돈이 많겠다고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세리들은 돈은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을 사람으로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세리는 돈이 많은 깡패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사람들을 마음속에는 늘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허전함과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타인에 대한 열등감과 소외로부터 느끼게 되는 외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 사회의 세리는 정해진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종의 납입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정해진 돈만 입금시키고 남은 돈은 전부 자기 몫이었습니다. 세리들은 자기 민족이라고 봐주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세금의 서너 배의 돈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다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들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긴 자로 정죄했고 창녀들과 똑같이 취급했습니다. 즉 창녀들이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범했다면, 세리들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세리 집단 전체를 범죄자로 취급하여 절대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라는 이 세리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주안점

신앙이라는 것은 무슨 거창한 체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의 신앙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관심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에 대해 들은 소문은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는데, 특히 자신과 같은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과정은 마치 거대한 파노라마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방황하며 무서운 탐욕의 죄에 빠져 있을 때에도 우리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계시며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우리에게 접근하셔서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은혜 앞에 서 있는 사람, 삭개오는 어떻게 서게 되었을까요? 오늘 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나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세울 수 있을지를 배우게 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은 그가 주님을 간절히 열망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는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간절히 열망하였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했고, 민중들은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들었지만 그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병든 몸 때문에, 자녀 문제 때문에 주님을 찾는 사람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진정으로 주님을 원하였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주님만을 원합니다.”

아빠와 함께 길을 가던 한 어린아이가 장난감 가게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너무 예쁘고 아름다운 장난감에 눈길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빠가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를 데리고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이는 장난감을 둘러보면서 너무 좋아했습니다. 얼마 전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해서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을 안고 살고 있던 아빠지만 너무 행복해하는 딸아이에게 장난감 하나를 사 주고 싶어서 아이에게 맘에 드는 것 하나를 고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는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빠, 고마워요. 그런데요. 저는 이것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나는 장난감이 없어도요, 아빠만 있으면 행복해요.” 
그 이야기를 들은 아빠의 눈에서 눈물이 팽그르르 돌았습니다.

삭개오는 그 동안 병적일 만큼 돈을 벌려고 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여 그는 드디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이룬 다음, 그것은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깊은 영적 공허감 가운데서 한 가지 마음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지…. 이렇게 그의 마음가운데에 만족함이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이 사람의 마음속에 진실한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진실한 마음은 하나님은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갈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돈으로도 공부로도 만족이 되지 않으며 세상의 사랑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허전함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목마름입니다. 
그분을 기다리는 시간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으로 족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목마름이라는 것은 바로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마음속에 만족할 수 없는 허전함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영혼이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자였지만 만족함이 없었고 자존감도 낮았습니다. 즉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 하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오직 돈으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그의 복수하는 방법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세리들을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선지자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주님 오시는 길목으로 나갔고, 주님을 보고자 하여 뽕나무 위에 올랐습니다. 삭개오는 저쪽에서 사람들에 둘러싸여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키가 작은 자신은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볼 수도 없겠다는 생각에 뽕나무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주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뵐 수 있다면….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그는 지금 누구의 시선도, 체면도 던져 버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보기를 원하여 뽕나무 위에 올랐습니다. 은혜 앞에 서 있던 그 사람은 주님을 열망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삭개오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았을 때 무엇을 하려고 했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소경처럼 예수님을 향해 소리 질렀을 것입니다. ‘예수님, 예수님 제발 저를 만나 주세요.’ 만일 삭개오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면 모든 사람들이 삭개오를 욕하면서 너는 예수님을 부를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욕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열정이 있습니까? 예배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주님을 만나고픈 강한 열망으로 나아오시는지요? 만나면 그만, 못 만나도 아쉬울 것 없는 인생으로 오늘도 예배당 문을 나서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삭개오 설교를 하시던 중에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신분이 세리였고 키가 작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몹시 보고 싶었습니다.” 설교를 듣던 성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지요. 목사님은 설교가 은혜가 있어 그런 줄 알고 더 큰 소리로 설교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니고데모가 사는 동네에 오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보고싶어 나아갔으나 키가 작아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설교가 이쯤되자 성도들이 ‘와’하고 웃어버렸습니다. 그때서야 목사님은 자신이 실수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황되고 얼굴도 화끈거렸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님은 순간 재치를 발휘했습니다. “그때 삭개오가 나타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야, 그 자리는 내 자리야, 빨리 내려와”

오늘 삭개오를 통해 보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은혜를 받는 데에는 여러 가지 장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역시 가장 큰 장애는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삭개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자신의 자격지심 때문에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더라면 삭개오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오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먼저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님을 영접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의 중심 속에 있던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시고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누구도 삭개오 이야기를 예수님께 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오래전부터 삭개오를 알고 계셨으며 그의 모든 형편을 다 아신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어서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삭개오는 더 깊은 감격으로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것은 삶의 중심 속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도 계속되는 일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이라고 요한계시록 3:20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삭개오의 삶에 침입해 들어오신 것처럼 우리의 삶의 자리에도 침입해 들어오십니다.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겠다.” 어쩌면 그의 삶의 가장 중심 속에 모셔드리는 이 행동을 통해 그는 그의 생의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삭개오의 이런 행동은 결코 말처럼 쉬운 행동은 아님을 우리는 또한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삭개오의 집은 지금껏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도둑의 소굴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모든 죄가 들통날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님을 기쁨으로 모신 것은 예수님을 모심으로 드러날 것은 드러나고 깨질 것은 깨지고, 이제는 부정한 지난날의 과거를 다 청산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죄악의 온상인 자기 집에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기꺼이 예수님의 심판을 받고 이제라도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주인, 모든 것의 주인,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의 주인, 인생의 참 주인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어린 양”이라는 제목의 시가 이것을 잘 노래해 주고 있습니다.
어린 양아, 누가 너를 만들었니?
누가 너를 만들었는지 너는 아느냐?
너에게 생명을 주고, 시냇가와 풀밭에
너의 먹이를 마련해 준 이
너에게 기쁨의 옷, 가장 부드럽고
북슬북슬하며 빛나는 옷을 준 이
너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주어
온 골짜기가 즐거워하도록 한 이
어린 양아, 누가 너를 만들었니?
누가 너를 만들었는지 너는 아느냐?

어린 양아, 내가 네게 말해 줄게.
어린 양아, 내가 네게 말해 줄게.
그분은 너의 이름으로 불리신단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을 어린 양이라고 부르시지.
그분은 양순하고 또 그분은 부드러우시단다.
그분이 어린아이가 되신 거란다.
나는 한 아이, 그리고 너는 한 마리 어린 양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단다.

지금 삭개오는 주님 품 안에 안겨 그는 단지 한 마리의 가냘픈 어린 양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주인이심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는 주님을 단순히 그의 집에 모신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 모셔드리고 있습니다.

셋째로 오늘 말씀은 삭개오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의 삶을 바꾸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리고 그분을 모셔드린 후 자신의 삶의 자세를 온전히 바꾸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신앙 생활은 단순한 지적 동의나, 감정적인 충동을 느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 결단과 삶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회개는 단지 감정적으로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의지적으로 결단하여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정욕적으로 살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런 결단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결단입니다.

삭개오는 잘못된 자신의 삶을 되돌이킬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자세를 바꾸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을 비우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의 비밀을 깨달아 안 사람으로 결단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비워 내면서 그것을 나눔으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집에 모심으로 재산의 반 이상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예수님 때문에 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철저하게 회개했기 때문에 영혼을 치료받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이란 날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켐퍼스가 고백한 대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믿음의 삶은 단순한 이상이나 관념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반드시 삶의 변화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후 삶을 바꾸지 않았다면 그는 온전히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 것이며, 온전히 주님을 만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온전히 영접한 사람이라면 마치 어둠이 빛에 밀려나듯이 죄악 된 삶은 그렇게 밀려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을 나의 삶 가운데 모시면 예수님이 나의 삶 가운데서 썩은 부분을 마구 도려내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것도 손대지 않으시고 삭개오 자신이 버릴 것은 버리고 자를 것은 자르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삭개오가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포기한 것을 보면 그 많은 재산들이 결코 그를 기쁘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재산들은 삭개오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 누르던 짐이었습니다. 이제 삭개오는 그 무거운 욕심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양심을 얻었습니다. 

회개는 세상 욕심으로 살던 삶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여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냥 예수님을 만나서 식사 한 끼 잘 대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는 자기 죄를 회개했을 때 영혼을 내리 누르던 답답함이 사라지고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제가 어느 전쟁터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는데 전쟁 공포증에 몸을 떨고 있는 병사를 발견했습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알렉산더라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대제와 같은 이름을 쓰고 있었습니다. “자네 이름을 바꾸든지, 삶을 바꾸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알렉산더라는 이름은 너 같은 겁쟁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죄를 씻음 받았다면 그는 죄악으로 얼룩진 삶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죄악된 습관을 바꾸고, 삶의 행동을 바꾸고, 자신의 삶 속에서 날마다 성화를 이루어 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한국 기독교의 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의 삶을 주님의 말씀 앞에 비추어보면서, 그리고 이 예배의 자리에서 심각하게 묻게 됩니다. 삶이 바뀌지 않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그것이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지 않는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결론

데이빗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 복음의 길을 열었던 선교사였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그는“아직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수천의 마을들”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발로 걸어서 복음의 길을 열어 간 개척 선교사였습니다. 선교사로서 그가 주로 한 일은 아프리카의 길을 연 것이었습니다. 그가 만든 지도를 따라 많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영국에 있는 몇몇 친구들이 리빙스턴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에게 보냈습니다.

“리빙스턴, 낯선 땅에서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자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네. 먼 나라에서 고생하고 있는 자네를 생각하면 여기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네. 그래서 자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우리가 자네를 도와 줄 사람을 몇 명 그 곳으로 보내려 하네. 그러니 그 곳까지 가는 길이 어떤지 알려 주시고, 어떻게 그 곳에 이를 수 있는지 상세히 적어 다음 편지에 보내 주면 좋겠네.”

하지만 편지를 받은 리빙스턴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 정중하게 그 제의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마음은 고마우나 이곳까지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이 곳에서 진정 필요한 사람은 길이 없어도 스스로 찾아오겠다는 사람이거든.”
1873년 5월 1일, 리빙스턴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날까지 그는 변함없이 개척자로 살아가면서 아프리카에 위대한 복음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삭개오의 삶 속에 찾아오셔서 길을 내고 계십니다. 돈 많은 것 하나 믿고 거들먹거리며 살아왔지만 그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이 삭개오의 패배감과 좌절감, 그리고 회의와 절망의 한가운데에 찾아오셔서 자신의 이름을 직접 불러주시고 그리고 자신의 집에 유하기까지 하신 주님의 그 마음이 삭개오의 마르고 건조한 삶 가운데에 새로운 길을 내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한가지 더 여러분과 생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 십자가 죽음을 향해 예루살렘으로 달려가시면서도 모든 이의 관심밖에 있었던 삭개오를 주목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간호사가 쓴 “어머니의 손가락”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몇년 전 간호사로 일할 때였다 아침에 내가 출근해보니 아직 진료가 시작되기 전이른 시간이었지만 모녀로 보이는 스물다섯 쯤 되어 보이는 젊은 아가씨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가 두 손을 꼭 마주잡고 병원 문 앞에 서 있었다. 업무시작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두 모녀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작은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고 엄마는 연신 딸의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다소 긴장된 그러나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위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원장 선생님이 오시고 두 모녀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진료실로 들어온 아주머니는 원장님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가 제 딸아이예요. 옛날에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외가에 놀러갔다가 농기구에다쳐서 왼손 손가락이 모두 잘렸어요. 다행이 네 손가락은 접합 수술에 성공했지만 네 번째 손가락만은 그러질 못했어요. 다음 달에 우리 딸이 시집을 가게 됐어요. 사 위 될 녀석이 괜찮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디 그런가요. 이 못난 어미 때문에 어린마음에 상처 많이 줬지만 그래도 결혼반지 끼울 손가락 주고 싶은 게 이 못난 어미바람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늙고 못 생 긴 손이지만 제 손가락으로 접합수술이 가능할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 했다. 원장 선생님도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두 모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참 후 원장 선생님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요 가능합니다. 예쁘게 수술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녀도 울었고 나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여리고를 지나시던 주님의 심정이 이러하시지 않았을까요? 주님께서 보시기에 어느 한 영혼이 애틋하고 안타깝지 않겠습니까만, 그래도 일생동안 그 어느 누구에게도 따뜻한 시선 한번 받지 못했을 이 세리장 삭개오에게는 주님이 자신의 이름을 미리 알고 불러주신 그 음성이야 말로 하늘의 음성,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삭개오를 아셨기에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길에 삭개오를 주목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됩니다. 땅에 오신 하늘의 왕자를 만나는 큰 은혜를 맛본 삭개오, 그가 주님 앞에서 변화된 삶을 시작 하는 날, 예수님은 선언해 주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한 해동안 열심히 달려오면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지만 이 모든 사건을 뛰어넘어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한다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 때문에 한 영혼, 한 영혼이 주님의 품안으로 돌아오는 일들을 보는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은 우리 삶의 현장에도 오늘도 변함없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자리가 아무리 힘이 들어도 주님 계신 성전을 찾게 하시고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서 선포된 말씀 앞에 오늘도 가슴아파하며 회개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절기로는 대림절이 교회의 절기의 첫 시작이라면 다음 주가 대림절 첫주간이므로 이번 주간이 교회력의 2009년 마지막 주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주간부터는 또 우리에게 오실 아기 예수님을 설레임으로 기다리는 대림절이 다시 시작되며 교회력이 새롭게 시작되지요. 

주님이 오시면서 이미 여러분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삭개오야..삭개오야...하고 뽕나무에 올라가 주님을 기다리는 삭개오를 부르신 것처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자리에 서 있는 우리를 향해 지금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삭개오야...삭개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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