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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흙으로 돌아가라 (창 3: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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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돌아가라 (창 3:16~24)


창세기 3:16-24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오늘 읽은 말씀들은 원죄로 말미암은 결과들이지만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고단한 삶의 현실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6절에는 먼저 여자들이 겪는 고통들을 언급합니다. 아이를 낳을 때의 고통입니다. 지금은 의술이 발달해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옛날에는 아이를 낳는 것은 여자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러 방에 들어가면서 댓돌 위에 놓인 자기 신발을 보고는 이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하며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여자는 또한 남편을 사모하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예부터 가정을 지켰던 것은 여자였습니다. 남자는 밖으로만 돌았고 그런 무정한 남편을 보면서 여자는 평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또 다른 고통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로 말미암은 고통이었습니다. 요즘에 들어서야 여성의 권리가 인정되기 시작했지 그전까지 여자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남성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가정 폭력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민주주의 역사에서도 여성의 투표권이 인정된 것은 미국은 1920년이었고 프랑스가 1945년이었습니다. 노예제도는 일찍 없어졌지만 여성에 대한 억압은 최근에서야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금도 중동권에서 당하고 있는 여성 억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여성을 유혹의 근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평생을 검은 차도르로 온 몸을 가리고 지내야 합니다.

성경은 이런 일들이 정상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는 없었던 일로 죄의 결과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가부장제와 같은 것을 마치 진리인 냥 여전히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극복되어야할 타락의 현상일 뿐입니다. 

남자에게도 고통이 주어졌습니다. 먹고사는 것에 대한 고통입니다. 노동은 행복하고 보람 있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노동이 생계의 수단이 되었고 그것도 죽도록 땀을 흘리고 일을 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비참한 것이 되었습니다. 17절에서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9절에서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라며 남성들의 삶의 고단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남자들의 얼굴에는 항상 과로로 인한 피곤함이 찌들려 있습니다.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그 마음은 위축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비겁해지는 이유도 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입니다. 윗사람에게 아부를 하거나 아래 부하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때로는 그들을 가혹하게 밟아 주어야 자기 자리를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통들은 그래도 참을 만합니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죽음의 고통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19절 말씀은 인간을 절망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이 죽는 것도 두렵지만 자기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이별의 고통은 정말 견디기 어렵습니다. 죽은 사람이야 그것으로 끝이지만 산 사람들은 그 상실감을 견디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번에 신종 플루로 죽은 탤런트 이광기 씨의 7살짜리 아들의 소식은 온 국민을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늙어서 자연스럽게 죽는 죽음은 그런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 상실감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걸리고 아마 평생 가슴에 한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 어떤 위대한 영웅이나 성자도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진시황이 찾아다녔다는 불로장생의 영약은 절대 없습니다. 성경은 24절에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배치해서 막으셨을 뿐만 아니라 화염검, 곧 불 칼을 두어 절대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희망의 메시지는 죽음이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본래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는 없던 것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 주어진 낯선 손님입니다. 사실 2장 17절의 하나님 말씀대로 한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이미 죽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금지조항을 어기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바로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뒤로 미루어졌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를 영적인 생명과 육적인 생명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 순간 인간의 영적 생명은 죽었고, 그 결과 육적인 생명은 서서히 죽어간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마치 꺾여진 꽃에 비교합니다. 뿌리에서 꺾인 꽃이 서서히 죽어가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달리 해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은 바로 죽었어야 했지만 인간의 죽음은 유예되었습니다. 3년 동안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게 1년의 생명이 더 연장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너희가 결코 죽지 않으리라”(창3:4)는 뱀의 유혹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서서히 죽어갑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인간에 대해 바로 죽음을 선포하실 수 있지만 그 생명을 연장시키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이미 사형판결을 받고 그 집행만 유예된 존재와 같습니다. 연장 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녀를 허락하시므로 자녀를 통한 영원성을 허락 하셨습니다. 20절에서 하와를 일컬어 ‘모든 산 자의 어미’라 칭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 개체의 영원성은 사라졌지만 자손을 통해서 인간의 영원성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는 것은 희망을 낳는 것이고 자신의 영원성을 이어가는 매우 위대한 행위라 할 것입니다.

죽음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죽음은 미리 예고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 죽음에 대해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특히 말기 암으로 죽음의 시간표가 분명히 예정되어 있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본인도 그렇고 남아 있는 가족들도 아름다운 죽음을 맞고 보낼 수 있도록 우리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미리 정립해 놓아야 할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죽음은 무엇보다 인간의 한계를 알게 합니다. 19절에서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서 “너는 흙이니”하고 분명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강건하면 90이고, 대부분 80대에 죽음을 맞습니다. 죽음은 미래에 있는 사건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사실 죽음을 경험해 본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죽음의 공포가 있기 때문에 현명해집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인간은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탐욕의 화신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스포츠가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선수들은 최선을 다합니다. 규칙도 없고 시간 제한이 없다면 선수들은 피곤하면 쉬어버리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 그 스포츠는 재미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정신 못 차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는 최대의 위협은 바로 죽음의 공포입니다. 어떤 부자가 그 해 소출이 많아서 창고를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평안히 먹고 쉬고 마시자 합니다. 자기 육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다인 줄 아는 어리석은 부자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우리는 흙과 같은 존재이고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의 탐욕을 제어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보다 영원하고 값진 것을 사모하고 투자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죽음이 가까이 있고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심으로 우리를 깨우실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대개 한 번 이상 죽을 뻔한 위기들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이 때 제대로 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곧 잊어버리고 또 어리석게 사는 것이 인간인 것 같습니다. 저에게도 죽을 뻔한 위기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지방에 장례식이 있어 교회 성도님들을 실고 새벽에 호남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커브 길을 돌았는데 1차선 상에 차가 한 대 그냥 떡 하니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앞에 사고가 나서 이 차가 그대로 거기 서 있었던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노면이 살짝 얼어 있는 상태라서 그냥 미끌어지면서 앞차를 향하여 차가 돌진해 갔습니다. 

그 순간 단지 ‘어, 어.’ 하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은 ‘아 하나님, 지금은 아닙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과속을 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새게 부딪치지는 않았습니다. ‘아 살았구나’ 하는데 이번엔 난데없이 뒤에서 또 다른 차가 ‘퍽’하고 덮쳤습니다. 뒤에 차가 소형이었기에 망정이지 대형차였다면 영락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 하나님 지금은 아닙니다.”는 생각이 왜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때가 바로 지금인지 아닌지는 인간이 결정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 하나님이 부르시면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 그것도 예기치 않고 그 때가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일에 자기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물질이나 지위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목에 힘을 주지 않습니다. 또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여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90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0-12)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야 어리석게 욕심 부리지 않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은 자기 신하를 시켜서 매일 아침 깨우면서 “폐하여 당신은 언젠가는 죽습니다.”는 말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정해진 시간이 있습니다. 이 시간이 끝나면 달리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명한 사람들은 이 주어진 시간 안에 최선을 다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하셨던 말씀 중에는 “다 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자기 인생을 산 사람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말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렇게 번역하고 싶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들을 다 이루셨고 그 최종적으로 십자가 상에서의 구원 사역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지막도 이랬으면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감없이 보낸 하루는 즐거운 잠을 가져온다. 잘 보낸 일생은 편안한 죽음을 가져온다.” 하루를 열심히 산 사람은 밤에 단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지 못하면 미련이 남고 미련이 남으면 죽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지쳐서 죽기를 바랍니다. 내 지혜 내 달란트 내 육신을 다 쓰고 하나님께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에게 칼을 한 자루씩을 주셨습니다. 이 칼을 다 사용해서 닳은 채 하나님 앞에 서야 하지, 사용도 못하고 녹 슬은 채 서서야 되겠습니까? 은퇴했다고 해서 그냥 편하게만 지내지 말고 무언가 보람 있는 일들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죽을 때 편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더 축하받아야 할 때는 장례식 때입니다. 탈무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 배가 있는데 한 배는 이제 갓 바다를 향하여 출항하는 배이고, 다른 한 배는 출항에서 돌아오는 배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출항하는 배만 환송하지 돌아오는 배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갓 출항하는 배는 어떤 고난을 당할지 알 수 없고 이 배가 화물선이 될지 유람선이 될지 해적선이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온갖 파도를 해치고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고 돌아오는 배는 그 수고를 인하여 더 환영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교훈을 줍니다. 이제 갓 출항하는 배는 인간의 탄생을 말하고 돌아오는 배는 인생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장례식이 한 인간이 자신의 일을 다 마치고 쉬는 것에 대한 경축의 자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흙으로 돌아가라

우리 일을 다 했으면 이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였습니다. 때가 되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담의 육체를 흙에서 취하여 만들었습니다. 흙에서 취하였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란 책이 있습니다. 미치 앨봄이라는 사람이 자기 스승인 모리 슈워츠 씨가 운동신경세포가 죽어가며 근육이 무기력해지는 루게릭이란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서로 나누었던 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매주 화요일에 만나서 이런 대화가 이어졌는데 모리는 죽음을 담담히 맞이 합니다. 그는 죽음에 자연스런 과정이라 하며 이를 작은 파도에 비유했습니다. 작은 파도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넓은 바다를 지나옵니다. 

그러다 해안가에 다다르게 되었는데 앞서간 파도들이 해변에 닿아 부서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끔찍한 모습에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데 뒤에 따라오는 다른 파도가 왜 그러느냐고 묻습니다. 이 때 작은 파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넌 모를 거야! 우린 모두 부서진다구! 우리 파도는 부서져 다 없어져 버린단 말이야! 정말 끔찍하지 않니?” 그러자 다른 파도가 말합니다. “아냐, 너는 잘 모르는구나. 우리는 그냥 파도가 아냐. 우리는 바다의 일부라구.” 육신은 흙에게서 왔기에 흙으로 돌려보내고,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왔기에 우리는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하겠지만 주님께서 부르실 때는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즘 문제가 되는 것은 건강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하루라도 더 살게 하려고 목숨을 연장시키는 지나친 연명 치료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죽는 사람은 거의 없고 다 병원에서 죽습니다. 말기 암 환자들은 산소호흡기나 진통제에 의지하거나 그 마지막을 가족들이 지키지 못하고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자기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의사에 손에 맡기는 것이 우리 현실이 되었습니다. 

지난번에는 존엄사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존엄하기에 의학적인 노력은 다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의학적인 노력이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시점이 되어서도 우리 생명을 억지로 연장시키는 것이 옳은 것이지는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 찬반 양론이 있지만 저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데도 그것을 인간의 힘으로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어 부르시면 거기에 순종해야 합니다. 더욱이 죽음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임을 믿는 신앙인의 경우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죽음을 존엄하게 맞았던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자연 속에 묻혀 조화로운 삶을 살았던 스코트 니어링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미리 써둔 유서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이렇게 보내도록 지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마지막 죽을 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나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실제 이 분은 마지막을 단식으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 나이 100세였으니까 후회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둘째,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를 위해 기도하셨던 한 권사님의 마지막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 분은 폐암 선고를 받았지만 마지막을 집에서 맞으셨습니다. 이분이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문안을 갔었는데 이분의 말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하며 감사하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고백이었습니다. 

“셋째,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 따라서 주사, 심장 충격, 강제 급식, 산소 주입 또는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리를 함께 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의 순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죽음을 연습하지 않으면 우리 그 마지막 순간은 매우 힘이 들 것입니다.

죽음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자연적으로 늙어서 죽는 경우는 괜찮겠지만 사고나 병으로 하나님이 갑자기 우리를 데려가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죽는 것은 어떻게 견딜 수 있지만 남은 자식이나 가족의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최소한 우리 아이들 결혼 시키고 나서 데려가십시오.”하고 기도하곤 합니다. 물론 장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우리가 해야 될 일들을 다 마치기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또 악착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런 소망과는 달리 하나님이 우리 생각보다 먼저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에는 일을 하다가도 놓고 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여기에는 또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나를 왜 이렇게 빨리 데려가시는지 그 이유나 의미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이유가 있고 그 의미를 알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믿음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미하일이라는 천사가 하나님의 벌을 받고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그 이유는 쌍둥이를 갓 낳은 한 가난한 여인의 목숨을 취해 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천사 미하일은 아빠도 이미 죽고 없고 의지할 친척도 없는 어린 핏덩이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산모는 죽게 되었고 미하일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벌로 이 땅으로 추방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 미하일에게 그곳에서 다음 세 가지 것을 알아오기 전까지는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질문 세 가지는, 첫째 ‘사람의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셋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습니다.

날개 잃은 천사 미하일은 추운 겨울에 벌거숭이 상태로 교회 옆 건물에 떨어졌습니다. 그 때 그곳을 지나던 가난한 구두장이 부부가 이 천사를 도와줍니다. 구두장이 부부는 생활고에 시달려 늘 죽음의 그림자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벌거벗고 추위에 떨고 있는 불쌍한 청년을 보자 그 안에서 측은지심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천사 미하일은 ‘사람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답을 얻습니다. 사람 안에는 다름 아닌 ‘사랑’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한 해 내내 아무리 신어도 닳지도 찢어지지도 않는 장화를 만들어 달라는 어떤 사나이의 주문을 받으면서 알게 됩니다. 그때 천사 마하일은 이 사나이 뒤를 따르고 있는 자기 동료, 죽음의 천사를 보았습니다. 이 사나이는 곧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미하일은 장화 대신 죽은 사람에게나 필요한 슬리퍼를 만들어줍니다. 미하일은 이를 통해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그 두 대답을 알고 난 한참 후 여섯 살쯤 되는 쌍둥이 아이들이 미하일의 가게를 방문합니다. 이 아이들을 보고 미하일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목숨을 살려주려고 했던 그 여인이 낳았던 쌍둥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밝고 건강했습니다. 그 친모가 죽자 아이들을 불쌍히 여긴 그 이웃집 아주머니가 이 쌍둥이를 자기 자식처럼 길렀던 것입니다. 

여기서 미하일은 세 번째 답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이웃의 사랑에 의해서 이렇게 건강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천사 미하일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깨달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살피는 마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제가 이 예화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리 생명이 끊어지면 마치 우리 자녀들은 비참한 운명에 떨어지고 또 우주도 끝장이 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는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거기까지가 우리 몫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인생이 흙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은 마치 어머니 뱃속에 있던 아이가 새로운 세상에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열 달 동안 있었던 곳이 편안하다고 하여 밖으로 나오는 것을 죽음처럼 생각하고 아기는 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기에게 또 다른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음을 믿고 환영합니다. 죽음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부활의 소망과 이 믿음으로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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