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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 그 자리에서! (눅 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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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자리에서! (눅 3:10~14) 
 
 
❚한국 교회의 위기?

오늘날 한국교회가 큰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악의에 찬, 한국교회를 무조건 비방하고 깎아내리려는 못된 무리들도 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안티기독교 사이트가 늘어나고 종교편향이니 뭐니 하면서 기독교를 매도하고 매스컴들이 다른 종교에 비해 기독교를 더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억울합니다. 

하지만 우리 한국교회가 두 귀를 막고 무조건 다 비방이라고, 무조건 다 사탄의 소리라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겸허하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내 눈의 들보를 못 보고 세상 사람들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지적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말입니다. 

오늘날 왜 이렇게 한국교회가 위기니 뭐니 하는 얘기가 자꾸 나오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흔히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다, 목회자와 교회지도자들이 타락했다, 기복신앙에 빠져있다 등등을 원인으로 지적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에 가장 경계할만한 지적은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라는 단체가 작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를 신뢰한다는 사람들은 18.4%에 불과한 반면, 불신한다는 비중은 48.3%로 나왔습니다. 

가장 신뢰하는 종교기관은 가톨릭, 불교, 꼴찌가 기독교라는 상당히 충격적인 조사결과입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독교인들, 예수장이를 못 믿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이런 말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저도 많이 듣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고 깨끗하다고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과거 한국교회는 적어도 이런 소리 듣지 않았습니다. 전체인구 가운데 기독교인이 불과 몇 퍼센트도 안 될 때도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은 받았습니다. “그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른 것 같다”고요. 그래서 자기는 안 다녀도 자녀들 교회 가는 것 막지는 않았습니다. 최소한 교회 가면 나쁜 일은 안 가르친다고, 그래도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도록 가르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선배 목사님에게 들은 말입니다. 자기가 어렸을 때 그 마을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몇 명 안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집도 교회 안 다니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한 결 같이 하는 말이 있었답니다. 저 가겟집 박 씨는 정말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다른 집은 몰라도 적어도 박 씨 가게에 가서 무엇을 사면 속을 일은 절대 없다고 말입니다. 그 박 씨가 교회 다니는 집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부모들도 교회는 안 다니지만 자기가 교회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답니다. “교회 가면 적어도 박 씨처럼 착하게 정직하게 살 것”이라고 말입니다. 박 씨는 배움도 없었습니다. 

직업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한 사람, 단 한 사람 박 씨가 온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장이는 뭔가 다르다는 인정을 받음으로 모든 마을 사람들이 교회 가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이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동네에 그렇게도 예수 믿는 사람 많은데, 전 국민의 30%가 기독교인이라는데 이런 말 듣는 사람 정말 찾아보기 어렵네요.”

한국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다름 아닌 세상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까닭을 생각해 보면 의외로 아주 단순합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은 많은데 ‘좋은 그리스도인 사장, 회사원,’ ‘좋은 크리스천 공무원, 의사,’ ‘좋은 예수장이 가게 주인과 주부’는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창한 데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잘하면 됩니다. 최근에 ‘자리’에 대한 설교를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시리즈 첫 번째 설교에서 “내 자리는 어디인가?” 하고 여러분에게 물었습니다. 교회 안에 내 자리가, 내가 지키고 채워야 할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의 내 자리도 중요하지만 세상에서의 내 자리도 정말 중요합니다. 그 자리는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그 일입니다. 지금 나의 직업, 나의 직책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좋은 집사, 좋은 구역장이 되는 것만큼이나 세상에서 좋은 동장이 되는 게 똑같이 중요하다”라고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만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고 세상에서 좋은 사장, 좋은 회사원, 공무원, 군인, 의사, 주부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될 때 바로 한국교회는 변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신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를 떠나거나 멀리한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최근 한국에서 가톨릭이 가장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는 첫 번째 이유가 이것입니다. 천주교는 믿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뭔가 다른 것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어떻습니까?

❚지금 그 자리에서!

독일의 신학자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 있습니다. 독일어로 “Sitz im Leben”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Seat in Life,”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삶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디 이 말은 성서학자들이 성경을 해석할 때 쓰던 말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무조건 해석하지 말고 그 성경이 쓰인 시대와 배경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레위기에서 왜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나? 자칫 여호와의 증인처럼 이 말씀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해 지금도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잘못 해석할 수 있지만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잘 이해하면 결론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당시에는 돼지가 종교적으로 부정한 짐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이유로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시대에는 이 규정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시대적 상황이 바로 ‘삶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삶의 자리’라는 말이 성서해석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도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시대,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시대도 중요하지만 2009년 대한민국, 그리고 포항이라는 이 시대, 바로 이 장소에서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분명 2천 년 전이나 백 년 전이나 2009년 오늘이나, 또 이스라엘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상관없이 시대와 장소를 넘어 영원히 변치 않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있습니다. 복음전파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바로 이 시대, 이 장소에서 나에게 주어진 고유한 책임과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고 감당할 때 우리는 진정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나아가 한국교회도 건강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삶의 자리’ 즉 “내가 있는 지금 바로 그 자리에서” 이것이 우리 신앙에서 정말 중요합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유난히 회개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눅 3:3)라고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기 위해 광야로 나온 무리들에게 강력한 회개를 요구합니다. 너희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일갈(一喝)합니다. 

이 엄중한 회개 촉구를 들은 무리들은 두려운 마음에 세례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10절)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겠냐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이런 대답을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회개해라, 예수 제대로 믿어라, 세례 받아라” 등등 말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조금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그 대답이 오늘 본문 11절부터 14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첫째, 세례 요한은 먼저 옷 두 벌 있는 자는 어떻게 하라고 말합니까?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여기서 ‘옷 두 벌 있는 자’는 누구일까요?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단벌신사였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옷 한 벌만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그 겉옷을 병사들이 제비 뽑아 나눈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마 27:35). 

그러므로 옷 두 벌 있는 자란 부자라는 뜻입니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옷 백 벌이나 최소한 열 벌 가진 사람이 진짜 부자지 겨우 두 벌 가진 사람이 무슨 부자냐”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옷 두 벌 있는 자’란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을 뜻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보다 잘 사는 사람, 부자들도 훨씬 많은데, 대기업 회장이나 큰 회사 사장도 많은데 나는 기껏해야 남들보다 조금 먹고 살만한 수준이지 무슨 부자야? 남들 돕고 기부금 내고 그런 일은 부자들이나 하는 일이지 나 같은 사람은 상관없는 일이야.” 우리나라가 기부문화 세계 꼴찌랍니다. 그런 건 부자나 하는 일이지, 나는 부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부금의 천국이라고 하는 미국은 국민 중에 98%가 매년 어떤 형태로든지 기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체 기부액 가운데 재단 등을 통한 거액 기부는 23%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개인의 소액 기부라고 합니다. 오연호라는 기자가 쓴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이 사람은 본디 철저한 반미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잘못한 것을 전부 취재해서 네 권의 책으로 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미국을 연구해서 반미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겠다며 미국 유학을 갔다가 생각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미국을 나쁜 제국주의자들로만 보았는데 정작 미국에 가보니 보통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도무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정신이 미국을 지배하고 있더랍니다. 그 정신 때문에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을 유지하고 있고, 우리는 도무지 미국을 이길 수 없다며 책까지 낸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 국민이 참여하다시피 한 기부문화입니다.

세례 요한은 지금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부자만 남을 돕는 것이 아니다. 넉넉해서 남는 사람만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게 남들보다 옷이 단 한 벌만 많다 해도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백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옷뿐 아니라 먹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심정으로 내가 가진 것도 비록 넉넉지 않지만 나눌 수 있는 사람, 나눔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계속해서 세례 요한은 구체적인 직업을 언급합니다. 세리들은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합니다. 군인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로마에게 고용되어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리들이 정당한 세금 외에 더 많은 액수를 부과해서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것입니다. 

100만원만 거두면 되는 세금을 150만원 거두어 남는 50만원을 착복했다는 것이지요. 안 그래도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세리들은 미움을 많이 받았는데 이렇게 착복과 포탈을 일삼아 당시 유대인들에게 ‘죄인들’로 불렸습니다. 자, 그렇다면 묻습니다. 세리가 예수를 믿었어요. 그냥 믿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믿었어요. 그러면 자기 직업에 있어서, 좀 어려운 말로 자신의 ‘삶의 자리’에 있어서 어떻게 행동해야 옳습니까? 정해진 세금 외에 더 거두어 착복하는 일을 당장 멈추어야 합니다. 남들은 다 하더라도 나는 안 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세리라는 직업 자체가 잘못 되었으니 당장 그만두라고는 안 합니다. 그 직업의 특성은 인정합니다. 어쩔 수 없이 로마의 지시를 받고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현실 속에서도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죄 짓는 일만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리도 권력이라면 권력인데 그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죄짓지 말라고 한 것이지요. 

오늘날에도 권력만 쥐면 이렇게 행하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세상에 작은 권력에도 그토록 연연하며 잡기만 하면 그 힘을 휘둘러 악용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권력을 하나님이 주신 줄 알고 그 힘을 남 섬기며 희생하며 하나님 영광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군인들은 어떻습니까? 여기서 ‘군인’이란 로마 군인이 아니라 유대 군인들로 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일이 주로 무엇이냐? 세리들이 세금 거둘 때 옆에서 돕는 일입니다. 이들이 창 들고 서 있어야 겁나서 세금 낼 테니까요. 그런데 이 군인들은 월급이 매우 적었습니다. 그래서 세리가 세금을 거둘 때 정해진 액수보다 더 많이 거두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서 일정 금액을 나누어 먹곤 했습니다. 14절에 나온 “사람들에게서 강탈”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동료 군인을 시샘하거나 사적인 감정 때문에 상관에게 거짓으로 모함하기도 했습니다.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라”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자, 그러면 묻습니다. 이런 군인이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대충 믿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비록 월급은 쥐꼬리만 해도 적은 월급을 핑계로 죄 지으면 안 되겠지요? 힘이 좀 있다고 해서 세리와 합작해 남의 등을 치고 재산을 빼앗아서는 안 되겠지요? 동료에 대한 경쟁의식이나 사적인 감정으로 그를 미워하거나 모함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과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가야겠지요? 그래야 진짜 그리스도인 아니겠습니까?

❚진짜 그리스도인

세례 요한은 비록 세리와 군인 두 직업만 다루었습니다만 이런 원칙이 어디 이 두 직업에만 해당되겠습니까? 세리와 군인이 당시 가장 부패하고 손가락질 받는 직업이었기 때문이요, 죄지을 유혹이 가장 많은 직업이었기 때문에 두 직업만 언급한 것이지 이 원칙은 세상 모든 직업에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직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다 이 나눔과 정직, 자기희생의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특히 권력이나 힘이 있는 직업, 금전을 다루는 직업 등 죄 지을 유혹이 많은 자리에 있는 분들은 더더욱 조심하고 더 겸손하고 정직하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 시간 여러분의 다양한 직업을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어떤 직업은 어떻게 해야 하고 무슨 일은 하면 안 되는지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요? 누구보다 여러분 자신이 잘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직업에 있어, 내 상황에 있어 내가 정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일은 반드시 해야 하고 어떤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지 여러분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 알지만 그대로 살지 못해서 문제지요. 자, 여러분은 여러분의 상황에서, 현재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일을 반드시 해야 하고 어떤 것은 하면 안 됩니까? 그것을 아신다면 아는 그대로 실천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바뀌고 세상이 바뀝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자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 찾아오신 주님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고백합니다. 죄에 대한 회개가 삶으로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어떤 삶입니까?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요며” 이것은 나눔입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것은 회개와 정직, 삶의 변화입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것과 똑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오늘 본문 앞서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바로 삶의 변화입니다. 

현재 내 직업에서, 내 구체적인 생활에서, 내 습관과 말과 행동에서 구체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의롭게, 진짜 그리스도인답게 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는, 그리고 그리스도인 개인과 가정의 수많은 위기는 바로 여기서 시작이 됩니다. 예수는 믿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회개는 한다고 하는데, 그 회개의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몰라서 하는 말씀이에요. 물론 잘못인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사람들 다 그런 일들 합니다. 나만 안 하면 바보 소리 듣습니다. 왕따 당합니다. 그거 안 하면 사업 못합니다. 목사님이 현실을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다.” 직업별로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죄가 있습니다. 뇌물 안 바치고 안 받으면 일 못 한다고요? 탈세나 이중장부 안 만들면 사업 못한다고요? 거짓 사인 안 하면 남들 다 받는 돈 못 받는다고요? 

잘못된 접대문화가 판을 칩니다. 학생이 시험 때 부정행위 안 하면 성적 손해 본다고 합니다. 분명 죄는 죄인데, 잘못은 잘못인데 남들도 다 하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일 때문에 나는 지금 주님 앞에 회개의 열매를 제대로 못 맺고, 수십 년 교회 다녀도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 못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교수님 한 분이 설교 때 “여러분이 목사 되는 것보다 진짜 참기름 파는 것이 더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모른다”고 말씀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가짜 참기름이 많습니까? 사람들이 가짜를 당연히 여길 지경입니다. 남들도 다 가짜를 섞고, 저울 눈금 속이고, 그냥 그렇게 산다고요? 세상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당당하게 거부해야 할 거짓된 문화와 관습이 참 많습니다. 남들이 아무리 다 한다 해도, 또 그 때문에 내가 아무리 손해를 본다 해도 그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꼭 실천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남들은 다 안 한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실현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입니다. 나눔, 정직, 희생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바로 지금 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직업별로, 상황별로, 삶의 자리 별로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나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주님께 인정을 받게 되고, 우리를 통해 한국 교회가,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사회가 변할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있을 때 그의 군대에 병사 하나가 탈영을 했다가 잡혀왔습니다. 당시 탈영병은 무조건 사형입니다. 그런데 왕이 붙잡혀 온 병사를 보자 너무 어리고 선하게 생겨서 도저히 사형 시킬 마음이 들지 않더랍니다. 왕은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병사에게 묻습니다. “젊은 병사여, 네 이름이 무엇이냐?” 병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이름은 알렉산더입니다.” 순간 부드럽던 왕의 표정은 분노로 일그러집니다. 왕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네 이름이 정말 알렉산더란 말이냐? 그렇다면 너는 당장 너의 이름을 바꾸던가 아니면 알렉산더라는 이름에 맞게끔 살아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이름인 ‘그리스도’라는 글자를 우리 이름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답게 살던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바꾸든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참으로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아간다면 세상은 바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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