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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의 그물 안으로 (룻 2:1,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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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그물 안으로 (룻 2:1, 8~16)


그물 안에 들어온 고기라 하여도 좋지 못한 고기는 다시 내다버립니다. 이것은, 첨부터 나쁜 고기가 있다는 運命論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인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해 버리는 불신앙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물 안에 든 좋은 고기는, 하나님 말씀의 그물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 종국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이루는 복을 받습니다.

지금 이야기 흐름의 주도권은, 벌써 이방인, 모압 여인 룻에게로 넘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하나님 나라, 歷史의 수레’를 보십시오. 좌우 두 바퀴가 있습니다. 두 바퀴 중 수명을 다한 한쪽 바퀴는, 하나님께서 벌써 새로운 바퀴로 갈아 끼워놓으셨습니다. 

‘모압’으로 이민 갔던 엘리멜렉 가정, 보십시오. 그 가정의 처음의 주도권은 家長 ‘엘리멜렉’과 그의 婦人 ‘나오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더 이상 쓸 수 없었던 ‘엘리멜렉’이라는 바퀴는, 10년 전에 교체하셨습니다. ‘룻’이라는 바퀴입니다. ‘엘리멜렉’에서 ‘룻’으로 교체하는 데 걸린 시간이, 10년입니다. 

룻기 1장의 마지막 장면은,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 가정 이야깁니다. 모압에서 남편을 잃어버린 홀로 된 두 여인,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때마침 그곳은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 가정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나오미와 룻이라는 수레의 두 바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 중, 한 바퀴도 벌써 거의 수명이 다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오기까지는 나름대로 유용했지만, 보다 더 먼 길을 가야하는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계속 더 사용하기에는 좋지 않는 바퀴입니다 (나오미).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긴 여행을 위해서는, ‘룻’과 잘 어울리는 새 바퀴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다음 수순은 자연적으로, ‘룻’과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새 바퀴와 같은 人物을 준비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룻을 위하여 ‘이쉬 깁보르 하일’(אִישׁ גִּבֹּור חַיִל)을 준비하셨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오긴 왔지만, 룻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外國人입니다. 홀로된 여인입니다. 새댁입니다. 자식조차도 없습니다. 아무런 인간적인 끈이 없습니다. 늙으신 시어머니 ‘나오미’와 룻 자신, 단둘뿐입니다.

모세의 율법(토라)에 의하면, 자식 없이 홀로된 女人이, 유대사회에서 最下層民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국제 결혼한 가정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온 外國人 새댁이 자식도 없이, 홀로되었다면, 그 형편,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시어머니와 생사를 같이하고, 하나님 섬기겠다고 베들레헴으로 함께 온 룻이지만, 그가 처한 삶의 현실이 오죽했겠습니까? 

룻기 2, 6절을 보면 룻기 저자는,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온 룻의 삶의 결단을 가리켜서 ‘슈브(שוב)’했다고 합니다(뉘우치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온 여인으로 묘사함). 하나님을 떠났던 ‘나오미’만 ‘슈브’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자부인 異邦人 모압 女人인 ‘룻’도 나오미와 동일하게 ‘슈브’했다 합니다(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했다, 개종했다). 

엄밀히 말하면,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베들레헴 귀향과는 입장이 완전히 다릅니다. 시어머니는, 10년 전에 버리고 떠났던 고향으로 되돌아온 것이고, 배교했던 하나님을 다시 섬기기기 위해서, 회개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들레헴이 본래 자기 고향이 아닙니다. 異邦 땅입니다. 낯선 땅, 어머니의 고향을 자기 고향으로 삼고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난 여인입니다(우리나라 여성들이, 결혼하면 본적이 남편본적으로 바뀌는 것처럼). 

그가 섬기기로 한 ‘하나님’도 본래부터 자기가 섬기던 神이 아닙니다. 그가 섬기던 神은, 모압의 신 ‘그모스와 바알브올’입니다. 그러나 그 神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삶의 기반 다 포기하고, 찾아온 땅입니다. 룻기 저자는, 그러한 ‘룻’을 가리켜서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슈브, 開宗) 모압 소녀”라고 ‘룻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있습니다(룻 2, 6). 

시어머니와 함께 찾아온 베들레헴에서의 삶은 막막했습니다. 당장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새댁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추수하는 남의 보리밭에라도 나가서, 이삭이라도 주워야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딱한 룻을 위하여, 󰡔이쉬 깁보르 하일󰡕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룻기 저자는 ‘룻’의 베들레헴에서의 삶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다음과 같은 말부터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성경은, 룻의 가엾은 현실을 말하기 이전에, 먼저 유력한 사람 보아스의 이야기부터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 ‘유력한 자’라는 말이 (히) ‘이쉬 깁보르 하일’입니다. ‘이쉬’는 사람, 남자라는 뜻이지요. ‘깁보르’는 우리 성경에는, 유력하다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강한’strong, ‘강력한’mighty, 영웅, 부호, 전쟁영웅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보아스라는 인물이 ‘베들레헴에서는 재산이 넉넉하고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깁보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듯 합니다. ‘하일’은 힘, 부, 군대를 뜻하는 말입니다. 보아스가, 부자이면서도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룻을 위하여 준비하신 ‘이쉬 깁보르 하일’(유력한 사람) 보아스라는 인물에 대한 언급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성경을 한 번 가만 눈여겨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이 처한 현실에 영향을 받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도리어 인간의 형편과 처지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반전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얼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까? 이쉬 깁보르 하일(gibbor hayil, 유력한 자)을 통해서 반전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내 인생길을 한 번 돌아다보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살고자 하는 내 人生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쉬 깁보르 하일’(유력한 자)이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 잘 찾아보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 선교여행을 다닐 때,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쉬 깁보르 하일 같은 인물들을 붙여 주셨습니다. 로마서 16장에 열거되고 있는 이름들이 그 이름입니다(겐그레아 교회, 자매 뵈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에베네도, 마리아,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암블리아, 우르바노, 스다구, 아벨레, 아리스도불로 등). 

제 인생길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이쉬 깁보르 하일(유력한 자들)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많습니다. 저는 그 분들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 분들 때문에, 목회합니다. 룻의 인생에 나타난 이쉬 깁보르 하일(유력한 자)이 누굽니까? 자기 시아버지의 친족이었던 ‘보아스’라는 인물입니다(다른 친족들도 많았지만, 보아스만이 룻에게 ‘이쉬 깁보르 하일’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룻에게 주신 인생 최고의 축복이요, 선물입니다. 그러나 ‘룻’은 아직까지도 보아스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신 ‘이쉬 깁보르 하일’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이쉬 깁보를 하일’은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룻이, 보리추수 밭에서 ‘이쉬 깁보르 하일’(유력한 사람, 보아스)를 만나게 하심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 나라 歷史의 수레바퀴 중, 한쪽 바퀴는 아직도 삐걱거리는 바퀴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현재는 나오미와 룻이라는 두 바퀴로 수레를 굴리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먼 미래 여행을 위해서, 룻과 함께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바퀴로 바꾸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나오미라는 바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시고, 교체하기로 하셨습니다. 언제, 그 바퀴를 바꾸시기로 하셨습니까? 

베들레헴 들녘 보리 추수 때, 유력한 사람(이쉬 깁보르 하일)인 보아스라는 사람이 소유한 ‘보리밭’에서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온 나오미 가정은, 너무 가난하여 끼니조차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자식도 없이 홀로된 外國人 새댁 모압 여인 ‘룻’이 시어머니와 자신의 살길을 위해서 집을 나섰습니다. 우선 당장 먹는 것부터 해결해야 했습니다. 

마침 보리 추수기여서, 룻은 아무 밭에라도 나가서 은혜를 입으면, 이삭이라도 주워오겠다 합니다. 나오미가 허락합니다. “내 딸아, 갈지어다.” 룻이 나가서 곡식거두는 일꾼들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우러 어느 밭에 갔습니다 (그 다음 말씀 보십시오) 偶然히, 엘리멜렉의 친족(자기 시아버지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때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곡식 베는 일꾼들에게 와서,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면서 축복합니다.

여기 우리가 주목할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우연히”라는 말과 “마침”이라는 단어입니다. 룻이 가서 이삭을 주웠는데, 우연히도 그 밭이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때마침 시아버지의 친족중 하나인 보아스가 추수하는 일꾼들을 축복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그 밭에 나왔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룻’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偶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결코 偶然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攝理이지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원격조정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건이었다는 이야깁니다. 섭리란? 그리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건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카이로스’사건입니다(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절묘하게 만나는, 불꽃이 튀는 사건). 자동차 엔진에 타이밍 벨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실린더에서, 연료를 폭발시키기 위해서 전기불꽃을 튀겨줄 때, 그 때를, 정확하게 맞춰 연료와 공기를 공급시키기 위해 흡기밸브를 열어줘야 합니다. 그 타이밍을 조절하는 것이, 타이밍 벨트입니다. 타이밍 벨트의 생명은, 정확한 시점에 흡기밸브를 열어 주는데 있습니다. 아무 때나 흡기밸브를 열어주면, 엔진 출력도 떨어지고, 연비도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되지요. 

우리 인생의 成敗도, 하나님의 섭리적인 손길이 닿을 때,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삭을 줍던 이방인 모압 여인 룻과 엘리멜렉의 친족 중 하나인, 보아스의 만남, 얼마든지 그냥 스쳐지나갈 수도 있는 만남이지요. 그러나 이들의 만남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개입이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보자마자, 사환에게 묻습니다. “이는 누구의 소녀냐?” 이 젊은 새댁이 누구에게 속한(소속) 女人이냐? 이유가 뭘까요? ‘베들레헴 에브랏’은 유다 고을 중에, 작은 마을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있잖습니까?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上古(오랜 옛날)에, 永遠에 있느니라”(미 5, 2).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인 보아스가, 자기 고을 사람들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단 번에, 낯선 여인임을 알아본 거지요. 더 중요한 것은, 보아스는 이미 나오미의 며느리 ‘룻’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여인, 혹 지금 이삭 줍는 그 여인이 아닌가? 하고, 누구에게 속한 젊은 새댁인가? 물었다는 이야깁니다. 사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슈브) 모압 소녀인데(룻의 정체성 규명)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外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합니다(룻 2, 6-7).

사환의 대답을 듣자마자 보아스가 ‘룻’에게 이릅니다.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온 것을 마실지니라…”(8-9). 점심식사 자리에까지 초대받습니다. 파격적인 대우입니다. 놀라운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말씀사건입니다.

룻은, 말씀의 그물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적인 사건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력한 자(이쉬 깁보르 하일) 보아스를 통해서 사용하신 말씀의 그물이 무엇입니까?(레위기 19, 9-10말씀입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이방나그네)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우리교회로 말씀드리면, 내 수입 중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회봉사헌금을 드리라는 말씀이지요. 

내가 땀 흘려 지은 농사지만, 수확의 전부가 다 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가난한 자의 몫이 그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땀 흘려 번 수입(월급)이라도, 그것이 다 내 돈이 아닙니다. 내가 번 수입 중에, 가난한 자에게 줄 몫도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이방 거류민, 나그네, 어려운 이웃, 가족 중 어려운 분들). 그들의 몫까지 내가 다 쓰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룻은, 보아스가 펼친 레위기 19, 9-10 말씀의 그물 안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보아스와의 攝理的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이쉬 깁보르 하일’(유력한 사람이었던) ‘보아스’의 위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도, 적극적으로 말씀의 그물을 펼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하나님 말씀의 그물을 펼치고 있습니까? 내가 펼친 말씀의 그물 안에 누가 들어와 있습니까? 그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여보게, 줄기는 상하지 말고 두들겨 보고 익은 것만 따가시게; 여보게 철조망에 찔리지 않게 조심, 조심, 넘어 오시게. 가지는 상하게 하지 말고 사과만 따 가시게” 창신교회 신세원 목사 文巢齋에서). 

말씀을 맺습니다. 내 인생에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예비하신 ‘이쉬 깁보르 하일’을 만나야 합니다. 나아가 내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이쉬 깁보르 하일’이 된다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福의 根源이 되는 것이지요) 내 인생 속에서, 우리교회 공동체 안에서, 오늘의 ‘룻’은 누구입니까? 오늘의 ‘보아스’는 누구입니까? 우리 서로, 하나님 말씀의 그물 안에서 섭리적인 만남의 축복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룻’에게 ‘이쉬 깁보르 하일’(אִישׁ גִּבֹּור חַיִל)이 되었던 보아스와 같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멘.

하나님 아버지 感謝합니다. 우리 인생길을 걸어오는 동안, 룻과 같은 우리에게 보아스와 같은 이쉬 깁보르 하일을 붙여 주신 하나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간절히 간구하오니, 우리도 룻과 같은 가련한 인생에 대하여, 보아스와 같은 유력한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의 그물을 넓게 펴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믿음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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