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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시 5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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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시 57:1~5)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감동을 받았었다. 자신은 깨어진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자주 다투다가 결국 이혼을 했었다. 친척들과의 단절, 친구들과의 헤어짐.. 등등 많은 상처가 있었다. 아버지는 경제적인 문제로 외국에 나갔다가 무슨 문제로 귀국하지도 못하고 빚쟁이가 외국까지 쫓아가서 그에게 맞아 심장병이 도져 쓰러졌다. 그러면서 전화가 아들에게 왔는데 ‘나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하더라는 것.
  
집에는 차압딱지가 붙고 이 목사님에게까지 해결사라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집요하게 괴롭히는데, 심지어는 납치, 살해하겠다고 까지 위협.. 수요예배를 드리는데 교회에 까지 찾아왔다는 것. 그러면서 교회를 발칵 뒤집어버리겠다고 위협... 이 목사님이 얼마나 난감하겠는가. 

그런데 이 목사님을 보며 마음에 도전을 받는 것이 전혀 그 목사님은 마음의 고통을 내색한 적이 없었다. 
누구도 원망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젊은 목사가 이런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오늘 본문은 다윗이 쓴 시이다. 이 시를 어떤 상황에서 썼냐하면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고 있었을 때이다. 굴에 피아여 있던 때라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왕이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상황에서 굴에 피하여 있지만 언제 군사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캄캄한 굴 안에서 늘 선잠을 자다가 깨고...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글을 썼는데, 한가지 발견되는 것은 이 시가 너무 밝다는 것, 너무 낙관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위험한 상황하고 이 글의 내용하고 잘 매치가 안된다. 
5절.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지금 이럴 상황이 아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때인데,
7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지금 제 정신이 아니다. 지금 죽을 지경인데 무슨 찬송이 나오고 노래가 나오는가. 
8절의 말씀은 더하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새벽에 깨서 무엇하게.. 깨보았자 시커먼 굴 안인데...
9절.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체 하나님께 감사가 나오겠는가. 
  
마지막 11절에 나오는 내용이 압권이다. 이 시가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지금 절대절명의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이 쓴 시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 밝고 희망적이고 낙관적일 수 있느냐..라는 것.
이렇게 어려운 현실 속에서 낙관적일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비슷한 상황이 사도행전에도 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있다. 그런데 상황이 심상치않다. 

행 12:1-3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여론의 동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데 헤롯왕이 야고보를 죽였다. 그런데 여론을 보니 잘 죽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를 잡아 가두었다.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이제는 내가 죽는구나’ 감옥에서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그런데 베드로가 편안히 잠을 자고있는데 그냥 깜빡 잠든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천사가 와서 베드로를 깨우는데도 안 일어나니까 옆구리를 쳐서 깨운다. 
이런 베드로를 보면서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상황을 뛰어넘는 마음의 평안을 보면서.. 
우리같으면 불면증에 걸리고 복음을 전하다가 왜 내가 갇혀야만 하는지... 야고보도 얼마 전에 죽었는데 이제 나도 죽는구나.. 할텐데,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깨울 정도로 깊이 잠드는 마음의 평안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해 복잡하게 설명하고 싶지않다. 이것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의 믿음의 힘인 것이다. 
실제적으로 불면증에 걸려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그것을 뛰어넘는 구체적인 힘이 바로 믿음이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힘이 있는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윗의 내면에 아무런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4절.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얼마나 지금 그가 예민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가. 6절.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생각하면 잠이 안온다. 생각하면 분이 솟구친다.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데..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 나라를 구했는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마음에 분노가 올라온다. 
그런 모습이 오늘 본문에 고스란히 나온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원망과 분노가 일어날 때 이런 본능을 이기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분노가 있다. 상처가 있고 유혹 앞에 두려움이 있고.. 
그러나 어디서 차이가 있는가. 내 안에 두려움과 분노가 있을 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이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마음이 있을 때,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정도로 마음에 분노가 가득할 때 이것을 억누를 수 있는 힘이 내게 있나, 없나의 차이이다. 
여러분은 있는가.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죽을 때 까지 환경에 눌려서 산다. 날마다 불안하고 잠이 안오고 날마다 분노가 생기고...
  
다윗에게는 환경에 억압당하지 않는 밝음이 있고 노래가 있고 찬양이 있고 꿈이 있고.. 
이런 것이 우리에겐 있는가. 
아까 부른 찬송 469장 2절..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평화 평화로다.’
왜 못 빼앗아 가는가. 강도가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도 내 안에 자리잡은 평안은 왜 못 빼앗아가는가. 
이 땅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땅의 사람이 못 빼앗아 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빼앗기고 도적질 당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앗기지 않는 한가지는 하나님이 주신 평화라는 것이다. 
사울이 다윗이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지만 사울왕이 다윗에게서 절대 빼앗을 수 없었던 것.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이런 저런 빼앗김의 상처가 많을지라도 다윗이 빼앗기지 않았던, 베드로가 빼앗기지 않았던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평화, 우리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우리가 해야 할 두가지 일이 있다. 
  
1.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로 피하라.

1절.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다윗은 위기를 만날 때 주님께로 피했다. 표준새번역에는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주께로 피합니다. 
지금 다윗은 굴로 피했다. 몸은 지금 굴로 피했지만 그것은 안전한 피신이 아니다. 굴로 피했지만 지금 이 행위가 하나님께 피하는 일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 그리고 피하면서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말한다. 
사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찾아가서 ‘전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단 한번도 비굴하게 사울에게 빈 적이 없다. 다윗은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상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삼상 24:6을 보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그 다음을 보라)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사울을 왕으로 세운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기에 순복하는 것이다. 사울이 자신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당장 죽이고 싶겠지만 하나님이 세운 종이기 때문에 부하들에게 건들지말라고 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를 향해 분노가 있을 때 하나님께로 피하는 다윗과 같은 신앙의 자세가 우리에게도 자리매김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옛날 부모님이 떠오른다. 가난한 시절, 어려움이 있을 때 자식들은 다섯이나 있는 가운데 맨날 5남매가 돌아가면서 학비달라고 울고 길바닥에 드러눕고 옷을 다 헤어졌고 쌀독에 쌀이 다 떨어지고... 그런 가운데 아버지가 부르는 찬양은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있으랴’
진짜 웃긴다고 생각했다. ‘딴 근심있으니..’라고 부른다면 모를까..
늘 근심 속에 묻혀사는데 그런 찬양을 부르시더라는 것.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런 어려움 가운데 어떻게 그런 찬양을 하실 수 있었을까.. 보았더니 그 다음 소절에 답이 나온다.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하나님께로 피한 것이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앞 길 험하다. 살 길이 막막하다. 
2절가사에 보면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두려움이 있기는 있었다는 말 아닌가. 
‘전 날에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한숨이 있었다는 말 아닌가. 
두려운 일이 있기는 있었지만 그 두려움을 기도제목으로 챙기고, 지난 밤에 한숨지으면서 잠을 못 이루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노래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믿음의 힘이다.
 
어떻게 이런 힘이 생기는가. ‘십자가 앞으로 나갔을 때...’
내 모든 문제를 가지고 사람에게 찾아가지 않고 하나님께로 피할 때 이런 능력이 나타나더라는 것.
  
난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로 피해야 한다는 것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1) 하나님과의 친밀감의 문제이다. 

1절에 보면 ‘피하다’는 말이 두 번 나온다. 그런데 우리 말의 맹점이 무엇인가 하면 시제가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앞의 ‘피하다’는 현재형이고, 뒤의 ‘피하다’는 미래형이다. 
이것을 히브리원문으로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앞의 것은 완료형이고, 뒤의 것은 미완료형이다. 
그래서 이것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을 하면 이렇게 해석을 할 수 있다. 
‘내 영혼이 그동안 쭉 주께로 피난처를 정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갑자기 다윗에게 위기가 찾아오니까 허둥지둥 하나님께 피한 것이 아니다. 이미 다윗은 즐겁든지 우울하든지, 마치 어린아이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엄마에게 찾아가듯이...
누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가. 갑자기 위기를 만나면 하나님을 모두가 다 찾는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을 찾는 친밀함의 연습이 있기를 바란다. 예배에 마음을 집중하고 기도가 내 삶이 되고..
  
이렇게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어려울 때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피할 수 있는 것이다. 
  
2) 신뢰의 문제이다. 

이렇게 쭉 하나님께 피하다 보니까 어려울 때 축적된 경험과 간증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있는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피하는가. 
  
어느 자매가 실명위기에 처했는데 어느 총각이 프로포즈를 했다. ‘내가 너의 눈이 되어줄게’
그랬더니 이 청년이 교제의 조건으로 2가지를 내어걸었다. 

1) 교회에 다닐 것. 2)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것.
  
그런 가운데 눈에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뿌옇게 보이던 시력이 갑자기 안보이기 시작했다. 검진을 받으면서 실명이 될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남친이 청년수련회에 같이 가자는 것. 내키지않지만 따라갔다. 수련회 중 기도부탁을 했는데 목사님과 모든 청년들이 자매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를 받는데 갑자기 따뜻하고 밝은 손길이 내 머리 위에 임하더라는 것. 그 후부터 안 보이던 눈이 보이더라는 것. 
  
왜 이 형제가 두가지 조건을 내걸었을까. 이미 그 형제는 친밀함이 주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믿음의 묘미이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내 삶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너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바란다. 
  
지금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내 삶 속에서 역사하신다. 이 하나님을 자주 경험할 때 어려운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피하게된다. 
  
암몬과 모압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에 대하 20:12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으니 능히 막을 자 없다고 노래하면서 그가 이스라엘의 만백성 앞에서 선포하기를 20절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그때 나왔던 유명한 말이 있지않은가. 제사장 야하시엘이 15절에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2. 고통의 끝은 반드시 있다고 여기는 낙관적인 태도이다. 

1절 후반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잠시 동굴로 피신을 했지만 이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 다윗이 반지를 세공업자에게 맡기면서 글을 새기도록 주문을 하는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글을 보면서 힘을 회복할 수 있는 글. 
또 한가지는, 교만할 수 있을 때 그 문구만 보면 교만이 사라질 문구를 넣으라고...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다윗은 동굴 속에서 이런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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