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마리아의 시몬 (행 8:5~24)

  • 잡초 잡초
  • 588
  • 0

첨부 1


사마리아의 시몬 (행 8:5~24) 
 
 
본문은 예루살렘을 벗어난 생명의 말씀이 사마리아 땅에서 역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통해 복음에 참되게 반응하지 못했던 사마리아의 시몬과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은 천년 이상 적대 관계로 있었습니다. 갈등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뉜 BC 10세기부터 시작되었지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는 BC 722년에 앗수르에게 정복되면서 주민들의 일부가 추방되고 다른 민족들이 이주됩니다. 인종과 종교가 혼합 되면서 유대인들의 거부와 멸시는 심화되었지요. 

유다는 BC 6세기에 성전을 재건했고, 사마리아는 BC 4세기에 그리심 산에 자체 성전을 건립합니다. 하지만 BC 128년에 하스몬 왕조의 요한 히르카누스가 그 성전과 도시를 파괴하고 합병시킴으로써 갈등관계가 증폭되었지요. 예수님 시대에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적대적인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생각하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5)라는 말씀은 천년 이상 굳어있던 생각의 틀이 깨어지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였다면 민족주의 장벽을 넘어설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복음은 오랜 반목과 적대감을 넘어서서 거침없이 전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특정한 부류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에게도 전파됩니다. 따라서 복음적 교회는 부자든 가난하든, 능력 있든 무능하든, 배웠든 못 배웠든, 잘났든 못났든, 순수혈통이든 혼혈이든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보편성을 갖춰나가게 되지요.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했는데,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았습니다(6). 표적보다는 말씀에 반응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고침 받는 기적들이 발생했습니다(7). 사도행전을 보면 기적들은 복음 전파와 함께 항상 발생하는 보편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도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지는 않지요. 기적은 하나님 나라의 전진에 있어서 말씀을 확증하기 위한 특별한 필요에 따라 특수한 현상들로 나타납니다. 아무튼 사마리아 성에는 이런 일들 때문에 “큰 기쁨”이 있게 되었습니다(8).

복음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입니다. 또 진리는 “자유”하게 합니다(요 8:32). 이 복음 진리에 미신적인 요소가 혼합될수록 ‘자유’와 ‘기쁨’은 없고 두려움에 얽매이게 되지요. 사마리아인들은 오랫동안 잡탕 신앙을 가졌습니다. 사회 계층 전체가 자칭 큰 자라하는 마술사의 마력에 현혹되어 사람을 하나님처럼 받들면서 추종했었지요(9-11). 신기한 마술에 놀라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각하고 맹종할 만큼 저급한 수준의 종교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전파와 함께 이런 요소들이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복음을 통해 큰 기쁨을 맛본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12).

누가는 그들 중에 독특한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마술사 시몬은 초대 교회의 교부 저스틴 마터와 이레니우스의 글을 통해 영지주의의 창시자 시몬 마구스와 동일 인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만 신빙성이 높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말씀에 의하면 시몬은 마술을 마치 하나님의 능력인 것처럼 가장해서 사람을 현혹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거짓과 기만으로 많은 추종자를 만들고 돈을 벌었지요. 희한한 능력을 행해서 사람 위에 군림하기를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인물이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13a).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닐 만큼 열성 신자가 되었지요. 그런데 그가 참 믿음을 가졌는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참 많습니다.

우선 시몬은 신자가 된 후에도 생명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표적보다 말씀에 관심을 두었던 다른 이들과는 달리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며 관심어린 반응을 보였지요(13b). 베드로의 안수로 사마리아인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볼 때도 그가 원한 것은 성령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줄 수 있는 “권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능력을 “돈을 드려” 구매하려 했지요(18-19). 베드로로부터 경악할 만큼의 책망을 들었을 때도 시몬은 자기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저주가 실현될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라고 간청했을 뿐입니다(24).

시몬은 신자가 된 후에도 관심의 초점과 가치관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보다는 표적, 성령보다는 놀라운 권능, 회개보다는 저주를 피하는 일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가치 있게 여기고 관심 두었던 것을 여전히 가치 있게 여기고 관심 두었습니다. 변한 것이라곤 좀 더 탁월한 능력자가 되기를 사모하게 된 점뿐입니다. 그는 빌립의 등장 때문에 더 이상 위대한 자로 추앙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행하는 권능은 빌립보다 더욱 놀랄만한 것임을 발견하고 아낌없이 돈을 투자합니다. 자기가 안수하기만하면 성령이 임하는 놀라운 권능을 받으면 단번에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여 다시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마술사 시몬에게서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관심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생명의 말씀과 성령님과의 교통,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살펴 회개하는 일을 가치 있게 여기는 모습도 보지 못합니다. 단지 기존의 마술사 시몬에게 기독교라는 종교가 덧붙여졌다는 인상밖에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고 했습니다. 시몬에게서 이처럼 죽은 믿음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모두 산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믿고 소망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전혀 바뀌지 않은 채 세례만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충만한 중에도 종종 이러한 사람이 덩달아 생겨납니다.

베드로는 그런 시몬에게 단호히 선언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20). 저주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선언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결코 어떤 것을 대가로 지불해서 획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21)는 말은 출교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마치 말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을 동원해서 시몬을 대적하고 있는 듯합니다. 시몬과 같은 사고방식은 하나님 나라에 전혀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고수한다면 도무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지요.

간혹 십일조 낸 비율만큼 소득을 얻을 줄로 여기며 거룩한 헌상을 효과적인 돈벌이 수단으로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헌금으로 거룩한 직분과 감투를 획득하려고도 하지요. 돈을 드려 하나님의 은혜를 사겠다는 사악한 자세입니다. 희한한 능력을 행하는 권능을 획득해서 성도들 위에 폼 나게 군림해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마술사 시몬처럼 저주받을 생각이지요. 이처럼 자기를 신령하고 능력 있는 종으로 떠받들어 주기를 바라며 추종자들을 얻으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아무리 열정적으로 기도하며 희생적으로 활동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바른 마음이 아니라고 정죄를 당해야 마땅합니다.

시몬 같은 사람이 교회 안에 생기는 것도 문제지만 그런 사람을 분별해 낼 수 없는 공동체도 문제입니다. 시몬에 동조하고 청종하는 사람이 많다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심각한 장애가 되겠지요. 시몬이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짓을 행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충만했던 베드로는 마술사 시몬에게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것을 꿰뚫어보았습니다(22-23). 베드로가 시몬을 향하여 공포를 느낄 만큼 강력하게 대처한 것은 인간적으로 너무 심했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시몬의 악을 척결하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대단히 필요한 일이며 몹시도 중요한 일임을 잘 알았습니다.

존경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정당합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사모하는 일도 성도에게 필요한 요소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나날이 하나님 자녀다워지고 하나님 백성다워져서 존경받는다면 참으로 모범이 될 만하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몸 된 교회를 잘 세워가는 것은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몬은 돈이나 능력이나 직분을 사용해서 단숨에 존경받는 위치에 서고자 하는 무리한 욕망을 품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 성령님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부리고 싶어 했지요. 성경은 그러한 태도를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것으로 정죄합니다.

누가는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파된 일을 기록하면서 유달리 마술사 시몬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언급했습니다. 빌립의 사역과 관련해서 한 번, 베드로와 요한의 사역과 관련해서 또 한 번 언급했지요. 사마리아인들 중에서 복음에 제대로 반응한 사람을 실례로 들기보다 복음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누가처럼 이러한 일에 관심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서 기독교인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많아진다고 할지라도 시몬 같은 누룩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교회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거짓된 신자들을 분별할 힘이 약해진 교회를 생각할 때 이 일의 중요성은 더욱 크겠지요.

말씀 앞에서 먼저 우리에게도 시몬 같은 요소가 없는지 살펴야겠습니다. 도덕적인 죄에는 민감하면서도 자칫 이런 문제에는 둔감하기 쉽습니다. 별 문제가 아니라고 가볍게 덮어버리기도 쉽지요.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며 개혁을 외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보다 날카롭게 지적하면 관심과 존중을 받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비판 속에도 시몬 같은 요소가 깃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나부터 회개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성령님의 역사는 회개케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