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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선택(9) : 가정 (수 24: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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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선택(9) : 가정 (수 24:14~18)


여러분은 혹시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 대하여 들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닌다.> 

여기서 오늘 날 우리가 말하는 <행복 추구권>이란 단어가 유래한 것입니다. 행복은 국가보다도 우선하는 가치이며, 국가를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기독교적 가치를 반영하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가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본능 정도로 생각했지 우리는 그것을 연구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 대학가에 <행복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수년전(2002년) 하바드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의 강사로 기용된 한 사람이 <행복학>이라는 강좌를 처음 개설했습니다. 처음 여덟 명이 등록한 세미나로 시작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하버드생의 20에 해당되는 1,400여명이 등록하는 명 강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강의 내용은 <해피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저자 탈 벤 샤하르 교수는 이 책에서 불행한 사람의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는 미래의 성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살아가는 <성취주의자>들, 그들은 결코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순간의 쾌락을 추구하다가 미래를 상실한 <쾌락주의자>들, 그들도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셋째 불행한 사람들은 과거의 실패에 발목이 묶여 현재와 미래를 함께 잃어버린 <허무주의자>들, 그들도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진정한 행복은 불행한 과거에서 해방되어 현재와 미래의 행복을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강의를 기점으로 LA 근교의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는 <행복학 박사과정>이 처음으로 개설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행복학>은 세계적인 관심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어디에서 행복을 찾아야 할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다양한 견해들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정복하고 안정을 찾아가는 시점에서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새로운 세대를 향해서 그들의 리더였던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가기에 앞서 마지막 유언처럼 미래의 행복을 어드바이스하는 중요한 말씀을 남깁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가정의 예배자’로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14절)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경외의 표현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예배’(worship)의 영어 단어는 본래 ‘가치’(worth)라는 단어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중시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바라보고 산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에는 들어 왔지만 아직도 예배를 생활화하지 못하고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그 선택을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합니다. 오늘 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우리는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다른 이름은 다원주의 시대입니다. 가치가 다원화되었고 그러다 보니 가정도 식구들이 서로 각각 다른 가치를 갖고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니 가정의 결속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잭 볼스윅(Jack Balswick)이라는 기독교 심리학자는 오늘의 가정들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1)전통적, 2)현대적, 그리고 3)성서적 가정입니다. 이 세 가지 유형의 가정을 나누는 기준은 권위입니다. 전통적 가정의 권위는 주로 <아버지>였습니다. 이런 가정을 우리는 가부장적 가정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이런 가정에는 엄격한 질서는 있지만 종종 서로의 자유가 존중되지 못하는 율법주의적 <억압>의 특성을 갖습니다. 현대적 가정은 <권위가 부재>하는 가정입니다. 가족 각자가 저마다 자기 중심이 된 가정입니다. 이런 가정일수록 <혼란>스럽고 갈등 구조를 갖습니다.

 그러나 성서적 가정의 권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을 함께 섬기며 하나님의 통치아래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은혜가 다스리는 가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우리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기로 선택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기독교 화가 밀레는 그의 유명한 작품 <만종>에서 행복한 인간의 모습을 부부가 하루를 함께 노동하며 일하다가 저녁 무렵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함께 기도하는 모습에서 찾았습니다. 일주일을 삶의 현장에서 온 식구가 열심히 각자 일하다가 주일 가족이 함께 하나님의 집을 찾아 예배하는 모습보다 더 행복한 광경이 있을까요? 한 평생 이 행복을 붙잡고 사는 우리가 되시기를 기도하십시다.

2. 하나님이 아닌 우상의 포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서의 또 하나의 도전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 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였습니다. 
여기서 ‘신들’로 번역된 영어 단어는 입니다. God과 비숫하지만 god이 아닌 것. 우리는 이런 것들을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이 우상들은 종종 거짓 신의 자리에 앉아 인간을 지배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경쟁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역사적 비극의 하나는 우리는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행복을 눈물겹게 추구해 왔지만 우리가 추구한 것은 행복의 참 근원이신 하나님이 아닌 우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한국인의 언어에서 가장 다양하게 사용되어 온 단어가 ‘복’이란 단어가 아닙니까. 우린 새해를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로 여는 민족입니다. <복이 찾아온다><복이 달아난다><복을 타고 난다><복을 아낀다><복을 심는다><복을 거둔다><복이 터진다><복이 쏟아진다><복 스럽게 생겼다.><복스럽게 먹는다><다복하다/박복하다> 아기가 태어날 때 강보에도 <복>자를, 베게모에도 <복>을, 그릇에도 <복>자, 색동 옷가지에도 <복>을, 장롱에도 <복>을, 심지어 요강에도 <복>을, 옛날 어른들의 이름에도 압도적인 다수의 이름들은 복동이, 복돌이, 천복이, 만복이, 수복이, 복실이, 복녀, 복희, 복자, 복란이, 복순이,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이런 복을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 출세하고 돈 벌고 오래 살고아들 많이 낫고 등으로만 이해하여 왔습니다. 그런 영향으로 예수를 믿고도 우리는 이런 복을 추구하는 방식으로만 신앙을 이해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을 <기복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신앙은 달리 말하면 <우상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녀들에게 그래도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돈 밖에 없다>고 가르칠 때 실제로 우리는 돈이 하나님이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고3되는 자녀들에게 교회는 대학에 가서 나가도 되니까 일년 동안은 입시에 충실하라고 가르칠 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실제로 예배는 중요한 가치가 아니고, 출세가 더 중요한 가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수능시험을 마친 자녀들에게 나는 성적보다 네가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무엇보다 자랑스러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니면 네 성적이 마음에 안 들거든 이제 교회는 잊어버리고 앞으로 재수나 열심히 준비하라고 가르치십니까? 그런 분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진짜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그가 진실로 구약이 가르친 여호와요 신약이 가르치는 예수입니까? 아니면 돈이요 출세요 명예요 권력입니까? 그런 이들에게 성경은 아직도 이렇게 도전합니다. <네 섬길 자를 택하라>고. 과연 우리는 성경의 백성들처럼 대답할 수 있을까요? 16절입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3.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섬김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테스트는 결국 믿음의 대상을 어떻게 섬기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은 보이는 섬김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순히 하나님 잘 믿으라는 말씀으로 끝내지 않고 <섬기라>는 말씀으로 도전합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우리의 섬김이 우리의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17-18절의 이스라엘의 고백은 한마디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17절) 우리를 인도하시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18절)” 그 하나님을 어떻게 하겠다고 고백합니까? 

18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여기 <우리>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특히<가정>을 의미하고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다시 15절의 고백을 상기해 주십시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제가 우리 한국 지구촌 교회를 개척하고자 미국에서 한국으로 나올 것을 준비할 무렵 한 미국 국회의원의 죽음이 미국 땅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름은 리 애트워터(Lee Atwater)였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 공화당을 움직이는 핵심 인물이었고 과거 조지 부쉬와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만든 소위 킹 메이커였습니다. 

그는 미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네거터브 캠패인을 시작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의 전략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들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인물이었지만 많은 정적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무려 15년동안 돈과 권력을 누리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건강 진단을 받다가 뇌 종양 판정을 받습니다. 그의 건강이 돌이킬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한 날 모든 것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합니다. 이제 무엇을 하겠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제 인생을 반성하고 집으로 아내 곁으로 돌아가겠습니다.”고 말합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정적으로 살던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그에게 정중한 사과 편지를 받게 됩니다. 추수 감사절을 앞둔 그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뇌종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병이 저의 인생을 돌아보고 저를 회개의 자리로 인도했고 제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여러분에게 이 용서의 편지를 쓰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991년 2월 라이프 잡지에 그는 마지막 기고를 통해 이런 공적인 고백을 남깁니다. “80년대는 부와 권력, 명성의 우상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나는 이 시대에 누구보다 부와 권력과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이 모든 것을 누리고도 인생은 공허하다는 것의 증인이 되고자 합니다. 어떤 권력으로 가족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마음으로 함께 하는 그 행복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80년대는 우리 모두를 도덕적 타락으로 이끌었습니다. 저의 병이 그런 진실을 저에게 알게 했습니다. 

이제 누가 90년대의 미국 사회를 이끌어 갈지 모르지만 저의 뇌종양보다 더 무서운 영적 종양과 같은 영적 진공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씀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는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교회를 참석하던 날 교회 뜰을 내려오다가 기자들의 마지막 질문을 받습니다.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제가 정치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오늘 제가 가족의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하며 느낀 그런 행복을 한 번도 느낀 일이 없었습니다. 이 말로 제 소감을 대신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부디 하나님을 만나고 행복하십시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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