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무엇을 보려 하느냐 (마 11:2~9)

  • 잡초 잡초
  • 238
  • 0

첨부 1


무엇을 보려 하느냐 (마 11:2~9) 

 
베스트셀러 중에 <최고 경영자 예수(Jesus CEO)>라는 책이 있습니다. [로리 베스 존스(Jones, Laurie Beth)]라고 하는 여자 분이 쓴 책입니다. 존스 그룹의 창업자이자 현 회장으로 광고 대행사를 창립하여 15년 동안 성공적으로 운영해오다가 영적인 원리들을 경영에 도입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창한 이 책에서 가장 이상적인 경영자 상을 예수님에게서 찾아내고 21세기는 예수님의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성서의 진리를 기업경영, 인간관계 및 일상생활에까지 직접 적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과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통해 사업을 발전시키고 인생을 풍요롭게 가꿔나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증거를 삼는 것은 예수님은 먼저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대로 일생을 살았다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예수님이 일하기 전에 먼저 광야에 나가서 40일 동안 기도 하면서 하나님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다 결정해 놓고 그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목적과 의미를 다 결정해 놓고 그대로 밀어 붙였다는 겁니다. 목적이 분명하고 그 목적대로 살아가는 이것이 성공하는 것이랍니다. 

살아가면서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고 하는 게 아니라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문제를 신앙적으로 먼저 해결하고 그 해결된 신앙 안에서 제자들을 믿었고 양육했다는 사실을 무려 100가지의 예를 들어가면서 예수님을 경영자적 시각에서 모델로 삼아도 훌륭하고 가장 모범적인 분이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목적을 가장 잘 이루신 분입니다.

인간의 목적 없는 헛된 꿈들은 때때로 삶을 파멸로 이끌어 가기도 합니다. 인생이란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위해 하루하루를 소비하고 시간을 투자하고 삶을 맞바꾸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목적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비록 말로는 하지 않더라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생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주로 무엇을 말하며 무엇을 향해 행동하며 사십니까? 평소에 그 사람이 자주 하는 말이나 자주 하는 행동이 곧 은연중에 보여 지는 그 사람 생의 목적이기 쉽습니다. 생의 목적이 좋아야 하겠고 이루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목적은 가치가 없어지고 맙니다.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목적했던 바를 잃어버렸을 때의 허망함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가치 있는 목적을 가졌다면 이루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철들기 시작하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철이 없었을 때는 몰랐는데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고민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람이 고민이 생기기 시작하면 철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문제들 중에 가장 큰 인생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아무리 세상 고민 다 짊어지고 사는 것처럼 해도 이 두 가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결국 고민의 가장 근본적인 고민은 이 두 가지입니다. 항상 극과 극인 이 삶과 죽음의 문제는 멀리 있는듯하면서도 늘 붙어 다닙니다. 멀쩡하게 어제 만났던 사람이 오늘 죽는 사람도 있고 아직 이룰 것이 무한한 사람이 절반도 이루지 못한 채 떠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문제 중에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있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내가 선택 할 수 없는 문제 중의 가장 확실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는 얼마든지 내가 만들고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의 목적이란 마침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것들이라는 중요한 소망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이 성공하고 꿈을 이루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룰 수 있는 목적, 그 목적을 위한 계획, 이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르트르(J. p. Sartre)] "인생이란 계획의 연속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N. V. Peale)] 박사는 "사람은 평생목표, 년도 별 목표, 주별 목표, 일별 목표를 세워야 하고 자기가 40년 후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겠는가를 명확히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필립스 브룩스(p. Brooks)]목사는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말고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말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방법들입니다. 

사람의 사망 율이 결혼식이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의 전날에는 훨씬 감소된다고 합니다. 죽음을 앞 둔 환자라 할지라도 며칠 앞에 있는 자신의 특별한 날을 보내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이 자기 앞에 어떤 꿈과 목표를 가졌을 때는 비상한 힘을 발휘하여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목적이라든가 삶의 목표가 중요한 것입니다. 되는 대로 사는 삶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계획은 멸망의 지름길이요, 맹 목적은 의미 없는 죽음을 향한 달음질일 뿐입니다.

유명한 우화가 있습니다. 한 추장이 늙어서 자기의 추장 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세 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습니다. 눈앞에 큰 나무가 있고 그 나무 가지에 독수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추장은 맏아들에게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맏아들이 대답합니다. "하늘이 보이고 나무가 보입니다." 추장은 실망하여 둘째 아들에게 똑같이 물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대답합니다. "나무가 보이고 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독수리가 보입니다." 추장은 역시 실망한 눈빛으로 막내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막내아들이 대답했습니다. "독수리가 보이는데 두 날개가 있고 그 날개들이 마주치는 곳에 독수리의 가슴이 보입니다."그 때 추장은 기쁨으로 외쳤습니다. "그 곳을 쏴라" 막내아들의 화살은 독수리의 가슴을 정확하게 명중시켰고 추장은 막내아들에게 추장의 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자기의 목표하는 바를 확실하게 내다 볼 줄 아는 인간이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교훈 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전래동화입니다. 

그들이 들로 나온 목적은 사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막연하게 독수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습니다. 목적은 사냥이므로 독수리를 쏘아야 할 것이며,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곳은 독수리의 가슴 한군데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가능성이 무한한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뇌 학자 [에코노모]가 사람의 뇌 세포를 약 136억 5천300만개나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뇌 세포 가운데 보통 사람이 평생 얼마의 세포를 사용할까요? 날마다 글쓰기에 전념한 유명한 작가 [괴테]는 일생동안에 겨우 4%를 사용하였고, 매일 연구에 몰두한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일생동안 겨우 6% 정도밖에 채 10%를 사용하지 못하였더랍니다. 

만약에 우리 중에 어느 누가 뇌 세포의 10% 이상만 사용 할 수 있다면 역사상 최대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의 단 10%도 쓰지 못하고 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감히 교만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시용하는데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목적이 있는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목표가 있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특히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신앙의 경주가 있어야합니다. 영원한 천국을 얻기 위하여 흔들리지 않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일을 하더라도 일을 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또한 돈을 버는 목적도 분명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나 신앙의 목적은 더욱 분명해야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위대한 인생은 위대한 목적을 위해 위대한 헌신을 하는 사람이다."

[링컨(Lincoln)]은 말하기를 "사람은 자기가 결심하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제 나름대로 마음의 안경을 쓰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안경 빛깔에 따라서 그 생의 빛깔이 여러 모양으로 달라집니다. 절망의 검은 안경을 쓰고 인생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어둡고 쓸쓸하게 보입니다. 장미색 밝은 안경을 쓰고 생을 내다보면 그의 생의 대부분이 장미 빛처럼 기쁨으로 보일 것입니다. 인생 그 자체는 하나입니다. 하지만 어떤 마음의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빛을 내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왜 나옵니까? 예수는 왜 믿습니까? 무엇을 향해 신앙 생활하십니까? 분명한 신앙의 목적의식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좇던 수많은 군중들을 향해서 던진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수많은 군중 앞에서 하신 이유는 세례요한의 위대성을 밝히고자 하심과 동시에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고자 하심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무시하거나 그의 인격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줏대 없는 사람으로 호도하고 있었습니다. 당대에 일부 사람들은 권력에 아부해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왕궁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오늘 예수님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절대로 신앙의 지조를 버리고 세상과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례요한은 왕을 책망하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부드러운 옷 대신 약대 털옷을 입었고 가죽 띠를 띠고 있었으며 또 궁(宮)안에서의 화려하고 안락한 생활대신에 광야에서 생활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모습에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강조하는 <금욕적인 생활양식>과 자기들을 향한 <엄한 경고>에 한계를 깨달은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을 경멸하기 시작합니다. 복음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삶의 목적이 바뀌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책망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목적이 바뀔 때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안이함만 추구하고자할 때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보려고 하느냐?"고 야단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에서 무엇을 보려고 하십니까? 우리의 신앙이 마땅히 바라보아야 할 것을 보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하십니까? 단순한 인격수양입니까? 폭넓은 인간교제입니까? 믿음 없는 사람들처럼 인간적 존경이나 받으려고 하십니까? 지금 지극히 인간적인 욕심에 이끌려서 정한 인생의 목적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인생의 목적이라고 믿는 목적에 이끌려 살고 있습니까? 어떤 목적이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보려하느냐?>는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가진 사람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해성의 성도님들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